모두가 평론가인 시대
막연히 10년 뒤에 뭐라도 되어있을 줄 알았는데,
옛 성인들이 말한 10년이 지났건만
난 아직도 영화 만들기에 전문가가 되어있지 않았다.
며칠 전 새로운 작업에 들어가는 친구에게
내가 그동안 만든 자료들을 무상으로 넘겨주고
업계 최고라는 평판을 듣었지만
여전히 나는 감독이 되지 못한 미생의 신분으로 취급받는다.
개인이 쌓은 경험은 친분에 의해 알음알음 전달되다가 한 사람의 은퇴(?)와 함께 사라진다.
이 산업은 끊임없이 바뀌고, 기술은 늘 진보하며, 플랫폼은 더 다양해지고 있다.
극장용 2시간짜리 영화 문법에 맞춰 글쓰기를 연습한 세월이 무색해졌다.
노하우의 축적은 할 수 없는 구조로 되어있다.
그렇게 나는 지망생이라는 이름으로 남아 지박령처럼 떠나지 못하고 영화계 주변을 부유하고 있다.
그래도 10년 정도 되었으니 내가 그동안 겪은 것에 관해선 논할 처지는 된 것 같다.
아니, 사실은 처음부터 내 의견을 말할 수 있었으면
지금과 같은 부조리를 겪지 않았어도 되었을 것이다.
모두가 평론가인 시대이다.
그렇게 인터뷰이로 실리기 원했던 씨네 21은 나조차 구독하지 않게 되었다.
무언가를 보고 느끼고 말하는 것에 자격이 주어진다는 것 조차가 구시대적 발상이었다.
평론을 위한 평론으로 자기들만의 리그를 펼쳤던 세대들은 빠르게 사라졌고,
뒤늦게 평론가들도 별점을 메기고 눈높이를 낮추려고 노력했다.
모두가 평론가인 시대에
남들이 읽어주길 바라는 글을 쓰면서
어려운 언어를 들이밀며 자신이 더 잘 본다는 그 태도부터 버렸어야 했다.
세상 모든 곳에서 권위가 빠르게 해체되고 있다.
방구석 1열 또한 영화 마케팅의 영역이라 영화의 발전을 위한 비평과는 거리가 멀다.
한국영화의 비극은 자정작용을 위한 내부의 반성도,
애정 어린 눈길로 바라봐주는 다양한 목소리의 부재로부터 시작된 것 같다.
유튜브 <거의 없다>를 보며 함께 낄낄댔다.
내가 못했던 말을 속시원히 말해주는 이의 등장이 반가웠던 것 같다.
최근에 개봉한 감독의 입에서 영화 흥행은 모르겠고,
<거의 없다>에서만 안 까이면 좋겠다는 말을 들으며 속이 쓰렸다.
내부 사정을 잘 몰라서 저럴 수 있지 라고 가볍게 넘겼지만,
이게 때린다고 안 아픈 건 아니라서 비난의 당사자들은 상처를 받았다.
가끔 흘러나오는 내부자들의 변명은 한 꼭지만 따와서 조림 돌림 당하기 일 수였다.
그래, 이 시스템에서 영화 찍기를 포기한 10년 경력의 내부자로서
애정을 담아 한 번 의견을 내어보자 라는 생각이 들었다.
'듀나'처럼 철저히 익명으로 갔어야 더 편하게 말할 수 있었을 텐데...
일부 지인에게 이 계정을 알려준 게 살짝 후회된다.
애초에 브런치에 글을 쓰는 순간 더 이상 돌아갈 수 없는 강을 건너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아직도 영화를 사랑하고 잘 되었으면 하는 입장에서 용기를 내어본다.
그냥 비판이 아니라 술자리에서 공중으로 날려 보낸 아이디어들도 글로 옮겨보고 싶다.
어쩌면 우리는 아무런 비판 없이 여기까지 온 게 아니라
발언을 멀리까지 퍼트릴 용기를 내지 못했던 것 같다.
글로 꾸역꾸역 박제시켜 조금이라도 나아가는 원동력으로 삼아지면 더할 나위 없을 것 같다.
내 인생의 반을 투자한 영화와의 이별을 적어 내려가며
그 누구의 탄압 없이 스스로 적어 내려가는 글이 유시민의 '항소이유서' 급은 될 수 없지만,
어딘가에 글로 남겨지는 내 의견이 존재한다는 사실이
조금이나마 영화를 향한 다양한 목소리의 일부로 남았으면 좋겠다.
뜨겁게 영화를 사랑하는 한 인간의 고백이 얼마만큼의 영향력이 있을지 모르겠지만,
잉여인간의 시간을 유의미하게 썼다는데 만족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