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업윤리에 관하여
자본주의 사회에 살고 있었지만 자본에 대한 이해는 없었다.
영화를 예술의 영역으로만 한정지어서 보던 시절에
감독이 원하는 대로 하지 못하게 하는 제작사와 투자사들은
나의 판타지에선 악당의 역할을 담당하였다.
감독도 아니었지만 감독의 예술적 자유에 목말라있었다.
그러다 감독이 제작사 대표인 영화를 참여하게 되었다.
감독 원하는 대로 다 할 수 있으니 유토피아가 펼쳐질 거라 생각했지만
결과적으로 내가 경험한 영화 중에 제일 최악이었다.
살면서 처음으로 중도포기란 걸 해보았고,
경력에 흠이 될까 봐 두려웠다.
다시는 영화판에 돌아오지 못할까 봐 무서웠는데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감독 개인을 놓고 보면 열정적인 그에게 많은 걸 배웠다.
1인 2역을 하는 그는 진정한 멀티테스킹 달인이었고,
시간을 허투루 쓰는 법이 없었다.
밥을 먹으며 레퍼런스를 보았고, 아이디어가 생각나면 밥을 먹는 도중에도 공유를 하였다.
회의를 진행하는 중에는 늘 핸드폰으로 다른 잡다한 업무를 처리하였다.
식사 시간에 공유된 레퍼런스는 그 구간을 잘라서 드롭박스에 정리했고,
회의록은 그날그날 정리해서 프린트를 하여 파일 철에 보관하였다.
PDF 파일로 따로 만들어서 이메일로도 보냈다.
쏟아지는 그의 아이디어를 보는 게 즐거웠기에
시도 때도 없는 업무지시가 부당하다는 생각은 하지 못했다.
그는 저녁이 되면 제작자의 업무를 보기 시작하였다.
두 가지의 업무는 늘 분리되지 않았다.
감독이 퇴근하지 않으니 먼저 집에 간다고 말할 수가 없었다.
업무 요구도가 높아서 하루에 쏟아지는 일들을 다 처리하기에도 버거웠다.
평균 퇴근 시간은 11시였고, 촬영 들어가기 직전에는 택시를 타지 않고 집에 간 날이 없었다.
택시비가 만원이 넘으면 내가 부담해야 했다.
가끔은 선심 쓰듯이 만 사천 원이 나온 택시비 영수증을 정산해 주기도 했다.
그렇게 퇴근하면 다 못한 일을 집에서 마무리하였다.
나 이전의 수많은 사람이 면접에서 탈락하였고,
업계에서 까다롭기로 소문난 그에게 선택되었다는 알 수 없는 자부심이 있었다.
나는 이 일을 잘 해내고 싶었다.
촬영일이 점점 다가오면서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연출부의 인원이 반으로 줄었다.
업무는 점점 늘어났지만 인원이 쉽게 충원되지 못했다.
그러던 어느 날 퇴근길 지하철에서 쓰러졌다.
아침에 치통이 있어서 치과를 다녀왔었다.
그날따라 속도 안 좋아서 설사를 몇 번이나 했지만
회의가 저녁까지 줄줄이 있어서 조퇴를 할 수 없었다.
회의록 작성까지 마무리를 하고 퇴근을 하였다.
퇴근길에는 늘 팟캐스트를 들었는데,
내려야 할 역이 가까워오면서 점점 속이 안 좋아졌다.
조금만 버티면 내린다는 생각에 내리는 방향 쪽으로 이동을 해서 문에 기대었다.
이어폰으로 흘러나오는 진행자의 목소리가 테이프가 늘어난 마냥 늘어졌고 속이 울렁거렸다.
문이 열리면서 바닥에 쓰러졌던 것 같다.
누군가 나를 일으켜 주었고, 정신을 차려보니 왼쪽 광대 쪽이 아펐다.
플랫폼에 있는 의자에 한참을 앉아 있다가 집으로 돌아왔다.
다음날 아무렇지 않게 출근을 하였다.
당시 준비하던 영화는 CF에서 오랜 기간 촬영을 하던 촬영감독과 함께 준비하고 있었다.
자동차와 화장품 쪽 광고를 주로 찍었고, CF 업계에서는 최고의 대우를 받고 있었다.
그는 아이들이 자라면서 돈보다는 명예가 필요하다고 느꼈다고 말했다.
영화를 하기 위해서 그는 많은 걸 포기해야 했다.
보수적인 영화계에서 CF 촬영 감독을 고용한 건 파격적이었다.
제작사 대표이자 감독이 할 수 있는 선택이었다.
콘티를 준비하는 기간 동안 그가 그동안 모아 왔던 수많은 영상들을 제공받았다.
비주얼에 많은 공을 들이고 싶었던 감독의 니즈와도 잘 맞았고,
나 또한 CF에서만 볼 수 있었던 영상미를 영화에서 구현할 수 있다는 기대감이 커졌다.
그는 영화에 대해 진심이었기에 정말 열정적이고 창의적으로 아이디어를 냈고,
콘티를 하는 내내 즐거웠다.
촬영을 앞두고 테스트 촬영을 진행하였다.
그가 구현하고자 했던 이미지들은 고가의 장비와 인력이 필요한 것들이었다.
그는 촬영이 가까워지면서 하나둘씩 타협해야만 했다.
자신과 오랜 기간 일하던 촬영 퍼스트는 영화 업계의 단가를 맞추지 못해서 포기해야 했다.
함께하던 색보정 업체와도 결별해야 했다.
늘 사용하던 장비들도 비용이 맞지 않아 쓸 수 없었다.
결정적으로 자신의 영화 입봉을 위해 수개월을 기다린 B캠 촬영기사도 포기해야 했고,
그는 영화를 포기했다.
한 업계에서 최고의 대우를 받던 촬영감독은
업계에 대한 이해도가 없다는 핑계로
영화를 찍어보지 않았다는 이유로
여러 방면에서 압박을 받다가 촬영 한 달 전에 스스로 관두게 되었다.
그 촬영감독의 빈자리는 빠르게 채워졌다.
나 스스로가 '갓 00'라고 부르는 촬영 감독이 함께하게 되었고,
내가 감독이 되면 꼭 함께 하고 싶었기에 그와 함께하는 작업이 기대가 되었다.
떠나간 사람의 빈자리가 아쉬우면서도 새로운 사람으로 인해서 빠르게 잊혔다.
부족한 연출팀은 채워지지 않았고, 조감독 마저 바뀌었지만 영화는 촬영에 들어갔다.
매일매일 촬영이 끝나도 쉴 수 없었다.
프리 과정에서 마무리 짓지 못한 업무를 동시에 진행해야 했다.
어느 날 촬영팀 퍼스트와 친분이 있어서 함께하는 술자리가 마련되었다.
평소에 술을 잘 드시지 않는 '갓 00' 촬영감독이 그날따라 술자리에 나와주었다.
그렇게 연출팀의 업무와 영화판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다가
그분이 자신은 지금 영혼 없는 알바를 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영화일은 나에게 자아실현의 도구였기 때문에
그의 그런 말에 충격을 받았다.
'갓 00' 님의 입에서 나온 말이라 그땐 배신감마저 들었던 것 같다.
거의 모든 장면에 CF 촬영 감독이 준비한 레퍼런스가 반영되어있었고,
다른 촬영감독이 짠 콘티와 렌즈 미리 수 까지 정해주는 감독 밑에서
그가 할 수 있는 건 말 그대로 수긍하는 일 밖에 없었을 것이다.
결국 아무것도 제대로 소화시키지 못한 채 거대한 욕망의 덩어리와 같은 형태로 영화는 완성되었다.
영화는 배우들과 감독의 유명세에 크게 흥행을 했다.
'갓 00' 촬영감독은 이후 몇 편의 영화를 찍고 영화계를 떠났다.
최근의 근황을 들으니 VR업계에서 일하고 계신다고 들었다.
처음엔 그가 영화계를 떠난다는 말에 너무 안타까웠다.
그때만 해도 영화를 포기하고 다른 업계로 가는 건
영화라는 성공의 사다리를 내려가는 것 같은 착각을 하며 보내던 시기였다.
이제 와서 보니 그는 변해가는 흐름에 미리 가서 기다리고 있는 건 지도 모르겠다.
성미산 마을에 살며 마을 공동체를 가꾼 그는
어쩌면 정말 불평보다는 실천의 삶을 늘 살아왔던 것 같다.
누구나 주변에 끝없이 불평만 하는 말로만 똑똑한 사람들이 있다.
지난 10년 간 영화업계에서 버티고 있던 나는 그런 부류의 사람이었다.
상황의 불합리를 느끼고 바꾸고 싶었던 사람은 말 보단 행동으로 보여주었다.
CF 촬영감독이 그랬고, '갓 00' 촬영감독이 그랬다.
지나고 보니 내 주변에 사람을 중심에 두고 소신 있는 선택을 했던 어른들이 계셨다.
다만 내가 그걸 보고 깨달을 준비가 안되어서 보고도 아무런 영향을 받지 못했을 뿐이다.
처음 브런치에 글을 쓸 때만 해도 할 말이 정말 많았는데,
결국은 적절한 행동을 취하지 않았던 나의 탓이 컸다는 생각이 많이 든다.
행동의 변화 없는 불만은 내 얼굴의 침 뱉기와 다름없다.
더 이상 욕하는 것도 지쳤고, 불평만 하기에도 겸연쩍다.
영화를 사랑하는 것과 직업으로서의 영화 일이 다르다는 걸 뒤늦게 알았다.
지금까지의 직업윤리는 성실함과 책임감을 요구하였지만
사람보다는 일이 우선시 되면서 수많은 이들이 자신의 인생에서 소외되었다.
무언가를 사랑한다고 해서 불합리한 상황까지 견뎌야 하는 건 아니다.
자신이 사랑하는 것에서 모두가 아파하지 않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