멘토의 정의는 다시내려져야 한다.
누군가에게 실질적으로 고민을 털어놓고 의견을 논하는 성격은 아니었기에
나를 가까이서 이끌어 줄 존재가 꼭 필요하진 않았다.
하지만 멘토라는 단어를 안 뒤로는 그 단어의 정확한 의미도 모른 채
멘토의 부재는 소중한 무엇을 갖지 못하고 사는 것만 같았다.
스타워즈의 영향이었을까?
멘토를 스승이라는 영역에만 한정을 지어두고 찾기 시작했다.
만나는 스승들을 요다의 자리에 올렸다가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차례차례 죽이기를 시작했다.
첫 번째 멘토 죽이기.
초등학교 6학년 때 담임 선생님은 진정한 열린 교육의 실천자로
정해진 수업 시간표대로 수업을 진행하지 않았다.
그때 당시 학교에 발야구가 유행이었는데, 체육 시간이 겹치는 다른 반과 종종 시합을 벌였다.
오전 수업 내내 발야구를 하면서 실력을 갈고닦으며 승승장구하는 우리 반을
다른 반 친구들이 무척 부러워했었다.
미술 수업도 다르게 진행했었다.
학교 뒤편으로 커다란 옹벽이 있었는데,
그곳에 선생님이 그린 밑그림 위에 페인트로 칠하면서 대부분의 미술 시간을 보냈었다.
등교를 한 뒤에 학교를 벗어나 부족한 페인트도 사러 갔었는데
모험을 떠나는 것 같아 무척 좋았다.
예체능을 좋아했던 나는 정말 즐기면서 학교를 다녔다.
매일 같이 칭찬을 받았던 그 시기가 인생 최고의 리즈 시절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그게 가능할까?라는 생각도 하지만,
자신의 사비를 털어가며 열정적으로 학생들을 사랑한 선생님의 희생 덕분이었다.
중학교의 교육은 자유롭던 초등학교와 달라서 불만이 많았었다.
처음으로 체벌도 겪었고, 성적에 따라 차별하는 걸 경험했다.
그럴 때마다 집으로 돌아와 초등학교 선생님의 이야기를 하며 그리워했다.
성공하면 'TV는 사랑을 싣고'에 나가서 선생님을 찾을 거라는 다짐도 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선생님이 불륜 때문에 학교를 관뒀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다.
그 대상이 피아노 학원을 운영 중이던 내 친구의 어머니였다는 건
뒤늦게 엄마를 통해 알게 되었다.
여전히 그 선생님이 좋았지만 더 이상 나는 선생님을 존경한다고 말할 수가 없었다.
엄마는 그저 내가 사춘기를 겪는다고 생각했지만
내가 가장 좋아했던 대상을 혐오하는 엄마와 대화를 할 수가 없었다.
그렇게 나는 첫 번째 멘토를 떠나보냈다.
두 번째 멘토 죽이기.
사춘기를 지나며 방황하던 시기에 가정과 환경 과목을 가르쳤던 선생님을 좋아했다.
그때 배운 오존층에 관련된 상식과 지구 환경에 관한 인식은 아직도 유용하다.
선생님을 좋아하니 수업도 정말 열심히 들었다.
당시에 배운 뜨개질에 심취해서 온 가족의 목도리를 만들었는데,
쓸데없는데 고급인력을 낭비하지 말고 책이나 보라는 아빠의 말에 충격을 받았다.
뜨개질과 가정을 돌보는 일 같은 여성적인 건 하찮은 거라는 인식을 갖게 되었다.
가사 노동은 오롯이 엄마 혼자의 몫이었고,
나는 공부만 하면 되었다.
내가 3학년 때 그 선생님은 이혼을 하시면서 학교를 관두셨다.
가정을 가르치는 선생님의 이혼이 여학생들에게 부정적인 영향을 준다는 게 이유였다.
중년 여성의 틀에서 벗어나 옷도 정말 잘 입고 예뻤던 그 선생님은 기가 센 여자가 되었다.
여성이 가정을 지키지 못하면 사회생활도 할 수 없다는 메시지를 체화를 하였다.
고정된 성역할에 대한 가장 많은 편견과 혐오를 학습했던 시기였다.
그렇게 나는 두 번째 멘토를 떠나보냈다.
세 번째 멘토 죽이기.
고등학생이 되어 마이클 잭슨과 서태지를 좋아하던 국어 선생님을 만났다.
구성애 씨 덕분에 형식적이지만 성교육이 시작되었고,
그와 동시에 학교에서는 순결 사탕도 나눠주었다.
한 남학생이 새로운 성교육에 부응해서 콘돔을 풍선처럼 불어서 창 문 밖으로 날려 보냈다.
아파트 단지 내에 있던 학교는 발칵 뒤집어졌지만,
국어 선생님이 나서서 그 학생을 적극적으로 옹호해 주었다.
새로운 멘토를 만나 국어 과목에 몰빵 하며 지냈다.
교과서에 실리지 않은 작품들을 권하는 선생님을 싫어했던 친구들도 많았다.
신도시에 새로 생긴 학교였고,
교육열이 높은 곳에서 수능과 상관없는 문학을 가르치는 행동은 용납이 되지 않았다.
부모님의 직업군이 사회에서 존경받는 직업인 친구들이 많았다.
1년을 채우지 못하고 이미 합법이 된 전교조 활동 행위가 문제가 되어서 선생님은 학교를 그만두셨다.
창 문 너머로 떠나가는 선생님의 뒷모습은 아직도 잊을 수가 없다.
그게 결코 인생의 실패는 아닌데 어쩐지 마음의 여유가 없어져 버린 것만 같았다.
자신의 소신대로 살다가 직업을 잃어버리는 사람들의 모습이 마음속에 각인되었다.
그렇게 나는 세 번째 멘토를 떠나보냈다.
멘토 죽이기.
대학생이 되면서 더 이상 멘토 찾기에 흥미를 느끼지 못했다.
인생의 멘토를 찾아라는 게 저명한 사람들의 조언이었지만
영화감독을 꿈꾸던 나에게
영화를 한 편도 찍지 않았는데 영화과 교수를 하고 있는 사람들은 멘토가 될 수 없었다.
사회로 나와 좋아했던 영화를 찍은 감독들과 일을 하게 되었다.
사회적 존경을 받는 사람들의 가까이에서
그들이 만든 영화의 메시지와 너무 다른 행동을 하는 걸 보면서 괴리감을 느꼈다.
내가 그들의 영화를 좋아했던 만큼 혐오감도 커졌다.
더 이상 가까운 이들을 멘토를 삼는 건 불가능하다는 걸 깨닫게 되었다.
거창한 무엇을 해낸 사람일 필요도 없는데
나는 멘토의 부재를 아쉬워했다.
멘토가 한 명일 이유도 없고, 평생을 한 명의 멘토만 바라봐야 할 이유도 없다.
영화 속 캐릭터 일 수도 있고, 책을 쓴 작가 여도 괜찮다.
아니면 다양한 사람들에게서 여러 가지 면을 영향받아도
결국은 행동으로 옮기는 건 나의 몫이기 때문에
멘토의 역할로 충분하다.
어쩌면 내가 멘토라는 걸 모든 면에서 완벽해야 한다는 강박에 사로잡혀
그들을 그 틀에 끼워 맞춰 바라보았기 때문에 찾을 수 없었는지도 모른다.
더 불우한 건 그런 요다 조차도 실패와 성공은 스스로 깨우쳐야 한다는 가르침을 주었는데
그 가르침보다는 요다라는 멘토 자체의 부재에 몰입해서
완벽한 요다를 찾아 방황했다.
모든 조건이 완벽한 사람이 존재할 거라 착각했던 나의 무지로 수많은 멘토를 떠나보냈다.
수학 문제의 해설집을 아무리 보아도
직접 푸는 연습을 하지 않으면
조그마한 조건값만 바뀌어도 풀 수 없다.
멘토의 존재는 결국은 수많은 해설집의 일부일 뿐 내 인생의 정답은 아니다.
선택하고 실천하는 과정에서 도움을 받을 수도 있지만
그걸 내가 해내야 한다는 사실은 달라지지 않는다.
멘토를 찾느라 인생을 낭비하지 말고,
나 스스로 나의 멘토가 되자.
멘토의 정의와 효용 가치는 다시 생각해봐야 할 것 같다.
어제의 내가 부끄러워하지 않을 선택을 하며 하루를 온전히 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