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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화인 Z Sep 26. 2021

내놓은 자식으로 사는 기분

극회피주의자의고백

변하기로 마음을 먹고도 매번 걸려 넘어지는 문제들 중에

부모님과의 관계도 크다는 걸 깨달았고 조치가 필요했다.

문제를 자각하고 해결해야겠다는 용기를 내고 티켓까지 끊었지만 여전히 쉽지 않았다.

추석을 앞두고 비장한 각오로 부모님과 나누게 될 온갖 대화의 시물레이션을 돌렸다.

무려 5일이나 부모님과 함께 보내기로 마음을 먹었기에 준비가 필요했다.


큰 틀에서의 나의 전략은 "내놓은 자식이 되자"였다.


영화를 시작하고 지난 나의 10년은 바쁘다는 핑계로 1년에 두 번 있는 명절에

2-3일 정도만 고향에서 보내는 걸 합리화해오면서 살았다.

몇 번은 감독들과 함께 콘티 작업을 하며 건너뛰었고,

몇 번은 그냥 쉬고 싶어서 촬영을 핑계로 가지 않았다.

그러는 사이 부모님과 부딪힐 일이 없으니 관계가 좋아졌다는 착각마저 하며 살았다.

영화를 하기 전의 나의 삶이 그럼 달랐나? 생각해보면 뭐 딱히 다르지도 않았다.

생각을 거슬러 올라가다 보니 경쟁이라는 걸 체화하며 남과 비교를 시작한 중학교 때부터

일관되게 회피 기술을 쌓아왔다.


적당히 공부 좀 잘하고,

적당히 운동 좀 잘하고,

적당히 놀기도 잘해서

인기에 부합해 반장이 되었다.


그때부터 내 삶이 팍팍해졌다.

적당히로는 도저히 만족시킬 수 없는 요구들이 내 삶을 채워갔다.


반장 중에 가장 공부를 못해서 창피하다는 담임선생님의 기대에 부흥해야 했고,

초등학교 때부터 같이 잘 놀던 친구들의 일탈에도 가담해야 했고,

햄버거를 자주 사주는 부반장과 비교를 하는 친구들의 요구도 들어줘야 했고,

매주 성실히 신앙생활을 하며 순종적인 삶을 살라는 부모님의 기대도 충족을 시켜야 했다.


그 나이의 아이가 혼자서 감당하기에 너무 버거운 문제 들이었지만

아무에게도 마음을 터 놓지 못하고 모든 걸 잘하려고 애쓰면서 예민한 아이가 되어갔다.

뭐 대충 애쓰긴 했지만 그걸 하나씩 해결했다기보다는 최대한 상황을 회피하면서 보냈다.

나를 평가하는 사람들과 상황에 하나씩 마음을 닫았다.

13살의 내가 할 수 있는 가장 쉬운 해결책이었다.


일관되게 닥치는 문제에 대해서 회피 기술을 써 왔다는 걸 자각을 했지만

이걸 어떻게 해결해야 하는지 잘 몰랐다.

이쯤 나이 먹었으면 부모님의 삶도 이해하고 용서하고 성숙해져야 할 것만 같았지만

이번 생은 처음이라 저절로 되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  

결국은 부딪혀서 해결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는 와중에 동생의 삶에 대해 생각해보게 되었다.


어렸을 때부터 사회성이 좋았던 나는 늘 칭찬받는 아이였고,

그에 부합하기 위해 하고 싶었던 게 많았다.

넉넉하지 않은 형편의 부모님은 니 능력이 되면 하고 아니면 하지 말라는 말로 일관되게 대응했었다.

매번 해낼 수 있다는 걸 증명하느라 많은 에너지를 쓰며 살았다.

동생은 그런 나와 늘 비교를 당하는 처지였지만

그럴수록 더 자신만의 길을 독자적으로 걸었다.

학교를 다녀오면 바로 잠들어 다음날 아침에 일어나는 삶을 살았다.

어쩌다 하고 싶은 게 생기면 전폭적인 지지를 받았다.

도중에 마음에 들지 않으면 얼마만큼의 돈이 들었는지 따지지도 않고 그만두었다.

부모님의 요구로 들어간 대학마저 학비가 아깝다며 한 학기 만에 학교를 그만두었다.

이듬해에 군대에 들어갔고 제대하고 나서는 가출(?)을 하였다.

그즈음 나도 교환학생으로 시작한 미국행에서 호주로 인도로 거처를 옮기며

부모도 형제도 없는 것처럼 연락도 제대로 하지 않고 살았다.

지금처럼 스마트 폰이 없었고, 국제 통화료는 비쌌기에 핑계도 좋았다.


기나긴 가출을 끝내고 빚과 함께 건강까지 잃고 동생이 집으로 돌아왔다.

그간의 삶을 묻진 않았다.

말 못 할 사정을 이해했다기보다는 솔직히 안 궁금했다.

그때 막 영화일을 시작한 내 삶도 처참했고, 그러한 현실을 터 놓고 싶지 않았다.

말로 꺼내면 현실을 외면할 수 없을 것 같았고, 

나라도 잘 사는 자식이어야했다.


동생은 나에게 자신은 귀촌해서 초등학교 때부터 친한 친구 3명이랑 사는 게 꿈이라고 말했다.

난 그걸 꿈이라고 말하는 동생의 말에 전혀 공감하지 못했고,

매번 미래보다 현재를 선택하는 동생이 신기했다.

그저 어서 빨리 성공해서 이 구질구질한 기분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그로부터 10년이 지났고,

나는 성공하지 못했고,

뒤늦게 자연 속의 삶을 꿈꾸며 동생을 이해하게 되었다.

그는 지금 부모님이 하시는 인테리어 가게를 함께 운영 중이다.

그때 말한 친한 친구들도 그에게 일을 배워 함께 하고 있다.

IMF로 인해 불황을 겪었던 부모님 사업은

코로나로 인해 호황을 맞았다.

한 직업에 대한 평가도 사람들의 기대와 가치에 따라 달라졌다.


주식을 시작하며 읽게 된 책들에서

한 사람의 가난이 개인의 탓이 아님을 깨닫게 되었고,

그들이 말하는 것처럼 남들의 시간을 레버리지 하면서 부자가 되고 싶진 않았다.


성공이라는 프레임을 걷어내게 되었고,

누군가의 기대에 부흥하는 것도 관두게 되었다.

이젠 부모님의 기대를 벗어버리면 되는데 이게 제일 어려웠다.  


이 분야의 권위자의 방법을 빌려 오기로 했다.

바로 내 동생이다.  


이젠 관계가 전복되어

결혼도 하고 집도 장만하고 2세를 준비하는 동생이 기대를 받는 자식이 되었다.

사업도 같이 잘 되면서 부모님의 욕심도 커졌다.

동생이 빨리 자리를 잡아서 자신들은 일에서 손을 떼고 싶어 했다.

적당히 사업을 봐주면서 수익을 얻길 원했지만

동생은 약간의 재산을 담보로 묶여있는 삶을 완강히 거부했다.

아직 이러한 동생의 마음을 부모님은 모른다.


그는 진정한 고수였다.


너무 가까이 있어서 몰랐다.

최고의 전문가를 옆에 두고

계속해서 잘못된 수를 뒀다.


이번 추석에 고수의 방법을 따라 부모님과 대화를 나누게 되었다.

40을 바라보는 백수에 모은 재산도 없고 미래도 불투명하고

학창 시절부터 느껴왔지만 말하지 못했던 나의 감정들을 마구 쏟아 내었다.

그동안 글로 써오면서 시물레이션을 했던 게 빛을 발했다.

기대에 부흥하는 삶을 더는 못살겠다고 말하는 게 되게 괴로울 줄 알았는데

말하다 보니 너무 홀가분해서 얼떨떨했다.


식물을 돌보게 된 나와 난생처음 텃밭을 가꾸며 "좋다"라고 말하는 아버지와

대화가 가능함을 알게 되었다.

다음번엔 식물을 키우면서 도움을 받았던 책을 사 오기로 했다.

애쓰면서 기대지 못하고 살아온 삶이 힘들었다는 나의 말에

너무 일만 하고 살아온 자신의 삶을 이젠 좀 놓아주겠다는 엄마의 고백을 들었다.


부모님이 내가 실패한 인생을 살았다고 생각하든 말든 알게 뭔가

기대가 없어진 자리에 연민과 함께 애틋함이 자라났다.

되게 패배자 같을 줄 알았는데 해방감이 느껴졌고,

그토록 깊었던 감정의 골이 점점 좁아지는 게 체감이 되었다.


서울로 가는 나를 배웅하면서

동생의 아내가 추석 용돈이라고 준 돈이 고스란히 내 주머니로 흘러들어왔다.


우오, 뭐지 이거 개꿀 인대?


이 전략의 유용함을 느끼며 앞으로 적극적으로 내 맘대로 살기로 다짐을 하면서

엄청난 정신적 자유를 느꼈다.

내놓은 자식의 삶은 생각보다 앞으로가 기대가 되며 나를 두근거리게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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