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글쓰기를 좋아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아무래도 그동안의 글들이 늘 누군가가 본다는 걸 전제로 해서였던 것 같다.
첫 영화에서 타의로 썼던 ‘연출부일기’는 다시 볼 때마다 새로웠고,
을의 삶의 부당함에 대해 몰랐다고 말해왔지만 글을 쓰고 있던 나는 알고 있었다.
그 속에서 어떻게든 힘들게 버티고 있는 내가 보여 마음이 아팠다.
그래도 그 기간의 내가 기록으로 남아서 돌아볼 수 있어 감사했다.
어제 ‘이연’이라는 그림 유튜버가 일기를 쓰라고 말했던 콘텐츠를 보면서 많은 공감을 했다.
지금껏 나는 ‘엘리트주의’나 '문화 계급론'에 빠져 삶을 다양하게 즐기지 못했고
내가 정한 이성적인 논리 위주를 벗어난 삶에 대해 받아들이지 못했다.
여성인 내가 '페미니즘'에 대해 알고 싶지도 않았고, 오히려 더 남성 위주의 사고를 해 왔던 것도
다른 관점에서 쓴 글을 읽을 기회를 스스로에게 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과정에서 생긴 프레임들이 나를 괴롭혀 왔던 게 안타까웠는데
돌이켜보면 내가 한쪽으로만 치우친 사람들의 글을
사색의 과정을 거치지 않고 흡수하기에 급급한 삶을 살았기 때문이었다.
속독까지는 아니었지만 책을 빠르게 보는 편이었고,
그런 능력을 가진 내가 좋았던 적도 있었다.
하지만 그러한 책들을 읽었다는 지적 허영만 채웠지
정작 그 책들이 말하는 메시지에 대해 고민해보지 못했다.
빠르게 다른 책으로 넘어가 표면적인 정보만 습득하기에 바빴다.
사회에서 말하는 성공한 삶을 살려면 시간이 너무 부족했다.
물론 그렇게 쌓인 것들이 있기 때문에 나를 성찰하는 시간을 가지는 지금
그 모든 게 자양분이 되어 반성을 할 수 있다는 것도 안다.
세상의 수많은 다양한 책들이 각자의 개성대로 인생의 진리에 대해 말을 한다.
그 모든 말들이 맞다.
다만 그걸 읽었다고 내가 그렇게 살 수 있는 건 아니었다.
지금에 와서 내가 왜 이렇게 살았나 자책하는 시간도 보냈지만,
나는 모르지 않았다.
내가 바뀔 의지가 없었을 뿐이었다.
결국 다른 길도 가보고, 넘어져도 보고, 상처도 받고 했던 것들이 모여서
지금의 내가 되었다.
그러한 경험들이 쌓여서 더는 그러지 말자는 다짐을 할 수 있게 만들어 주었다.
그 어떤 시행착오나 실패를 겪지 않고 깨달을 수 있다면 좋겠지만
세상에 그렇게 살 수 있는 사람은 없어 보인다.
그래서 인생은 고통으로 가득 차 있다고 말을 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허무의 늪에 빠져 허우적거리다가
포기해버리지 않고 다시 기어올라온 나를 인정해주고 싶다.
그 과정이 결코 아름답지 않았고, 쉽지 않았다.
다 나왔다고 말할 수도 없다.
다만 어떠한 과정을 거치면 그 길로 내려가는지 알게 되었고,
어떻게 견디면서 다시 올라와야 하는 지도 알게 되었다.
다음번에 그 늪에 내려간다면 지금보다는 조금 덜 시행착오를 겪으며 올라올 수 있을 것 같다.
그 과정이 지금보다는 덜 힘들 거라고는 말하지 못하겠다.
삶의 진리는 책이나 깨달은 누군가의 말속에 있는 게 아니라 각자의 마음 안에 있다.
수많은 사람들이 그 길을 다녀왔고, 다양한 형태로 진리를 말한다.
그 방법론도 다양하다.
명상이나 일기 쓰기 기도하기 산책하기 등
하나씩 시도해 보고 스스로 자신에게 맞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
이 모든 것의 공통점은 인간이 삶을 포기하지 않고 살아갈 힘을 얻기 위해선
결국은 내가 나 자신과 이야기를 하고 나를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자기 자신을 믿어야 한다는 말은 이러한 과정을 통해서 만나게 된 나를 믿어야 한다는 말이다.
나답게 살 수 있는 힘을 주는 나 자신 말이다.
나는 ‘자신을 믿어야 한다’는 이 말을 굉장히 오해했다.
내 영혼이 힘들든 말든 굳은 의지력으로 밀어붙이는 표면적인 나를 믿어야 하는 줄 알았다.
지금껏 그런 나를 믿으며 그럭저럭 살아왔기에 잘 살고 있는 줄 알았다.
하지만 보란 듯이 실패했고, 내 의지력은 내 믿음과 달리 보잘것없었다.
그런 나만 믿었기에 스스로에 대한 믿음마저 잃어버리면서
당황스럽게도 삶에 의지마저 쉽게 없어져버렸었다.
똑똑하다고 여겨지고, 표면적으로 성공한 것 같은 많은 사람들이
삶에 번번이 실패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고 생각한다.
어쨌거나 자신을 돌아보는 많은 방법들이 존재하지만
눈앞에 쌓이는 성과에 집착하는 나에게는 글 쓰기가 가장 잘 맞았다.
일단 내가 고민하며 보낸 시간들이 글이라는 형태로 남아있고,
그걸 언제든 다시 볼 수 있어 가장 효과적이었다.
아직 나는 명상이나 기도를 통해서 나를 발견하는 경지는 깨우치지 못했다.
언젠가 물리적으로 쌓인 걸 보지 않고도 나를 긍정할 수 있는 날이 온다면 기록하지 않아도 좋을 것 같다.
지금은 글을 써야만 하는 수준에 머물러 있지만 현재로썬 이 정도에 만족한다.
40을 앞두고 얻게 된 깨달음이 너무 늦었다는 생각도 들지만 어쩌겠는가..
과거는 돌이킬 수 없으니 이제 그만 자책하고 일어나자.
자신이 아끼고 사랑하는 사람이 잘 되기 바란다면
그들이 본인의 힘으로 길을 찾을 때까지
삶을 포기하거나 지치지 않도록
스스로 이겨 낼 수 있다고 믿어주는 것 말고는 다른 방법이 없다.
남들이 옳다고 말하는 방법들도 결국은 그 사람들에게나 딱 맞을 뿐이다.
그동안 내 글을 읽어주고 그 어떤 조언도 하지 않고 믿어준 주변 많은 이들에게 감사함을 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