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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화인 Z Aug 28. 2021

훈수를 두는 게 가장 쉽다.

최근에 지인의 시나리오를 리뷰를 하며 정말 재미있었다. 

예전고에 비해서 캐릭터도 훨씬 좋아졌고, 구조도 탄탄해졌다. 

캐릭터가 명확해지니 상황에 맞게 적절한 대사를 하는지 

구성에 꼭 필요한 장면인지에 대한 판단이 금방 내려졌다. 


그러다 문득 '뭐가 이렇게 쉽고 재미있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동안에 쌓인 경력에서 나오는 건가?라는 생각을 하다 

이게 더 이상 '내 생계가 걸린 문제가 아니라서'라는 생각에 이르렀다. 


지인이 정말 노력했고, 잘 되었으면 좋겠다는 마음이 우선이니 

부족함보다 장점만 눈에 들어왔다. 


리뷰를 쓸 때는 정성스럽게 작성했지만 
나의 리뷰가 시나리오의 방향에 영향을 끼칠 거라는 부담감도 없었고, 

내 발언에 대한 책임을 지지 않아도 되었다. 

굳이 나의 부족한 리뷰가 어떠한 결과를 가져온다면

지인이 나를 시나리오 리뷰어로서 더 이상 신뢰하지 않는다는 정도?

아무튼 직장을 잃을 거라는 부담 없이하는 리뷰 작업은 

너무 재미있었다. 


수많은 리뷰 중에서 선택은 결국 감독의 몫이다. 

나는 그를 친구로서 한 사람의 창작자로서 사랑했고, 

부정적인 평가로 자존감을 깎는 것보다  

긍정적인 평가로 스스로의 힘으로 이겨낼 수 있도록 지지하는 쪽을 선택했다. 


어쨌든 가볍게 훈수 두는 거라 쉽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걸 내가 좀 더 일찍 깨달았다면 

신랄한 리뷰를 하며 감독들의 자존감을 깎는 짓은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들은 누구보다 자존심이 센 사람들이었고, 

인정에 목말라 있는 사람들이었다. 

매 순간 평가의 자리에 있기에 더 예민하다. 


대분분의 감독은 수 없는 거절을 견디며 그 자리에 버티고 있는 사람들이다. 


영화가 진행되는 동안 감독이 교체되는 경우도 비일비재하니 

그들의 예민함이 과하다고 할 수도 없다. 


마지막으로 작업했던 영화가 넷플릭스에서 공개하기로 결정이 되었다. 

극장 시사를 계획하고 있어 참석 여부를 묻는 연락을 받았다. 

끝까지 극장 개봉을 하고 싶어 했던 감독의 마음이 보였고, 

연민마저 느껴졌다. 


그에게 받았던 상처가 이젠  더 이상 아프지 않았다.  


어느 날 그는 연출팀에게 에필로그 장면을 수정해오라고 했다. 

다들 바쁜 업무에 부담스러워 형식만 갖춰서 냈지만 

나는 최선을 다해서 고쳐갔다. 

감독이 쓴 시나리오를 포함해서 연출팀이 써온 수정 장면을 투표에 붙였다. 

팀원들은 내가 써온 장면에 더 많은 표를 던졌다. 

가장 많은 표를 받은 장면을 시나리오에 반영하기로 했지만 

그는 그 자리에서 말을 바꾸고 자신의 맘에 들지 않으니 수용하지 않겠다고 했다. 


그날 이후 그는 이상한 자존심을 부리며 

연출부가 하는 일에 일일이 트집을 잡았고 깎아내리기에 급급했다.

그땐 그의 행동이 이해가 되지 않았고 억울함만 쌓여갔다. 

우린 더 이상 그 어떤 제안도 하지 않고, 

그가 원하는 대로만 움직였다. 


내가 쓴 게 영화를 위해 더 좋은 장면인지 알 순 없다. 

그 선택을 해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지금에 와서 돌이켜보면 다른 팀원들처럼 대충 써가서 

감독으로서의 그의 자존심을 지켜주고

팀원들이 자신을 믿고 따른다는 믿음을 주는 게 

영화의 최종 결과물에 더 긍정적인 영향을 줘서 좋았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도 처음엔 다양한 의견을 수용하려고 노력했기 때문이다. 


그동안 일을 잘한다는 인정 욕구를 채우기 위해 

치열하게 고민하고 창의적으로 감독들을 불편하게 만들었다. 

영화가 잘되었으면 하는 마음도 분명히 있었지만 

내 욕구 충족이 우선이었음을 뒤늦게 깨닫는다. 


덕분에 일 자리는 끊이지 않았지만, 

감독들과의 사이는 점점 나빠졌었다.

내가 좋아했던 일을 하며 그 일마저 혐오하게 되었고, 

지난 세월의 좋았던 순간마저 부정해버렸다. 


지적질로 발전하는 사람은 극히 드물고, 나 또한 그래 왔지만 번번이 잊었다. 


이젠 더 이상 나와 남을 향한 지적질은 그만두고 

잘 되었으면 좋겠다는 마음으로 가볍게 훈수를 두며 

스스로의 힘으로 이겨낼 수 있다는 믿음을 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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