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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화인 Z Jan 11. 2021

자신에게 거짓말을 할 때 목소리를 가장 크게 높인다.

버티는 놈이 이긴다

버티는 놈이 이긴다는 말이 있다. 

일의 고단함 끝에 술잔을 기울이는 자리에서 

누구보다 더 크게 이 말을 되뇌었다.

구체적으로 어떤 이야기를 만들고 싶다던가 돈을 많이 벌고 싶다는 것도 아니었고,

죽을 때 감독으로 죽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내가 죽어도 작품이 남으니 밀란 쿤테라가 말한 '불멸'의 삶을 살 수 있을 거라는 생각도 했던 것 같다. 

그렇게 작품에 매진하다 생활고에 시달리면 그땐 자살하는 것도 예술가의 삶으로 치면

나쁜 선택은 아니라고 여겼다. 

주체성 없는 한 인간의 삶은 이렇게 자기 파괴적이다. 

억척스럽게 삶을 개척할 의지도 부딪혀 볼 용기도 없다. 

타인의 삶을 비웃으며 현실에 타협하다 나를 놓아버린다.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없다. 



그렇지만 그 누구도 구체적으로 어떤 상황을 버텨야 하는지 말해주진 않았다. 

"젊어서 고생은 사서도 한다"는 말들은 이미 자리 잡은 이들의 훈장과도 같아서

개인의 고통에서 더욱더 멀어지게 만든다. 

그들이 흙수저였거나, 더 많은 고생을 했다면 오히려 더 위대한 성공신화로 포장이 된다. 


끝도 없는 패배주의에 머물고자 하는 말은 아니다.

성공이라는 기준의 빈곤한 상상력을 논하고 싶다. 

계속해서 위로 올라가는 삶엔 휴식이란 없다. 

내가 모든 걸 놓쳐가며 올라간 그 계단 끝에는 또다시 올라가야 할 계단만 있을 뿐이다. 

계단 위에 머무는 삶은 한 인간이 선택의 자유를 잃고, 끝없이 성실하게 노비가 되는 과정이다.
그곳은 내가 놓치고 간 것들을 위해 다시 내려올 수 있는 선택지 또한 없다. 


내가 버텨 왔던 지난 시간을 돌아보며 

왜 이렇게 까지 버티면서 나를 괴롭혀왔는지 

글을 쓰면서 내내 울었다. 

누구나 다 이런 경험을 하는 건 아니겠지만, 

질문을 멈췄던 나의 삶은 이러한 방향으로 흘러왔다. 


영화는 꿈과 환상을 판다. 

하지만 그 꿈과 환상을 위해선 누군가는 그 속에서 노동을 해야 한다.  

그 노동의 현장은 꿈과는 거리가 멀지만 모두가 꿈속에 있기를 요구받는다. 

많은 사람들이 나와 마찬가지로 착각을 하고 환상을 품으며 영화 만들기를 꿈꾼다. 


"가족 같이 한 마음으로 일해보자"

"돈은 많이 못 주지만, 작품의 진정성만 믿고 가자"

"요즘 것들은 헝그리 정신이 부족해. 예술은 절박해야 나오거든~" 


수 없이 착취를 당했지만, 우린 예술 가니까 노동쟁의는 일하는 사람들이나 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내 개인이 특별히 불행해서 불합리한 상황을 연속적으로 겪어왔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업계 사람들끼리 모여서 술을 마시면 으레 나오는 이야기들이 겹치는 걸 보면 

이건 정말 구조의 문제가 심각하다는 반증이다. 


사람들을 사랑하는 것보다 더 진실된 예술은 없다고들 하지만 

우리는 서로를 착취했고, 버텨라고 몰아갔고 

독해야 감독이 된다고 말해왔다.


거기엔 사랑이 끼어들 틈이 없다. 


독립영화에서 반짝이던 배우들이 상업영화에 와서 

그저 그런 매력 없는 역할을 연기하며 잊혀 갈 때마다 마음이 아팠다. 

영화의 특성상 주인공보다 뛰어난 조연이 있을 수 없고, 

그 조연의 부각으로 주인공의 캐릭터를 해치면 편집 과정에서 여지없이 잘려나간다. 

이 모든 걸 알고 있으면서도 캐스팅을 할 때는 그들을 속인다. 

마치 그들의 분량이 많은 것처럼 지문에 이름을 더 넣거나, 

잘려도 상관없는 대사를 더 집어넣어 소위 캐스팅고(시나리오)라는 걸 만들어 그 배우에게 전달한다. 

내 덕에 캐스팅이 되었다며 좋아하는 배우들을 보며 

마음이 너무 무거웠다. 

이 시스템을 바꾸고 싶지만, 그럴 능력이 안되었다.

이런 게 설득의 기술이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나 또한 그렇게 믿은 적도 있었다. 


내가 가장 혐오하던 모습들은 어쩌면 내가 그렇게 살고 있기 때문에 

더 예민하고 민감하게 군 것일지도 모른다. 

나는 나를 속이기 위해서 가장 크게 목소리를 높여왔고, 

이젠 더 이상 스스로를 속일 여력이 없다. 


왜 그동안 시스템을 견디었을까?


수많은 사람처럼 나는 아닐 거라고 생각했고, 나는 다를 거라고 믿었다. 

다른 말로 하면 자기 객관화가 전혀 안되었고, 어쩌면 순진하고 멍청했다. 

시스템에 자발적으로 복종을 하면서 이 산업이 무너지지 않도록 온 몸으로 떠 받들었다. 

내가 무너지면 다른 이로 교체되는 곳에서 소모품처럼 쓰였을 뿐이었다. 

내가 예술가로 자리 잡거나, 감독이 되도록 물을 주고 햇빛을 비춰주는 곳은 절대 아니었다.  


요즘 글도 쓰고 1인 창작을 위한 준비를 하면서 너무 즐겁다.

뭘 만들지 상상을 하며 쏟아지는 아이디어를 메모하고 다듬어 갈 때마다 너무 재미있었다. 


내가 정말 바랬던 건 창작의 과정이었지 

영화감독으로서 얻게 되는 사회적인 지위나 로또 확률과도 같은 대박 작품의 경제성도 아니었나 보다. 


순수하게 만들어내는 과정의 즐거움을 다시금 찾고 싶고, 

다른 사람을 착취하거나 민폐 끼치지 않고 그 과정을 이뤄내고 싶다. 

앞으로의 과정을 기록으로 남길 예정이다. 

나의 기록이 누군가에겐 또 다른 삶에 대한 아이디어가 되거나, 

실패하더라도 데이터로 남으면 그것도 나름 좋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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