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는 하루의 촬영에 대략 50-100명이 넘는 스텝들을 필요로 한다.
한국 영화판은 연출부라는 이름의 중간관리자를 늘려왔다.
그들의 게으름으로 인해 생긴 일자리로 밥을 먹고 살아왔으니
고마운 일이었지만 양질의 일자리는 아니었다.
영화는 개인의 예술이라기보다는 산업의 측면으로 보는 게 맞지만
모든 결과의 영광이 한 사람의 몫 인처럼 여겨지면서
과정의 고통을 분담하는 이들의 노력은 평가절하되었다.
개인이 아무리 최선을 다해도 혼자서 모든 걸 할 순 없다.
부족한 시간을 덜어주는 이들에 대한 고마움을 잊은 채
연출부의 존재는 책임을 전가하는 완충작용으로 여겨지는 경우가 많았다.
2014년 이후로 영화계에도 표준계약이 도입되었다.
하지만 업무 외의 시간을 자유롭게 누릴 권리는 여전히 침해받았다.
부지런한 감독일수록 자신처럼 최선을 다해 일해주지 않는 스텝들에 대해서 불만이 많았다.
그들이 표준계약을 하는 노동자라는 사실을 인정하지 못했고,
자신 혼자서만 작품을 끌고 간다는 생각을 버리지 못했다.
열정을 들먹이며 게으름을 혐오했다.
사실 받은 돈 보다 훨씬 많은 시간을 일했지만
돈 받은 만큼 일 하지 않는다고 의심받았고,
서로가 서로를 감시했다.
효율이 미덕인 사회에서 게으름은 혐오의 대상이 되곤 한다.
아니 사실 나조차 그렇게 생각했고,
게으른데 그 자리를 버티고 있는 사람들이 못마땅했다.
모두가 경쟁자가 되어 그토록 원하던 효율은 높아졌지만
정작 효율의 논리로만 설명할 수 없는 게 인간이라는 존재의 신비였다.
몇몇은 극단적인 선택을 했으며
몇몇은 영화판을 떠났다.
그들의 빈자리는 효율에 맞게 새로운 사람들로 빠르게 메워졌다.
시간을 들여 발전시켜야 할 그 모든 것들이 점차 사라져갔다.
끝없이 굴러가는 관성만 남은 채 모든 사람들이 안전장치 없이
이리저리 굴러다니면서 서로 부딪히며 상처 받았다.
이토록 불행한 삶을 왜 자꾸 반복했던 걸까?
영화는 늘 뉴미디어와 싸워왔다.
더 큰 화면, 더 많은 자본, 멀티캐스팅
차별화를 위한 타 매체의 무시는 기본으로 깔고 가야 안심했다.
영화의 입장에서는 생존 본능에 따른 자기 방어였을지도 모른다.
그 경계선이 희미해지는 지금도 어떻게든 차별하고 타자화하면서 구분 지으려고 애쓰고 있다.
크로스 오버와 퓨전에 대해 혐오하는 마음은 언제부터 내 내면에 자리 잡게 된 것일까?
누군가 먼저 깃발을 꽂고 정해버리면 그 나머지는 모두 비하해 버리는 관성은 어디서 나온 걸까?
모든 경쟁이 나쁘다는 게 아니라 아무런 한계 없는 무한 경쟁이 싫다.
단 하나의 매체만 사람들이 소비하는 것도 아닌데
왜 서로의 파이를 잡아먹지 못해서 안달인 걸까?
영화를 본다고 드라마를 안 보는 것도 아니고, 책을 본다고 TV를 안 보는 것도 아니다.
유튜브를 본다고 영화관을 안 가는 것도 아닌데 말이다.
어쩌면 나의 비극은 나 스스로 영화만을 목표로 삼고
표현의 한계를 그어버린 순간부터 시작되었는지도 모른다.
내 속에 일어나는 다양한 관점의 상충으로 인해 머릿속이 복잡했다.
하나의 깔끔한 결론으로 매듭짓고, 더 이상 생각을 멈추고 싶은 욕망에 사로잡힌다.
성급한 결론만 내며 모두 까기 인형이 되어간다.
양비론의 함정에 빠져 어차피 사회가 다 그런 거지 라며 비관론에 손을 든다.
과정보다 결과를 중시하는 목표지향적인 사람일수록
훌륭한 결과물을 내어 놓고도 만족하기보다는 새로운 비판을 하며
또 다른 불만족한 상황으로 자신을 몰아가며 멈출 줄을 모르게 된다.
지금 부터라도 작은 것에 만족하는 법을 연습하지 못하면
그 어떠한 결과물이 주어져도 만족할 수가 없을 것이다.
판단을 멈추고 있는 그대로 보고 느끼는 것에 집중하자.
세상 모든 것에 우의를 가리기보다는
존재 자체로 할 일을 다 했다는 생각을 연습할 필요가 있다.
30년이 넘게 효율적으로 살아왔으니
이제는 최대한 비효율적인 선택을 해나가면서 세속의 때를 털어버리고 싶다.
이젠 좀 더 게을러질 필요가 있다.
개미와 베짱이의 우화는 다시 쓰여야 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