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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화인 Z Oct 10. 2021

千里之行,始于足下

뭐라도 시작하자!

같이 글을 쓰기로 했던 영화인 Y 는 브런치 작가 승인을 받지 않아서 일단 내 아이디로 글을 올렸음을 밝힌다. 




노자는 말했다: 천리 길도 한 걸음부터라고. 나는 그 한 걸음을 내딛는 데까지 오래도 걸렸다. 

이 글을 시작하는 것도 이틀이나 걸렸으니...


      대학생 때 매년 12월 31일이면 항상 미래의 나에게 쓰는 편지를 썼었다. 편지에는 내년에 내가 상상하는 나의 모습과 상황들이 적혀 있었고 1년 동안 편지에 쓰인 대로 살아서 연말에 다시 편지를 열었을 때 희망한 것들을 다 이룬 나 자신을 발견하기를 원했다. 그러나 아쉽게도 편지에 내용은 매년 비슷해지고 결국 몇 년 전부터는 그저 형식적이고 또 아무것도 하지 못한 나 자신을 그래도 위로하는 글로 대체가 되었다. 그러다 언제부터는 그 편지를 더 이상 쓰지 않게 되었다. 아마도 실례여야 하는 편지에 실망을 느낄 것 같은 불안감과 두려움 때문에 그 마저도 그만두었던 것 같다. 체크리스트에 모두 체크를 하고 싶었지만 리스트는 점점 길어지고 나는 천리는커녕 출발하기도 전에 잔뜩 쌓인 '짐'들로 힘들어했다. 타임머신을 타고 다시 과거로 돌아가 낭비를 했다고 생각했던 시간들을 바로잡고 싶었다. 

      스스로를 혐오하고 자책하는 시간들로부터 도망치고 싶어서 일에 집착하기 시작했다. 한 프로젝트가 끝날 때쯤이면 다음 프로젝트를 찾아 나섰고 찾지 못하고 기다리는 시간을 괴로워했다. 일에 치여 정신없이 사는 동안 그래도 체크리스트는 생각나지 않아서 좋았고 그렇게 정신없이 살다 오랜만에 실업급여를 받으며 합법적 백수 생활을 하게 되었다. 쉬고 싶은 생각도 있었지만 왠지 모르게 너무 지쳐 있었다. 그러던 중 오랜만에 영화인 Z를 만나게 되었다. 

      영화인 Z는 내가 생각하는 천리를 이미 간 사람이었다. 긍정적이고 행동력이 강한 그녀는 내가 보기에 성공하는 자연스러운 궤도에 있는 사람처럼 느껴졌었다. 그녀를 보면 한 걸음도 시작하지 않는 나도 마치 길 위에 이미 있는 것처럼 느낄 때도 있었다. 그러나 그런 그녀가 영화를 그만두겠다고 얘기를 했을 때 충격도 받았지만 반신반의를 했다. 잠깐 힘들어서 그랬겠지 다시 돌아올 거야라고 생각했다. 나도 그만두고 싶다는 얘기를 입에 달고 살았고 남의 영화를 백날 찍어주니 내 거를 만들고 싶다고 입버릇처럼 이야기를 했기 때문이다. 그동안 투자하고 버틴 시간이 아까워서도 그만두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이번에도 천리를 가는 사람은 그녀였다. 1년 반이라는 시간이 흘러 우리는 다시 만났고 그동안 그녀는 매일 글을 쓰고 새로운 것들로 삶을 다시 채워나가고 있었다. 그녀의 방황하는 글을 보며 나는 오랜만에 짐과도 같은 체크리스트를 꺼내 보았다. 그리고 다시 천리길을 시작하려는 그녀에게 조심스럽게 제안을 했다. 

      아직 제목은 정하지 않았지만 우리는 뭐라도 해보기로 했다. 생각만 하지 않고 진짜로 해보기로 했다. 이 글은 이제 그 시작이고 예전으로 돌아가지 못하게 하는 장치이다. 막상 시작하려고 하니 하고 싶은 것들이 엄청나게 많았고 나는 역시 '아이템 부자'였다. 아무것도 하지 못했으니 할 게 너무 많은 셈이다. 앞으로 나의 영화도 만들 거고 영화인 Z와 함께 새로운 프로젝트도 해볼 생각이다. 이 글은 그래서 우리의 제작기에 대한 기록이기도 하다. 그날 우리는 하고 싶은 것들을 이야기하며 6시간을 떠들었고 첫걸음을 함께 걸을 수 있다는 생각에 침대에 누워서도 두근두근 거려서 잠이 잘 오지 않았다. 거대한 상상은 잠시 내려두고 뭐라도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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