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 앞 문구 점 앞에 새로운 오락기가 몇 개 깔렸습니다. 그 중에서도 특히 어부바 로봇은 인기 만점이었습니다.
<아이들의 따뜻한 정서를 키우는 데 좋은 어부바 로봇> 이라는 광고 문구 아래에 아빠 로봇과 엄마 로봇이 나란히 서 있었습니다. 어부바 로봇은 허리를 비스듬히 구부리고 두 팔을 뒤로 돌려 맞잡아 의자를 만들어주는 형태의 로봇입니다. 구부린 무릎 옆의 디딤대를 밟고 올라가서 푹신푹신한 방석이 덧대진 손바닥 모양의 의자에 걸터앉아 등에 기대어 오른 쪽 귀에 오백 원짜리 동전을 두 개 넣으면 살살 흔들어주면서 어부바를 해주는 로봇입니다.
아빠 로봇은 안경을 쓰고 하얀 셔츠와 조끼를 입고 있습니다. 엄마 로봇은 속눈썹도 길고 분홍색 립스틱도 칠해져 있습니다. 방글 방글 웃는 얼굴로 정면을 똑바로 보고 있습니다.
“우리 엄마가 훨씬 더 예쁜데......”
로봇을 타려고 줄을 길게 선 친구들을 멀찍이 바라보면서 아진이는 혼자 중얼거렸습니다. 망설임 없이 올라타서 동전을 딸각딸각 넣는 수영이가 부러웠습니다. 수영이는 벌써 세 번째 어부바를 타고 신이 났습니다. 주머니에 손을 넣어 동전을 만져보지만 오백 원이 모자랐습니다.
‘그깟 오백 원......’
아진이는 눈물이 핑 돌았습니다.
전에는 오백 원이 모자라서 갖고 싶은 걸 갖지 못한 기억이 별로 없었습니다. 언제나 아진이가 갖고 싶은 건 금새 손에 들어왔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부터 이사를 다니기 시작했는데 처음엔 아진이 방이 없어지고, 그 다음은 거실이랑 방이 하나로 된 집으로 그리고 작년 겨울에는 할머니네 집에 들어가서 함께 살게 되었습니다. 엄마 아빠는 바빠서 자주 보지 못하는 날이 많아졌고, 할머니랑 있는 시간이 늘어갔습니다.
“아빠, 내일 새 필통을 사고 싶어요.”
라고 얘기하면 그 전에는 두말없이 용돈을 주던 아빠였는데,
“다음 주에 사줄게.”
하면서 미루는 일도 생겼습니다. 하지만 다음 주에도 아빠를 마주치기조차 힘들어졌습니다.
뭔가 예전과 달라졌다는 걸 느끼면서 아진이는 엄마 아빠에게 차마 용돈을 달라고 하기가 어려워졌습니다.
대신 필요한 게 생기면 할머니에게 말을 했습니다.
아진이가 한참을 서서 부럽게 바라보는 동안 수영이는 어느새 어부바 로봇을 다 타고는 집으로 가버렸습니다. 아진이도 집으로 돌아가려는 순간, 어부바 로봇 옆 쪽 땅바닥에서 무언가 반짝 빛나는 게 보였습니다. 꿀꺽. 침을 삼키며 가까이 다가가보니 오백 원짜리 동전이었습니다. 두근거리는 가슴으로 아진이는 주변을 살피며 동전을 집어 들었습니다.
‘이거면, 나도 이제 탈 수 있겠다!’
아진이는 주머니 속에 백 원짜리 동전 다섯 개를 꺼내들고 오백 원짜리로 바꾸기 위해 문구점 안으로 발걸음을 옮겼습니다.
오백 원짜리 두 개를 손에 쥔 아진이는 엄마 로봇과 아빠 로봇 중에서 어떤 걸 탈까 고민하다가 어깨도 더 넓고 힘도 더 세 보이는 아빠 로봇을 타기로 결심했습니다.
처음으로 어부바 로봇을 탄 아진이는 그 포근한 느낌에 한참동안 눈을 감고 있었습니다. 이렇게 아빠 등에 업혀 본 게 언제가 마지막인지 잘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아진이가 더 어렸을 때에 동물원에 갔던 날, 집으로 가기 위해 주차장까지 걸어가는 동안 업혔던 기억이 납니다. 요즘은 어쩌다 엄마 아빠를 보면 엄마는 언제나 피곤한 얼굴로 허리에 파스를 붙이는 모습이거나 아빠는 피곤하다면서 쉬겠다고 누워있는 모습 뿐 이었습니다.
그렇게 드물게 온 식구가 집에 있는 날에도 아진이는 무언가 썰렁한 기분을 느꼈습니다. 엄마 아빠가 쉬는 어느 날, 놀이동산에 가자고 떼를 쓰고 엉엉 운 적이 있었습니다. 그 때, 엄마는 떼를 쓰는 아진이를 꼭 안고서 조용히 말씀하셨습니다.
“아진아, 엄마 얘기 잘 들어. 요즘 우리 아진이랑 많이 못 놀아줘서 참 미안해. 지금은 아빠 회사가 많이 어려워져서 엄마도 나가서 일을 더 많이 해야만 한단다. 우리 아진이가 조금만 참고 열심히 공부하고 있으면 맛있는 것도 사주고 예쁜 옷도 많이 사줄게. 그 때가 되면, 놀이동산도 자주 놀러갈 수 있어. 할머니 말씀 잘 듣고 공부 열심히 하자. 우리 아진이 그럴 수 있지?”
싫어요! 지금 가고 싶어요! 다른 날은 싫어요! 아진이는 더 울고 소리를 지르고 싶었지만 아진이를 바라보는 엄마의 얼굴이 많이 지쳐보여 왠지 아무 대답도 할 수 없었습니다.
아진이는 아빠 로봇이 멈춘 후에도 내려오지 않고 한참을 업혀서 기대어 있었습니다.
그날 밤, 아진이는 늦은 시간이 되도록 엄마 아빠를 기다렸습니다. 10시가 넘어서야 엄마 아빠가 오셨습니다.
“엄마! 아빠!”
아진이가 달려가서 덥석 안기자 엄마 아빠는 깜짝 놀라는 얼굴로 물으셨습니다.
“아니, 아진아. 아직도 안 잤어?”
“응, 너무 졸린데 엄마 아빠 기다렸어. 나 업어줘. 응?”
“업어달라고? 얘가 갑자기 애 이렇게 어리광이야. 다 커서 업어달라고 하네.”
엄마는 난데없는 아진의 행동이 귀엽다는 듯이 쓰다듬으며 옷을 갈아입으러 방에 들어가셨습니다. 아진이는 아빠에게 매달렸습니다.
“아빠. 나 업어줘. 응?”
“아진아. 어서 자야지. 아빠 씻고 나와야해. 내일 또 출근하려면 시간이 없단다. 얼른 들어가 자렴.”
아빠는 씻으러 욕실로 들어가셨습니다. 혼자 우두커니 남겨진 아진이는 속상하기도 하고, 졸리기도 했습니다. 씻으러 들어간 아빠를 기다리다가 잠이 들고 말았습니다. 다음 날, 눈을 떠보니 아진이는 어느 새 방에 눕혀져 있었습니다. 엄마 아빠는 벌써 출근을 하셨고 할머니께서 아진이를 깨우러 들어오셨습니다.
“우리 아진이 일어났구나. 학교 가야지?”
“할머니. 나 업어줘.”
“아이고, 우리 강아지 아진이가 어부바 하고 싶어? 이리온나.”
할머니가 등을 내주자마자 아진이는 와락 업혔습니다. 하지만 할머니가 아진이를 업어주시기엔 요즘 건강이 좋지 못하셨습니다.
“아이고...... 끄응 ......”
할머니께서 일어나시지 못하시고 많이 힘들어 하시는 모습에 아진이는 할 수 없이 그냥 일어섰습니다.
“할머니, 많이 힘들어? 나 괜찮아.”
“아유...... 우리 아진이를 못 업어줘서 어쩌나..... 할미가 아침 차려놨다. 세수하고 먹자.”
할머니는 미안한 표정을 지으시며 아진이를 데리고 방에서 나오셨습니다.
학교에 간 아진이는 하루 종일 기분이 안 좋았습니다. 어제 밤늦게 까지 잠도 안자고 기다렸는데 엄마 아빠는 집에 와서도 늘 바쁘기만 하셨으니까요. 하루에 이백 원씩 받는 용돈을 모아서 로봇을 타려면 아직도 사 일을 더 기다려야했습니다. 그 때, 살살 배가 아프기 시작했습니다. 아진이는 기운이 없어져서 책상에 엎드리고 말았습니다. 그 때 선생님이 다가오셨습니다.
“아진아, 왜 엎드려있니?”
아진이를 살펴보시던 선생님의 눈이 커졌습니다.
“아진이 어디 아프니? 얼굴이 하얗구나.”
“배가 아파요. 선생님......”
선생님은 아진이를 데리고 양호실로 갔습니다. 양호실 문을 열고 들어선 아진이는 깜짝 놀랐어요. 양호실 침대 옆에 바로 어부바 로봇이 있는 게 아니겠어요? 든든한 아빠 로봇이 아진이를 바라보고 있었어요.
“아진아. 선생님이 잠깐 침대 정리 할 동안 여기 올라타 있으렴.”
양호 선생님께서 아진이를 올려주시고 로봇 귀에 동전을 넣는 대신, 귀 뚜껑을 열어 열쇠를 꽂아 작동을 시켜주었습니다. 아진이는 아빠 로봇의 등에 푹 기대었어요. 진짜 아빠 등만큼 폭신하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넓고 푸근한 느낌에 아픈 배가 사르르 녹는 것 같았어요. 아빠 심장 소리 대신에 윙윙 기계가 돌아가는 소리가 들렸지만 그것도 그리 나쁘지 않았습니다.
선생님의 말소리가 들렸어요.
“어머, 양호실에도 들여놓았네요?”
“네, 아이들 안정을 취하는데 좋다고 교장 선생님께서 놓아주셨어요. 호호호.”
안정을 취하는 게 뭔지는 잘 모르겠지만, 이런 편안한 느낌일 거라고 생각하며 어느새 아진이는 흔들거리는 로봇 등에서 잠이 들었어요.
다음 날, 느릿느릿 집으로 걸음을 옮겼습니다. 학교 앞 문구점 아저씨께서 어부바 로봇의 배 뚜껑을 열고 동전이 든 통을 꺼내고 계셨습니다. 혹시나 저 동전 중에 하나가 떨어지지는 않을까 기다려보았지만 아저씨는 아주 조심스럽게 로봇 뚜껑을 다시 닫고 안으로 들어가셨습니다.
며칠 동안 졸린 걸 참고 엄마 아빠를 기다리는 일도 힘이 들지만 막상 기다려도 어부바를 해달라는 아진이의 말에 엄마 아빠는 어리광을 부린다고만 생각하시는 것 같아 속상했어요. 아진이는 오늘도 엄마 아빠를 기다리다 거실 소파에서 잠이 들었습니다. 아침에 되어 눈을 뜨자 아진이는 머리가 무겁고 귀가 뜨거운 기분이 들었습니다.
‘아픈 거 같아. 감기에 걸린 것 같아.’
아진이는 기분이 좋았습니다. 아프면 양호실에 갈 수 있고, 양호실에 가면 어부바 로봇을 탈 수 있으니까요. 몸은 아팠지만, 아진이는 기쁜 마음으로 학교에 달려갔습니다. 첫 교시가 끝나자마자 양호실에 가서 어부바 로봇을 타고 왔습니다.
그 다음 날은 어디가 또 아프지 않을까 기다렸지만 딱히 아픈 곳이 없었습니다. 그렇게 며칠이 지나자 아진이는 아프기를 기다리는 일도 매우 힘들다는 걸 알았습니다.
‘더 이상은 기다릴 수 없어!’
아진이는 아침 시간에 받은 우유를 햇볕이 잘 드는 창가에 두었었습니다. 햇빛이 쨍쨍 내리쬐는 동안 아진이의 가슴이 콩닥콩닥 뛰었습니다. 점심시간을 앞두고 아진이는 우유를 다 마시고 아진이는 배가 아프기를 기다렸어요. 그런데 집에 갈 때까지 아무렇지도 않았어요. 실망한 아진이는 처음으로 배가 아프다고 거짓말을 하고 양호실에 갔습니다. 양호 선생님은 별 의심 없이 아진이를 어부바 로봇에 앉혀주셨습니다.
그 다음날은 계단을 오르다 넘어진 상처를 보고 기뻐하며 또 양호실에 갔습니다. 양호 선생님이 소독약과 밴드를 준비하시는 동안 아진이는 또 어부바 로봇 위에서 기다릴 수 있었습니다. 어부바 로봇이 살랑살랑 흔들어 주는 느낌이 너무 좋아서 자꾸만 핑계를 만들었습니다. 그렇게 며칠 동안 아진이는 계속 양호실에 갔습니다.
오늘도 아진이는 어김없이 양호실에 갔습니다. 양호실 문을 열자, 그 곳에는 양호 선생님과 함께 엄마, 아빠가 있었습니다.
“엄마? 아빠도?”
“아진이 오늘도 많이 아프니?”
담임 선생님께서 뒤에서 따라 들어오시며 물으셨습니다.
“선생님, 저...... 그게요......”
아진이는 얼굴이 뜨거워지는 걸 느꼈습니다. 정말로 속이 울렁거리는 것 같았습니다.
그때 엄마가 아진이 손을 꼭 잡으시며 말씀하셨습니다.
“아진이가 며칠 동안 계속 몸이 안 좋은 거 같다고, 선생님께서 많이 걱정이 돼서 전화를 주셨네. 오늘은 엄마 아빠랑 집에 가서 푹 쉬자.”
“응?”
혼이 날 줄 알았던 아진이는 너무 놀라서 엄마 얼굴을 빤히 바라보았습니다. 엄마는 다정하게 웃으면서 아진이를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담임 선생님께서도 미소를 지어주셨습니다. 아진이는 꾀병을 부린 스스로가 점점 더 부끄러워졌습니다.
그 때였습니다. 아빠가 일어나서 아진이 앞으로 오시더니 뒤로 돌아 앉으며 등을 내보이셨습니다.
“우리 아진이, 어부바!”
“......”
“오늘은 부모님이 오셨으니까 아빠 등에 어부바하고 집에 가렴. 그럼 더 빨리 나아 질 거야.”
망설이는 아진이의 어깨에 선생님의 손이 내려왔습니다.
“그래, 아진아. 오늘은 집에 가서 엄마 아빠랑 푹 쉬자꾸나.”
엄마도 다시 말씀하셨습니다. 아진이는 더 이상 망설이지 않고 와락 아빠의 등에 업혔습니다. 선생님과 아진이의 부모님이 눈짓을 주고받으며 나오는 것도 모르고 아진이는 아빠의 등에 얼굴을 대고 있었습니다.
집으로 가는 길에 착 달라붙은 아빠의 등은 정말 포근했습니다. 빨래 냄새사이에 묻어나는 아빠의 땀 냄새가 싫지 않았습니다. 따뜻한 아빠 냄새니까요.
딱딱한 로봇 등대신 보푸라기가 피어난 아빠의 스웨터가 따뜻하게 느껴졌습니다. 윙윙대는 금속 소리 보다 더 묵직한 쿵쿵 심장소리가 들렸습니다. 아진이를 업은 아빠 옆에서 같이 걸어가는 엄마가 아진이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셨습니다. 엄마의 손끝에서 향긋한 비누 냄새가 스칩니다.
“아진아, 아빠가 업어주니까 좋아?”
아빠가 물으셨습니다.
“응! 많이많이 좋아!”
“우리 이번 주 일요일에는 다 같이 놀이동산에 갈까?”
“정말? 신난다!”
아진이는 아빠의 등에 얼굴을 부비적 거렸습니다. 이상하게도 자꾸 눈물이 나는데 또 자꾸 웃음이 나왔습니다. 아마 내일부터는 아프지 않을 거 같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