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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란 Aug 24. 2022

열 두 번째 여행

수상한 여행기

수정이는 한숨을 내쉬었다. 또 가족 여행을 간단다. 여행을 좋아하는 엄마 아빠 덕분에 한 달에 서너 번은 주말마다 캠핑이며 여행을 다닌다. 벌써 올해만 열 두 번 째 여행이다. 수정이는 여행이 너무 싫었다. 이제 열 두 살 이나 되었는데, 혼자만의 시간은 가질 수가 없었다. 열 두 살에 열 두 번 째 여행이라니, 뭔가 더 싫은 느낌이 몰려왔다. 이걸로 이제 그만 좀 다녔으면 좋겠다. 

더군다나 여행은, 퍽 귀찮다. 끝도 없이 짐을 쌌다가 풀었다 하는 것도 귀찮고, 가기 며칠 전부터 어디를 갈지 계획을 짜는 것도 듣기 싫었다. 막상 가서는 빠뜨리고 온 물건이 있게 마련이었고, 늘 계획대로만 수월하게 되는 것도 아니었다. 소중하게 아끼던 엠피쓰리를 잃어버리기도 했고, 난데없이 비가 와서 텐트를 접고 홀딱 젖은 채로 물을 뚝뚝 흘려가며 차에 앉아 몸에 들러붙은 축축한 옷을 떼어가며 비가 그치길 기다리는 일도 비일비재했다. 산행이든, 도보든 두어 시간 걷는 일도 다반사였고 그렇게 보낸 주말 뒤에는 피곤이 몰려왔다. 

그 중에 가장 귀찮은 일은 사진에 집착하는 엄마였다. 매번 엄마, 아빠 그리고 수정이 나온 같은 사진일 뿐인데 엄마는 늘 수정에게 수 십 장에 달하는 사진을 들이밀면서 이 사진은 어떻고 저 사진은 어떤지 얘기를 나누고 싶어했고 심지어는 앨범에 끼워 넣은 사진 옆에 문구를 수정이 쓰기를 원하기도 했다. 

수정은 그런 모든 귀찮음과 불편함을 뒤로하고, 집에서 편안한 휴식의 시간이 갖고 싶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또 어딘가 섬 안에 있다는 허브나라로 여행을 간다며 엄마 아빠는 들떠있었다. 수정이는 지난 번 여행 이후에 아예 풀지도 않은 가방을 그대로 문 앞에 던져두었다.     



허브나라 안의 펜션은 어느덧 한참 저녁이 되어있었다. 숙소는 어두웠다. 불을 켜는 순간, 싱크대와 넓은 온돌이 한눈에 보이는 구조가 눈에 들어왔다.

“뭐야? 다 같이 한 방에서 자는 거야? 이번엔 캠핑하고 다르다면서?”

수정은 짜증이 섞인 목소리로 소리를 질렀다. 그런 수정의 말에는 아랑 곳 없이 아빠는 짐을 풀며 말하셨다.

“배고프지? 라면 먹을까?”

“안 먹어!”

수정은 가방도 풀지 않고 숙소를 박차고 나갔다.

“어디 가니?”

아빠의 말에 부랴부랴 냄비를 꺼내들면서 엄마가 물었다.

“산책!”

쌀쌀맞게 쏘아붙이고는 수정은 숙소 건물을 둘러싼 정원으로 걸음을 옮겼다. 

씩씩거리며 정원으로 들어서다보니 진한 허브향이 풍겨왔다. 로즈마리가 사방에 끝도 없이 펼쳐져 있었다. 투덜대면서도 그윽한 향이 코끝에 느껴지자 조금은 마음이 진정되는 것 같았다. 찬찬히 어둠에 눈이 익으며 둘러보는 정원은 분위기가 오묘했다. 짙은 고동색 피부의 토인 병사 동상들이 여기저기 정원 안에 지키고 서있었다. 병사들이 들고 있는 창이 달빛에 빛나는 걸 보며 걷자니 싸늘한 느낌에 수정은 몸을 부르르 떨었다. 수정은 다시 발길을 돌렸다. 그런데, 생각보다 많이 걸은 모양이었다. 수정이 돌아 본 곳은 끝도 없는 나무와 로즈마리, 히야신스 등의 꽃들만 여기저기 펼쳐져 있고 숙소는 건물조차 보이지 않았다. 마음이 급해진 수정이가 온 길을 돌아가려는 그 순간, 우지직... 우지끈... 커다란 소리가 허공에서 들려왔다. 


깜짝 놀라 올려다보니 이럴 수가!

축 늘어져 있던 나뭇가지가 하늘을 향해 힘차게 솟구치고 있었다.

“아흠~~~~~~!!”

기지개를 켜는 소리와 함께 허리를 곧게 편 나무들은 가지를 흔들어 마른 잎을 떨구어 냈다. 

‘내가 지금 꿈을  꾸는 건가?’

놀라서 입을 쩍 벌리고 있는 수정의 귓가에 나지막한 목소리가 들렸다. 

“그만 놀라고 발이나 좀 치워주지?”

고개를 돌려보니 토인병사가 말을 하고 있었다.

“너...... 넌...... 동상인데? 이게 무슨......?!”

“발이나 좀 치워달라고! 니가 내 발을 지금 밟고 있잖아.”

“밟고 있어. 밟고 있어. 밟고 있어.”

저음의 목소리가 사방팔방에서 메아리처럼 반복하여 울렸다. 한 명의 토인 병사가 말할 때마다 정원안의 모든 토인 병사가 함께 말하는 것 같았다. 거의 기절할 듯이 얼어붙은 수정에게 나무가 말을 걸었다.

“많이 놀란 것 같네...”

수정은 덜덜 떨며 물었다.

“저기...... 지금 혹시 나한테 말을 건낸 게...... 나무야?”

“사람들이 나를 나무라고 부르긴 하지.”

“그...... 그럼......숙소로 돌아가는 길을 아니?”

“그거야 네가 알지.”

나무가 대답하기 전에 토인병사가 대꾸하자 역시 또 울림이 들렸다.

“네가 알아. 네가 알아. 네가 알아.”

“으악!” 

애써 눈을 감으며  정신을 가다듬으려 노력하던 수정이 결국 비명을 질렀다.

“진정해! 꿈이길 바라겠지만 안타깝게도 꿈은 아니야. 숨부터 좀 다시 쉬어봐.”

굵은 나무가 긴 가지를 하나 쭉 뻗어 가리켰다.

“기억의 방으로 가면 생각이 날지도 모르지. 동산 가운데 저 하얀 건물로 가봐.”


어떻게 된 건지는 모르겠지만 일단은 여기를 빠져나가고 보자는 마음에 수정은 다시 숨을 고르고 발걸음을 옮겼다. 어이없는 상황이긴 했지만, 숲 속은 너무 아름다웠다. 은은한 달빛과 수많은 잔 꽃들이 가득했고 꽃 향기가 목 깊숙이까지 파고 들어왔다. 열심히 걷는 수정의 눈앞에 나비무더기가 펼쳐졌다. 자세히 보니 나비의 날개를 꼭 닮은 꽃잎이었다. 매우 거만한 금색 꽃은 꽃잎을 퍼덕이며 말했다.

“기억의 방이 아무나 들어갈 수 있는 덴 줄 아니? 너 같은 보잘 것 없는 꼬마가? 하! 요즘 애들은 뻔뻔하기 짝이 없다니까.“

“자꾸 심술부리면 금색이 흙빛으로 변하게 될 거야.”

한가운데에 있는 나무가 금색 꽃나무를 나무랐다. 금색 꽃이 꽃술을 삐죽거리며 조용히 침묵했다.

“너희들은 모두 누구니?” 

수정이 물었지만 나무와 꽃은 대답이 없었다. 동산 위의 하얀 건물을은 보기에는 가까워 보였는데 가도 가도 거리가 좁혀지지 않았다. 가는 도중 이번엔 동상으로 가득한 동산이 펼쳐졌다. 


화분이 가득 든 수레를 끄는 코끼리 동상이 머리에 화분을 얹고 굽힌 허리를 펴지 못하고 울며 걸어가는 사내아이 동상 뒤를 따르고 있었다. 우물에서 물을 퍼내는 아이 동상과 커다란 바위를 크기별로 나르는 수많은 사람의 동상도 가득했다. 아름다운 숲 속의 풍경과 달리 동상들의 표정은 매우 침울 한 듯 했고, 자세가 너무나 힘겨워보였다. 갖가지 동상들 사이로 어린 왕자의 동상이 나타났다.

“나는 여기 갇혔어. 내 별로 돌아가고 싶구나.”

이제는 놀라지도 않는 수정이 다가가서 물었다.

“어째서 갇혔다는 거니?”

“여기는 해가 뜨지 않거든. 해가 떠올라야 귀가하는 별을 잡아타고 같이 올라갈 수 있는데...... 이곳의 동상들은 모두 너와 같은 아이들이었어. 가족이 버리거나 그들이 가족을 버리거나. '버림'과 '외면'으로 뭉친 마음이 가득한 아이들이 이곳에 들어오면 그 숨결에 묻은 한숨이 이곳의 끈끈이주걱의 양분이 되거든. 점점 더 그 뿌리가 두꺼워지면 아이들의 기억을 잡아먹고 기억이 다 소멸한 아이들은 이곳에 남아 동상이 되 버리는 거야.”

순간, 뒤통수가 서늘해지는 느낌에 뒤를 돌아보니 끈끈이주걱의 줄기가 뻗어오고 있었다. 수정은 어린 왕자에게 인사를 할 새도 없이 마구 뛰었다. 얼마나 뛰었을까. 

어느 새 수정은 하얀 건물 앞에 이르렀다. 

‘입구가 어디있지?’ 

수정이 다급하게 문을 찾는 그 때였다. 따라붙은 끈끈이주걱이 달려들었다. 

“으악! 저리가! 날 놓아줘!”

끈끈이주걱은 수정을 줄기로 휘감아 높이 들어올렸다.

“나와 거래를 하자. 네가 그렇게 싫어하는 집, 돌아가지 말고 여기 남아서 나의 화원을 가꾸렴! 그럼 내가 너를 살려주지.”

줄기가 점점 조여들었다. 

‘그럴 수 없어. 도망치고 싶었던 건 내 진심이 아니라구.’

수정은 어깨를 조이는 통증을 참고 고함을 질렀다.

“놓아줘! 난 집을 싫어한 게 아니야!  가족이 싫은 게 아니라구! 난 엄마 아빠를 사랑한다구!”

순간, 줄기가 출렁, 힘을 잃었다. 

“으악!” 

힘이 빠진 줄기가 쓰러지면서 수정도 땅에 떨어지려는 찰나, 수정의 귓가에서 누군가가 속삭였다. 

“겁먹지 말고 줄기를 꽉 잡아!”

본능적으로 목소리를 따라 줄기를 꽉 잡고 눈을 질끈 감았다. 끈끈이주걱의 줄기가 쓰러지면서 하얀 건물을 뚫고 들어갔다. 


철퍼덕! 땅에 내팽개쳐진 수정이 잠시 후에 눈을 떴다.

“정신이 드니? 어서 일어나 봐! 기억의 방에 들어왔다구.”

수정이 소리가 나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바닥에는 힘을 읽은 끈끈이주걱이 축 늘어져 있었다. 그리고 수정의 어깨에 금색 꽃잎 한 장이 따라 붙어 있었다. 

“너였구나!”

“흥! 고마울 것 없어. 난 내 아름다운 금색을 유지하고 싶을 뿐이니까!”

꽃잎이 툴툴대며 쌀쌀맞게 말했다. 수정은 저도 모르게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뭘 지체하고 있는 거야? 어서 네 기억의 책을 찾아야지!”

“아, 기억의 책?”

그제야 수정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건물의 내부는 동그란 벽을 따라 끝도 보이지 않는 높이까지 빽빽하게 책이 꽂혀 있었다. 천장은 아예 보이지도 않고 까만 어둠만이 가득했다. 

“기억의 방에 들어온 자가 누구냐!”

허공에서 소리가 들렸다. 수정은 놀라서 두리번거렸다.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이내 침착하게 대답했다.

“나는, 내가 온 곳으로 돌아가고 싶어요. 길을 알려주세요!”


툭! 허공에서 낡은 책이 한 권 떨어졌다. 다급히 책을 열어보니 하얀 백지가 가득했다.

“너의 기억을 채워 넣거라. 네가 돌아가고 싶어 하는 그 곳에 다시 가기 위한 가장 중요한 이유가 어떤 것인지를 채우면, 그리고 그 기억이 진실이라면 네 앞에 길이 나타날게다.”

어느 새 수정의 손에는 까만 연필 한 자루가 들려있었다. 하지만 도대체 어떤 기억을 그려야 할지 그저 난감하기만 한 수정은 급기야 눈물을 뚝뚝 흘리기 시작했다. 고개를 숙이고 엉엉 울던 수정의 눈에 지난 번 여행지에서 슬리퍼를 가져가지 않아 그대로 신고 갯벌에 들어갔다가 더렵혀진 운동화가 들어왔다. 운동화의 얼룩이 눈에 들어오는 순간, 수정의 손은 저도 모르게 책의 백지에 살며시 연필 끝을 올리고 있었다. 


연필을 종이에 대자마자 수정의 기억을 복사하듯 연필은 수정의 손을 이끌어 수정의 가족이 함께 한 추억을 그리기 시작했다. 엄마 아빠의 웃는 얼굴을 그리면서 수정은 계속 눈물을 흘렸다. 늘 같은 사진을 찍는다고 툴툴댔었는데, 같은 사진이 아니었다는 걸 깨닫고 있었다. 사진 한 장, 한 장이 가진 추억은 어느 한 장도 같은 것이 없었다.  두서없이 그려내는 수정의 이마에 구슬땀이 맺혔다. 하지만 멈출 수가 없었다. 어서 빨리 기억을 채워 넣고 엄마 아빠의 곁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정신없이 기억을 채워넣다가 마지막 장에 다다르니 뭔가 문구가 씌여있었다. 

<문을 열고 나가시오.>


타악! 책이 덮히더니 처음에 내려왔던 허공위로 거슬러 올라갔다. 수정은 문을 찾아 두리번 거렸다. 사방은 온통 책장아니면 벽일 뿐, 문은 커녕 창문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당황하는 수정의 귀에 꽃잎이 또 참견을 했다.

“입구를 그리면 되잖아! 내가 이럴 줄 알았다구. 안 따라와봤으면 어쩔 뻔 했니?”

새침하게 중얼거리는 꽃잎에게 수정이 다시 물었다.

“그런데, 어디에다 어떻게 그려야해?”

“아이참, 그냥 네 맘대로 그리라니까!”

“내 맘대로?” 

수정은 더욱 난감해졌다. ‘마음대로’ 뭔가를 하는 일이 이렇게 어려울 줄이야! 아무 생각도 떠오르지 않았지만 수정은 에라 모르겠다는 심정으로 연필을 들어 눈 앞에 책장 옆의 작은 틈새 벽에다 스윽 선을 긋기 시작했다. 


신기한 일이었다. 연필을 갖다대자마자 마치 수정의 손은 미리 생각해둔 그림을 그리듯이 거침없이 근사한 아치형의 문을 그려냈다. 그 문은 점점 커지더니 한쪽 벽면을 다 차지 할 정도로 커지더니 스르륵 열렸다.

“빙고!” 

꽃잎이 다시 속삭였다. 건물 밖으로 나오자마자 등 뒤에서 문이 쾅 닫혔다.  수정이 정신을 차리고 보니 저 멀리 숙소가 보였다. 

“아, 찾았다!”

“서둘러. 해가 뜨고 있어! 해가 뜨기 전에 가야해!"

꽃잎이 다급하게 외쳤다. 

“뭐라고?”

“얼른 달려! 해가 뜨기 전에 도착해야 한다구! 해가 뜨면 이곳의 마법이 풀려서 처음으로 돌아가기 때문에 처음에 이곳에 존재하지 않았던 너는 여기 살아있는 채로 동상이 되어 버릴거야!”


꽃잎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수정은 있는 힘을 다해 달렸다. 처음에 지나 왔던 그 길이 어느새 반듯하게 나있었다. 엄마다! 카메라를 들고 나와 여기저기 셔터를 누르는 엄마의 모습이 보였다.

“엄마!”

수정은 왈칵 눈물을 흘리며 엄마 품에 얼굴을 묻었다.

“에구머니나! 깜짝이야. 애두, 삐져서 산책 간다더니 그새 마음이 풀렸어? 무슨 일있었어? 우리 딸 얼굴이 퉁퉁 부었네! 얼른 들어가자. 라면 다 불겠다!”

‘뭐....라구? 라면?’

“지금 몇 시야 엄마?”

“몇 시긴! 나간 지 이십분도 안됐는데?”     



다음 날, 아침이 되었다. 수정은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정원을 돌아보았다. 한층 따사로운 햇살 아래 짙은 향기가 가득한 허브정원이 펼쳐져 있었다. 꽃이 가득한 화분을 들고 웃으며 서 있는 동상들과 다정한 얼굴의 토인병사들. 

‘다행이야. 정말.’

“자, 여기 출발하기 전에 저기 허브동산 한 가운데 들어가서 사진이나 찍고 갈까?”

아빠의 목소리가 들렸다. 

“또?......”

불평하는 목소리로 투덜대는 수정이었지만 얼굴엔 미소가 있었다.

“그래요! 찍어요, 잔뜩 찍고 가자구요!”

수정이 앞장서서 동산으로 걸어 올라갔다. 멀리 하얀 담벼락이 보였다.

“저런 담은 못봤는데......?”

중얼거리며 다가간 수정의 눈에 희미한 문 모양의 낙서자국 같은 것이 보였다.

“저건......?”

엄마의 목소리가 들렸다.

“수정아, 뭐하니? 어서 포즈 잡자!”

“네! 지금 가요!”

뒤돌아 뛰어가는 수정이의 얼굴에 비밀스런 미소가 가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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