곰보 할머니

나의 마녀 할머니

by 아란

세계 전래동화를 참 좋아했다. 갖가지 다른 버전을 모두 섭렵하며 읽고 또 읽었다. 마흔이 훌쩍 넘어가는 지금도 좋아한다. 도서관이나 서점에서 세계 전래동화를 마주치면 그냥 지나치지 못한다. 그 이야기들에는 공통점이 있다. 항상 마녀 혹은 요정이 나타나 선한 이에게는 복을 주고 악한 이에게는 벌을 준다.


까마귀로 변한 공주님, 당나귀 가죽을 뒤집어쓰고 살던 아가씨, 유자를 쪼개면 나오는 요정들. 외모도 아름답고 마음씨도 고운 그녀들은 꼭 시기 질투의 대상이 되어 곤란한 상황에 처하게 된다. 그리고 마녀 할머니는 그런 그녀들 앞에 아주 추한 모습으로 등장해서 선한 마음을 시험하곤 한다. 그리고 선한 마음을 가진 그녀들에게 복을 내려준다. 그 '복'이라는 게 꼭 부자 왕자님을 만나는 데서 그친다는 게 좀 아쉽지만.


어린 시절, 나는 ‘선하고 예쁜’의 조건은 생각지 않고 나에게 도대체 마녀 할머니가 언제 나타날지 고민하곤 했다.

‘내가 가진 친절을 나누어 드릴게요, 우리 집이 부자가 되게 해주세요!’

‘멋진 왕자님이 나타나서 내 인생을 빛나게 해주세요!’

왕자님을 기다리는 것보다 스스로 빛나는 인생을 만드는 게 더 빠르고 멋지다는 걸 그때는 알지 못했다. 그래서 그런지, 어느 날 내 앞에 나타난 마녀 할머니를 나는 알아보지 못했다.


그룹 과외수업을 가는 날이었다. 가난한 처지에 무슨 과외냐고 물으면 할 말이 있다. 중학교 2학년 시절, 친하게 지내는 친구가 그룹 과외를 다녔는데 그 그룹을 맡아 수업해 주시는 선생님께서 형편이 어려우면 무료로 들어오라고 해주셨다. 우리 집은 부개동이었고, 과외수업을 하는 곳은 갈산동이었는데 당시 40분쯤 걷는 건 일도 아니었기에 나는 부지런히 걸어 다녔다.


그날은 조금 늦었다. 부지런히 걸어가는 도중, 주택가 골목길 한 복판에 할머니 한 분이 서 계셨다. 무심하고 빠르게 지나가는 내 옷깃을 잡는 손길에 뒤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할머니를 바라보는 순간 비명이 터질 뻔한 걸 꾹 삼켰다. 할머니의 얼굴은 곰보딱지 같은 것을 방금 뜯어낸 것처럼 여기저기 동그란 피딱지 자국이 가득했다. 나는 할머니의 얼굴을 보면서 발을 굴렀다. 무섭다기보다는 얼굴이 이 지경인데 왜 아무것도 하지 않고 이렇게 길에 계신 건지 의아했다.

“할머니, 괜찮으세요?”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는데 할머니는 대답 대신 웅얼거리는 목소리와 끙끙 앓는 소리를 내면서 검은 비닐봉지를 내밀어 보여주셨다. 그 속에는 동전 몇 개가 들어있었다. 돈을 달라는 모양이었다. 주섬주섬 주머니에서 돈을 꺼냈는데 당시 나의 전 재산이 달랑 2,000원이었다. 수업을 마치고 저녁 대신 김밥을 사 먹으려 챙겨둔 돈이었다. 돈을 달라는 순간이 오자 나는 그 짧은 찰나에도 이걸 다 줄까 말까를 고민하고 있었다.

‘그냥 다 드릴까.’

‘그럼 이따 배가 고플 텐데......’

‘근데 너무 힘들어 보이시는데.......’

고민은 길지 않았다. 나는 절반인 1,000원을 드렸다. 나머지를 더 달라고 옷을 잡아당기는 할머니와 눈이 마주쳤는데 어쩐지 형형한 빛으로 매섭게 노려보는 할머니가 갑자기 무서웠다.

"죄송해요!"

할머니를 뿌리치고 달려가는데, 일순간 날 위한 1,000원을 남긴 스스로가 한없이 얄팍하게 느껴졌다.


생각이 바뀌는 데는 정말 1분도 걸리지 않았다. 다시 뒤를 돌아 뛰어갔다. 그 1분 사이에 할머니는 흔적도 보이지 않았다. 주택가 골목 사거리. 여기저기 다 트여 있는 그 공간에서 그렇게 빨리 할머니가 사라질 수 있다니.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았지만, 현실적으로 달리 생각이 되지도 않았기에 그저 빨리 다시 찾아야 한다는 마음만 앞섰다.

‘혹시나 가까운 대문 어딘가로 들어가지 않았을까?’

나는 "할머니!" 하고 계속 부르면서 여기저기 골목을 뛰어다녔다. 결국 할머니를 다시 만나지 못한 나는 손안에 쥔 1,000원 한 장이 부끄러워 길바닥에서 엉엉 울어버렸다.


수업은 한참 늦었다. 눈과 코가 빨개진 채로 들어서는 나에게 선생님은 지각한 이유를 묻지 않으셨다. 그날 이후 나는 그 할머니 생각이 곧잘 나곤 했다.

‘얼굴은 괜찮아지셨을까?‘

’그때 어디로 그렇게 사라진 걸까?‘

두고두고 후회가 몰려왔다.

’그냥 그걸 다 드릴걸......‘

그 한 끼 못 먹은 거야 다음 날이 되면 잊겠지만 이렇게 가슴에 남는 후회는 두고두고 나를 괴롭혔다. 파란만장한 이십 대를 지나올 때에도 가끔 생각이 났다.


‘정말 이상한 일이었어.’

서른 살이 훌쩍 넘어 내 아이를 품고 수유하던 어느 밤에도 나는 또 그 생각을 했었다. 그러다가 문득 반짝 전구가 켜진 듯 알아챘다. 너무 짧은 순간에, 압축된 깨달음이 혈관을 타고 질주하듯 내 머리로 쏙 들어오는 기분이었다.

그분이 그토록 기다리던 나의 마녀 할머니였던 것이었다! 나는 벌을 받지는 않았다. 악하게 살지는 않은 것 같다. 다만 내가 가진 걸 아낌없이 다 내어주지 못한 나의 작은 그릇을 알고 내 인생에서 딱 절반 치의 행운을 받아온 삶이었던 것이다. 생각은 점점 명확해 져갔다. 그렇다면 이제 나머지 절반은 내가 채워야 할 몫이다. 내가 채울 기회라도 있는 게 어딘가.


가끔 너무 일이 안 풀리고 돈도 안 풀리고 사람 관계 속에서도 치이고 힘든 순간들이 있다. 그런데 또 이런저런 이야기를 들어보자면 나는 또 마냥 험한 인생만을 헤쳐오지 않고 좋은 사람들과 우연한 행운을 만난 일도 부지기수였다. 내 인생은 뜻밖의 장소에서, 뜻밖의 사람들을 만나 도움을 받고, 그 마음을 배운 일이 절반이었다. 절반의 행운. 절반의 노력. 괜찮다. 이만하면 괜찮다. 돌이켜보면 지금이 내가 살아온 날들 중 가장 좋은 시절에 살고 있다.

‘나의 마녀 할머니! 어디에 계시든, 또 다른 소녀를 찾아다니고 계시든 할머니도 행복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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