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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유년의 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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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란 Sep 02. 2021

가끔은 기억으로 허기를 채운다

어쩌다 얘기를 나누다보면 엄마는 전혀 기억하지 못하는 사소한 기억들이 있다.

그 기억들은 때로는 서운하고 미울 때도 있는데 사실 대부분은 따뜻하고 뭉큰하다.

뭉클이 아니고 뭉큰한 이유는 뭉클보다는 덜 복받치기 때문이라고 우겨본다.


어린 시절을 떠 올리면 엄마를 만나기 이전의 시간은 거의 기억나지 않는 조각들만 있는데

가끔씩 힘든 날 밤에 누우면 어릴 때 집안의 풍경이 보인다.


엄마는 이모가 준 빨간 공모양의 의자에 앉고 그 앞에 나는 바닥에 앉아있고

엄마는 내 긴 머리를 듬성한 빗과 참빗을 번갈아 빗어가면서 예쁘게 머리를 만져주셨다.

가끔은 중국 무협 드라마에 나오는 낭자들 머리를 해주셔서 학교에 가면 주목을 받기도 했다.


유행에 떨어지긴하지만 나에겐 소중했던 몇 없던 마론 인형을 가지고 놀고 있으면

엄마가 바느질해서  인형 옷을 만들어 주시던 기억.


흑백으로 된 낡은 가곡집을 펴고 노래를 가만가만 불러주셨던 기억.


아빠가 회사에서 가져온 이면지에 눈이 부시도록 예쁜 공주를 그려주시던 기억.


입이 심심타 할 때는 냉동실에 얼려둔 인절미를 꺼내서 팬에 덥힌 다음 

눌러붙은 인절미에 설탕을 솔솔 뿌리고

포크로 쿡 찍어서 돌돌돌 말아서 인절미 떡 사탕을 만들어 주시기도 했다.


팝콘을 뻥 튀겨서 놀라움을 알려주시기도 했지.


사소한 기억들이고 그 때 무슨 얘기를 했는지 전혀 기억에는 없지만

그 따뜻한 분위기는 낡은 전등의 노르스름한 빛과 같은 색을 가지고 있어서

눈을 감으면 언제든지 그 안온함을 느낄 수 있다.


오늘 어쩌다보니 둘째를 맡기게 되어 엄마를 모시러 가서 같이 점심을 먹었다.

아직 여물지 못한 내 동생 걱정으로 눈가가 촉촉해진 엄마를 보니 마음이 아팠다.


엄마에게 둘째를 맡기고 출근해서 바쁜 시간이 지날 즈음 엄마에게 문자를 보냈다.


감사하다고. 힘들 때는 그 때 그런 기억들로 나는 힘이 난다고.

동생은 늦되지만 이제 시작하는 인생길에 좋은 기억을 내가 만들어주고 다독이겠다고.

그러니 엄마, 걱정 그만해요- 라고.


나이차가 많이 나는 내 동생이 나는 항상 안타깝고 대견하고 그러면서도 짠하다.

(동생의 얘기는 나중에 하기로 하자.)


엄마는 다른 기억은 잘 안나고 해준게 없어서 미안하기만 하다셨다.

머리를 만져주던 기억은 나는데 시간이 오래 걸려도 얌전히 잘 앉아있어 이뻤다고만 말씀하셨다.


엄마는 기억하지 못하는 그 조각난 시간들이 지금 나에게 힘을 주는 것 처럼

우리 아이들도 양가 할머니 할아버지들 사랑을 받은 기억들, 오늘 나와 읽은 그림책,

오늘 아빠랑 축구공을 차는 기억들로 

살아가다가 어느날 문득, 마음에 따스함 한 조각 지니고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래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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