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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흔살의나비 Jul 30. 2023

마흔 살의 나비

10년 만에. 만난 아빠와 마트에 갔다 (2)

한참의 세월이 흘렀다. 내가 지금의 남편을 만났을 때 엄마는 용기를 냈다. 이제는 이혼하겠노라고.

이혼 소송으로 시작하여 나도 엄마와 함께 몇 번의 법원 출석을 했다. 그러다 결국 법정 싸움에 지친 엄마의 결정으로 합의 이혼으로 엄마 아빠의 35년 결혼 생활은 마침표를 찍었다.

나는 속 시원했다. 쇼윈도에 가려져 있던 우리 가족이 장막을 걷고 세상 밖으로 나온 기분이었다. 이제는 말할 수 있게 되었다. 우리 엄마 아빠 이혼했다고. 그래서 나는 힘들었노라고 이제야 말할 수 있게 되었다. 나는 이제 황혼 이혼한 가정의 딸이 되었다.


많은 걸 감추고 괜찮은 척하며 살았어야 했던 지난 몇십 년 보다 그 편이 훨씬 좋았다.


그렇게 엄마는 이혼을 했고, 나는 지금의 남편과 결혼을 했다. 아빠 없는 결혼식이었지만 꽤 행복했다.

그렇게 또 각자의 10년이 흘렀다. 엄마는 혼자서도 예전보다 씩씩하게 지냈고, 나는 행복한 신혼 생활을 하고 또 아이를 낳고 키우며 새로운 가정을 꾸려 갔다.

10년 후 내가 마흔이 된 어느 날 아빠를 만났다.

오빠를 통해 이번 본인의 칠순에 나도 와주었으면 한다는 아빠의 연락이 있었다. 많이 고민했다. 아빠가 가정을 등한시하던 나의 사춘기쯤부터 나는 아빠와 말을 끊고 지냈으며, 이혼 과정엔 법정에서 엄마를 위해 아빠에게 불리한 발언을 하기도 했었다. 그런 내가 아빠를 보고 이제야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까?

그렇게 아빠를 만났다.

법정에서 마지막으로 만났던 아빠는 그로부터 10년이 지난 그날, 복잡한 표정으로 우리가 예약해 둔 한식당 앞에 서 계셨다. 그사이 나는 엄마가 되어 있었고, 아빠는 70대 할아버지가 되어 있었다. 엄마를 힘들게 하고 날 서 있던 두려운 아빠는 거기 없었다. 처음 만나는 사위와 손녀를 보고 옅은 미소를 짓는 할아버지와 장인어른만이 있었다. 무슨 얘기부터 꺼내야 할지 몰랐지만, 수다스러운 오빠 덕분에 어색함이 덜어졌다. 그때만큼은 오빠가 고마웠다.

식사가 나오고 밥을 먹으며 대화를 이어갔다. 아빠가 이렇게 유머러스 한 사람이었나? 그동안의 일들이 모두 없어진 거처럼 아빠는 너스레까지 떨며 분위기를 맞춰 주셨다. 나는 그런 아빠가 보기에 나쁘지 않았다. 그렇게 오랜 세월 동안 원망하던 아빠는 내 앞에 없었다. 그저 처음 만난 손녀와 사위 앞에 들떠 있는 여느 할아버지만이 있을 뿐이었다. 그런 아빠를 보며 나는 만감이 교차했다. 아빠와 눈이 마주치면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십수 년 만에 얼굴을 마주 보고 대화를 하는 아빠에게 높임말을 써야 할지, 어린 시절 그때처럼 반말을 써도 될지. 모든 게 처음 같이 낯설었다. 한편으로는 이제 나도 나의 가정을 꾸려 아빠를 편안하게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도 있게 되었다. 아빠는 또래보다 젊은 사고를 가지셨구나, 말씀을 재미있게 잘하시는구나. 아빠는 한창때 누구보다 열심히 일해 자수성가한 꽤 성공한 사업가였었지. 아빠의 새로운 모습과 잊고 있던 아빠의 예전 모습이 교차하여 내 눈앞에 어렸다.

식사를 마치고 함께 카페에 갔다. 칠순 기념으로 사 온 케이크로 생일축하 노래를 불렀다. 아이들이 있는 덕분에 분위기가 나름대로 화기애애했다. 아빠는 줄곧 웃으셨다. 대화가 무르익어 갈 때쯤 10년 동안 연락 없던 우리와 이혼할 당시의 힘들었던 시간을 토로하시긴 했지만 주로 서로의 근황을 나누고 담소를 나누었다.

순간순간 나는 아빠가 다온이를 보는 눈빛에 가슴이 아려 왔다. 그리고 결혼식에 못 가 미안하다는 아빠의 말씀에 참고 있던 눈물이 터졌다. 카페에 사람들이 많았지만 부끄러운 줄 모르고 눈물이 계속 쏟아졌다. 나도 몰랐던 나의 아픔이 숨어있다 그제야 모습을 드러냈다. 차라리 속 시원했다. 진작에 터졌어야 할 내 마음의 고름이었다. 이혼한 두 고모의 조카 결혼식엔 모두 고모부를 대신해 아빠가 신부 입장을 해주셨는데 정작 본인 딸의 결혼식에 와보지도 못한 아빠의 회한도 어렴풋이 짐작은 갔다. 하루 만에 십 년 이상 묵은 감정이 씻겨 내려갈 리는 없었지만 이제 첫발을 내디딘 기분이었다. 오늘 하루의 만남으로 끝내고 싶지 않았다.

이제 나는 마주할 수 있었다. 나를 아프게 한 가정. 피하기만 했던 아빠, 함께 온 남편과 딸이 큰 힘이 되었다. 이제 나는 나의 가정이 있으니 더는 과거에 아파하지 않아도 되었다. 아파하고 상처받았던 과거와 마주할 수 있었다. 다시 만나고 싶었다. 아빠를 마주하고 나는 이제 괜찮아졌음을 확인하고 싶었다. 그렇게 우리는 다음 만남을 약속했다.

파주에서 울산까지 꽤 먼 거리였지만 아빠를 뵈러 또 내려갔다. 아빠는 볼 때마다 소고기며 회 등 값나가는 음식들을 사주셨다. 다온에게는 늘 넉넉하게 용돈을 챙겨주셨다. 아빠가 초라하지 않게 노후를 보내고 계셔 안심이 되고 내심 든든했다.

그러던 어느 여름날, 문득 바다가 보고 싶었다. 바다가 보이는 울산에 계신 아빠가 다시 보고 싶었던 걸까? 남편은 흔쾌히 그러자고 했다. 워낙 장거리라 구미를 거쳐 울산으로 향했다. 울산에서 1박을 하고 올라오는 길에도 문경에서 다시 1박을 하고 파주로 돌아올 계획이었다. 몇 시간이 걸려 울산에 도착해 아빠께 연락을 드렸다.

“아빠 점심에 뵐까요? 저녁에 뵐까요? 저희가 아빠 계신 곳으로 갈까요? “

모든 것이 조심스러웠다. 아빠는 본인이 너희가 있는 곳으로 가겠다 하셨다.

또 오랜만의 만남. 걱정보단 기대가 컸다.

“아빠, 점심 드시고, 저희 예약한 펜션에서 저녁까지 드시고 가셔도 돼요. 혹시… 주무시고 가실래요? “

혹시 서운하실까 봐 예의상 여쭤본 말이었다.

“어… 뭐 자고 가지 뭐. 안 자도 되고. 편할 대로 하자.”

기다린 듯한 아빠의 대답이었다. 의외였다. 주무시고 가신다니… 예상 못 한 전개였다.

“아…. 네! 그럼 그러세요. 좋아요.”

“그럼 저녁에 먹을 거 장을 봐야 하는데……”

“머 대충 먹자.”

“아니에요. 아빠 오시는 데 고기라도 구워 먹죠. 같이 장 보러 가요.”

아빠와 마트라니. 처음이었다.엄마와 한 번도 안 가본 마트를 아빠와 가봤을 리 없다. 아빠와 마트에 간다니. 진짜 오래 살고 볼 일이다.

다 함께 근처 마트로 갔다. 나는 조금은 들뜬 마음이 되어 살림 잘하는 주부처럼 보이고 싶었다. 아빠도 예전과는 다른 모습을 보이고 싶으셨는지 아니면 안 보고 사는 동안 변하신 건지 적극적으로 마트를 둘러보고 카트에 음식들을 담으셨다.

“아빠. 이런 모습 처음 봐요.”

“아 그 참. 자주 한다.”

아빠는 대답을 하시며 멋쩍어하셨다.

“아빠 그 쌈장은 너무 커요. 아빠 깻잎은 빼고 상추를 담아요. 상추가 좋아 보여요.”

“아빠 라면은 신 라면이죠? 고기에 뿌릴 허브솔트도 사야죠.”

나는 적극적으로 주부 행세를 했다.

과일도 못 썰고 유부초밥 하나에도 쩔쩔매던, 마트 카트에 동전 넣을 줄도 몰랐던

나는 10년 만에 만난 아빠와 처음으로 마트에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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