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일 카드 결제일이다. 내 생활비로 써야 하는 100만원을 또 넘겼다. 조금만 더 신경 쓰고 아끼면 될 거 같은데 그게 안 된다. 이번 달은 30이 넘었다.
남편은 다온이 낳고 7년째 외 벌이다. 수업을 다니긴 했지만 아이 때문에 올 타임이 아니라 내 용돈 정도였다. 우리는 결혼하면서 딩크족을 하겠다고 마음먹었었다. 워낙 넉넉지않게 결혼하기도 했고 우리 형편에 아이를 키우는 건 힘들겠다는 판단에서였다.
남편과 연애하고 결혼할 당시 남편은 여러 가지 사정으로 모아둔 돈이 하나도 없었다. 그래서 자신은 결혼 안하겠다고 마음먹고 있었는데 어느 날 덜컥 나를 만난 것이다. 우리는 첫눈에 반했고 서울-울산을 오가며 뜨겁게 사랑했다. 남편은 나와 결혼하기 위해 당시 엄마와 나 둘이 살고 있었는데 울산에 내려와 직장을 구하고 엄마랑 같이 살까도 고민했던 사람이다. 사서인 남편이 울산에 와 구할 수 있는 직장은 별로 없었다. 울산엔 도서관이 별로 없어 직종을 아예 바꿔야 할 판이었다. 나와 결혼하고 살기 위해 그렇게까지 했다. 남편은 지금도 여전히 그렇다. 어찌 되었든 그런 모습과 상황이 고맙기도 했지만, 불안하고 답답해서 내가 결단을 내렸다. 내가 서울로 올라가기로. 이제 막 자리 잡기 시작한 일도, 이혼하고 혼자된 엄마도, 어릴 적 친구들도 모두 다 두고 떠나야 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내가 포기하는 것이 불안한 미래보다는 나았다.
내가 결심하고 나니 일은 착착 진행되었다. 예물 예단 등 거의 모든 형식적인 건 생략하고 결혼식은 셀프로 준비하기로 했다. 양 쪽 모두 아버지가 안 계시니 가능한 일이었다. 집을 구하는 게 가장 큰 일이었다. 우리 형편상 월셋집을 구해야 했지만 나는 죽어도 월셋집은 싫었다. 가진 돈에 맞춰 집을 구하려니 답답했다. 부동산에서 보여주는 집마다 좁고, 낡고, 별로였다. 나는 심란했다. 어느 날 100% 마음에 들진 않지만, 어느 정도 조건에 맞는 집이 나왔다. 오래된 빌라였지만 복층이고 우리 눈엔 매력적인 집이었다. 돈이 더 필요했다.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하고 있는데 엄마한테 전화가 왔다. 내가 돈을 빌려주마. 살면서 갚거라. 가뭄에 단비 같은 소식이었다. 당시엔 아이를 낳을 생각이 없었으므로 둘이 벌어 갚으면 금방 갚을 수 있겠다는 계산도 섰다.
이제 다됐다. 같이 살기만 하면 된다.그렇게 우리의 결혼 생활은 시작됐다.신혼기간 동안 낮엔 일하고 밤에 만나 맛있는 거 먹고 한잔하고 사람들과 어울리고 아무 걱정 없이 순탄하게 시간이 흘러갔다.
그렇게 2년.
엄마 돈도 꽤 갚았고 놀 만큼 놀았다 싶었을 때 갑자기 아기가 생겼다. 아기가 생겼을 때 우리는 당황했지만 기뻤다, 우리끼리만 살겠다고 공언했던 우리 부부였지만 생기고 보니 기쁘고 행복했다. 우리에게 주신 선물이라 생각하고 낳고 잘 키우겠다 다짐했다. 설레고 두근거렸다. 남편과 나의 아이라니…… 우리의 아이라니……부모가 된다는 생각에 떨렸다. 내가 엄마라니.
그렇게 3달. 기쁨에 찬 시간들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배가 너무 아팠다. 전날 먹은 음식이 배탈이 났나? 걱정이 돼 병원에 갔다. 진찰을 보는데 이상한데요? 아기가 보이질 않네요. 이게 무슨 소리……그냥 배탈인 줄 알고 온건데……
유산이었다.
나에게 이런 일이 생기다니 살면서 시련이란 걸 많이 겪어보지 못한 나에게 너무 큰 시련이었다. 넋을 놓고 울었다. 베 속에 있었는데 분명히 있었는데……어떻게 어떻게……
“엄마. 아기가 잘못됐어.”
“…”
“엄마, 유산이야.”
“니는 처음 이가? 나는 몇 번이나 그랬다. 여사다. 여사.”
“…… 알았어. 끊어”
유산됐다는 사실보다 엄마와의 통화가 더 내 가슴을 무너지게 했다.엄마가 어떻게 이럴 수가 있지 엄마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이때부터, 내가 엄마가 되려고 했던 순간부터 나는 엄마와 멀어지기 시작했다.수술 일정을 잡고 남편과 나는 서로 위로하며 많이 울었다.기대했었는데…… 우리의 아기. 기대됐었는데…… 엄마 아빠가 된 우리.
수술을 마치고 의사 선생님께서 말씀하셨다.
“2달 뒤부터 임신가능 하십니다. 자궁이 깨끗해져서 임신 가능성이 높을 거에요.”
다시 낳고 싶어졌다. 우연히 우리에게 온 아기 다시 만나고 싶어졌다. 그렇게 2달 뒤 우리는 다시 임신을 하고 우리의 아기를 만났다.
행복한 임신 기간이었다.
배 속의 아기는 나를 전혀 힘들게 하지 않았다. 입덧도 없었고 편안했다.나는 계속 수업을 다니며 아기를 맞을 준비를 했다. 행복한 시간들이었다.
사실은 잘 기억은 나지 않는다. 그 시절이.
그냥 좋았었지 하는 정도의 감상이지 구체적인 기억이나 떠오르는 건 거의 없다.
내가 잘 기억하지 못하는 사람이란 게 이럴 때 조금 슬프다. 나의 행복했던 시절을 다 놓쳐버리는 것 같다.
그래서인지도 모른다. 내가 과거에 연연하지 않는 것은. 오늘만 사는 오여사인 것은.
오늘도 지나고 나면 과거 되는 것. 나는 또 잊어버릴 것이다. 나에게 잊힌 기억들이 얼마나 많을까?
그래도 임신시절 내가 다 기억하지는 못하지만, 기억나는 몇몇 장면들이 있다. 배가 부를 만큼 불렀을 때 남편이 퇴근 후 저녁에 함께 동네 산책을 했던 일, 새콤한 젤리가 먹고 싶어 편의점에서 잔뜩 샀던 일, 임산부 요가를 다닌 일, 지역 주민센터에서 남편이 임산부 체험을 했던 일 등등 몇몇 장면들.그렇게 행복한 시간들을 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