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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흔살의나비 Jul 30. 2023

마흔 살의 나비

10년 만에. 만난 아빠와 마트에 갔다(1)


“이거 어떻게……”

“아…… 카트 안 써 봤어? 곱게 자랐나 보네. 카트에 동전 넣는 것도 모르고.”

“아…… 네…”

동네 대형 마트. 당시 남자친구와 등산을 가기 위해 장을 보러 왔다. 카트를 어떻게 쓰는 거지. 나는 왜 이것도 모르는 거지. 순간 얼굴이 빨개졌을 것이다. 들켰을까? 내가 이렇게 아무것도 할 줄 모른다는 걸. 나는 왜 하필 여기서 안에서 새는 바가지 밖에서도 새는 걸까? 부끄럽다. 내가 안에서 새는 바가지라는 게.

새벽부터 일어나 유부초밥을 쌌다, 처음이다. 이렇게 요리 비슷한 것이라도 해보는 게. 스물여덟 살 쯤이었을까. 그때 같이 일하던 친구와 등산동호회에 가입했다. 취미생활도 갖고 남자친구도 만들어 보자는 심산이었다. 우리와 같은 목적을 가진 많은 청춘 남녀들이 모였다. 다들 저마다의 목적을 가지고 평일에는 가까운 곳에 트래킹이나 야간산행, 주말에는 국내 괜찮은 산행지로 꽤 멀리 나가기도 했다. 모두 열정적으로 모임에 참여했다. 일하는 평일임에도 야간 산행에는 바글바글 빠지는 사람이 거의 없이 많은 사람들이 참석해 등산을 마치고 뒤풀이로 막걸리에 파전을 즐겼으며, 주말 산행에는 값나가는 등산복에 풀 메이컵을 한 여자 회원들이 서로 곁눈질하곤 했다. 친구와 나도 웬만하면 빠지지 않으려 노력했다. 친구는 몇 번 모임을 나가보더니 자기도 브랜드 등산복을 사야겠다고 했다. 엄마가 사주기로 했단다. 엄마가 골라 준 보라색의 브랜드 등산복이 꽤 잘 어울렸다.

당시 엄마와 나는 데면데면했다. 나는 몇 번의 이직으로, 엄마는 아빠와의 갈등으로 각자 이러저러한 이유로 우리는 대화를 잃어 갔다. 들키지 않아야 했다. 내가 이러저러한 사연을 가진 가정에서 자란 아이라는 걸. 당시 얼마 되지 않는 월급으로 나는 혼자 백화점에 가 초록색 등산복 세트와 분홍색 등산 가방을 샀다.

그렇게 등산동호회에 맞춰 가기 위해 나름의 최선을 다했다. 새벽에 일어나 하지도 않던 도시락을 싸며 내가 어딘가 부족하다는 걸 감추어야 했고 또한 나도 등산복을 사주는 엄마가 있는 거처럼 보여야 했다.

그런데 그날 마트에서 카트에 동전 넣는 것을 몰라 머뭇거리게 된 것이다. 순간 아찔했다. 다 들키는 것만 같았다.  그때까지 엄마와 나는 단 한 번도 마트에 같이 가본 적이 없었다. 엄마는 마트보다는 시장을 선호하는 편이라 그렇긴 했지만 어찌됐든 나는 그런 이유를 불문하고서 우리 가족이 함께 마트에도 가지 않는 가정이라는 걸 들키게 될까 봐 조마조마했다. 들키지 않아야 할 것이 어디 그것뿐이었으랴.

그렇게 나는 들키지 않으려 애쓰며 사람들을 만나왔다. 무엇을 감추어야 했던 걸까? 우리 가족의 불화를? 아니면 그래서 어딘가 결핍되어있는 나를? 무언가 부족하니 자꾸 가리고 덮고 포장해야 했다.

어느 날은 번개모임이 있었다. 삼삼오오 같은 나이 또래끼리 치맥을 하는 자리였다. 몇십 명씩 우르르 가는 산행보다 사람들을 사귀고 물론 남자친구도 점 찍기 좋은 기회였다. 나는 최대한 눈에 띄기 위해 무엇을 입고 가야 할지 고민했다. 내가 제일 눈에 띄어야 했다. 옷장을 발칵 뒤집어 가장 화려한 옷을 골랐다. 검은 블라우스에 밑단에 장미 프릴로 장식된 무릎보다 15센치는 올라간 분홍색 스커트, 거기에 뒤쪽에 리본이 달린 레이스 반 스타킹을 신었다. 집을 나서며 엄마와 눈이 마주쳤지만 나는 인사하지 않았다. 여느 날처럼.

약속된 장소에 도착했다. 유흥가가 몰려 있는 번화가 한복판이었다. 술집과 모텔들이 즐비했다. 벌써 몇몇 사람들이 모여 맥주를 마시고 있었다. 쮸뼛쮸뼛 자리를 잡고 앉았다. 얼굴을 익힌 회원들과 적당히 반가운 척 인사를 했다. 나도 맥주를 시켜 긴장된 목을 축였다. 시답잖은 농담들이 오갔다. 맥주가 한 잔 두 잔 들어가니 긴장도 풀렸다. 비슷한 또래들끼리 모여있으니 대화가 잘 통했다. 다들  술기운이 오르고 술집 음악 소리만큼이나 목소리가 커졌다. 그렇게 1차, 2차까지 갔다. 3차로 자리를 옮기려는데 이번 자리에서 대화를 좀 나눈 남자 회원 한 명이 안 보였다. 전화를 걸어 어디댜고 물었더니 근처 편의점이라고 한다. 데리고 올게요. 말을 하고 편의점으로 갔다. 형형색색 네온사인이 번쩍거리고 불빛 속에서 편의점을 찾아 남자 회원을 만났다. 같이 가요 하고 팔을 잡아 끌었다. 아 잠깐만 돈 좀 뽑고. 그는 그렇게 돈을 뽑고 나서 나에게 숙취해소제를 사줬다. 고맙습니다. 인사하고 편의점을 나섰다.


“그냥 우리 집에 갈까? 취한 거 같은데…”

“아…… 좀 그렇긴 한데. 그냥 가도 될까요?”

“뭐 어때. 우리 한 둘쯤 빠졌다고 티 안 날꺼야. 다들 취했고.”

“아……네 그럼……”

그렇게 같이 번화가 거리를 걸어 택시를 타고 집으로 갔다. 그 때 시각이 새벽 2시쯤이었다. 앞으로 어떤 일이 일어날지 모르고 방에 들어가 술에 취해 깊이 잠들었다.

그 뒤로 번개모임도 줄어들고 단톡방에 톡도 줄어드는 거 같았다. 왜인지 알아차리는 데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어느 날 친구가 말했다.

“너 그 날 00 씨랑 둘이 빠졌지? 어디 갔었어? “

“어? 그게 무슨 말이야? “

“다들 네가 꼬셔서…… 어디 간 거 아니냐고……”

“어? 뭐라고?”

그랬다. 내가 그날 그렇게 짧은 스커트로 화려하게 차려 입지 않았다면 그런 소문은 나지 않지 않았을까? 내가 새벽부터 유부초밥을 싸지 않았더라면 그런 오해는 없지 않았을까?

그렇게 나는 등산동호회에서 점점 소외돼 갔으며 말을 걸어주는 사람이 하나둘 줄어들었다. 학창 시절의 나처럼 나는 또 외로워져 더 이상 모임에 나가지 않게 되었다.  

어쩌면 내가 단란한 가정에서 자라왔다면 엄마에게 가서 엄마 나 억울해 사람들이 나를 오해해서 그랬지 뭐야. 진짜 나쁘지 하며 하소연을 하고 말았겠지. 그러면 엄마는 또 그래. 나빴네. 네가 속상하겠다. 어쩌니? 그냥 그 모임 가지 말아버려. 네가 뭐가 부족해서. 그러시며 나를 위로해 주었겠지. 그러면 나는 또 괜찮아졌겠지.

하지만 나는 그런 작은 오해도 오롯이 나 혼자 감당해야 했다. 대화를 잃은 가정에서 나는 어디에 작은 고민 하나 털어놓을 곳이 없었다. 전부 내 탓 인 것만 같았고, 좌절했고, 같이 마트조차 가지 않는 가족과 엄마를 원망했다. 그렇게 소통을 잊은 우리 가족은 서로를 외면해 가며 시간만 쌓여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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