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질환의 진단에 있어 가장 큰 권위를 갖고 있는 <정신질환의 진단 및 통계 편람(DSM-5)>에 따르면, 우리가 가장 흔한 정신질환이라 생각하는, 소위 우울증이라 불리는 '주요 우울 장애(Major Depressive Disorder)'의 1년 유병률은 약 7%이고, 망상, 환각 등 정신증적 증상을 동반하는, 주변에서 보기 드문 질환이라 여겨지는 '조현병(Schizophrneia)'도 평생유병률이 약 0.7% 정도로, 넓게 보면 100명 중에 1명이 갖고 있는 꽤나 흔한 질병이다.
이렇듯 심리적, 정신적인 문제로 많은 사람들이 고통을 받고 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우리나라에서는 심리치료를 받거나 정신과에 방문하는 것에 대해 자기 자신에게 엄청난 결함이 있는 것처럼 느끼거나 다른 사람에게 비난받을 것이라고 염려하는 부정적인 고정관념을 갖고 있어 보인다.
내 생각에, 이러한 편견은 몇 가지 이유로부터 형성되는 것 같다.
첫째, 한국 사회에서 정신질환은 질병이 아닌 인성적 결함으로 여겨지는 것으로 보인다.
한국 사회는 한 사람이 사회적인 기능을 평가할 때 인내, 노력과 같은 측정하기 어려운 질적인 측면을 강조하므로, 심한 우울 장애나 조울증, 조현병과 같은 정신질환을 경험하며 사회적으로 부적응한 사람들을 정신적으로 나약한 사람이라고 비난하기 쉬우며, 심지어는 이들을 '미친 사람', '또라이'와 같은 멸칭으로 폄하하며 인성적인 문제를 가진 사람으로 낙인찍고 '정상'으로부터 격리시킨다.
그러나 우울증, 조현병과 같은 정신질환도 사실상 우리가 흔히 겪는 고혈압, 당뇨와 같은 신체적인 질환과 마찬가지로 호르몬, 신경전달물질과 같은 신체적인 요소들의 결핍이나 불균형으로 인해 발생하는 '질환'이다. 그렇기 때문에 개인의 성품이나 노력으로 인해 극복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적절한 정신과 약물이나 심리치료 개입을 통해 증상을 완화시켜 일상생활을 하는 것이 가능하며, 조기에 개입할 경우에는 완치까지도 가능함에도 불구하고, 사회적인 편견으로 인해 참고 견디다 증상이 악하된 후 정신건강 기관에 방문하여 치료가 더뎌지는 경우들이 많은 것으로 보인다.
둘째, 정신질환에 대한 정보의 비대칭성
정보의 부재는 공포를 낳는다. 우리는 정신질환에 대해 너무도 무지하다. 우울증도 한 가지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계신지? DSM-5의 목차를 살펴보면, 우울장애(Depressive Disorders)라는 범주 하나에만 파괴적 기분조절 부전 장애, 주요 우울장애, 지속성 우울장애, 월경전 불쾌감 장애, 물질/약물치료로 유발된 우울장애, 다른 의학적 상태로 인한 우울장애, 달리 명시된 우울장애, 명시되지 않는 우울장애 등 총 8개의 항목이 포함되어 있다.
그러나 정신의학에 대한 지식이 없는 일반적인 사람들은 이러한 질환의 양상과 심각도의 다양성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문제들을 단지 '우울증'이라는 단어로 퉁쳐버리고, 심지어는 아주 심각한 정도가 아니라면 자신이 심적 불편감을 경험하지 않고 있다고 부인하며 병을 키우는 상황에도 이르게 된다.
또 다른 문제는, 심리치료나 정신과 진료를 이미 받고 있는 사람들 대부분이 이러한 편견 때문에 주변 사람들이나 대중매체에 자신이 질환을 갖고 있다는 사실을 노출하지 않으므로, 실질적으로 문제에 놓인 사람들이 어떤 어려움을 겪는지, 어떤 방법으로 도움을 받을 수 있는지에 대한 정보를 접할 기회가 없어지며, 그저 사건, 사고를 통해 노출되는 정신질환을 가진 사람들의 편파적이고 자극적인 사례들을 통해 부정적인 인식이 강화되는 악순환에 놓이게 되는 것이다.
정신질환에 대한 편견의 관점에서, 편견을 가진 자들이 문제일까 편견의 대상이 되는 사람들이 문제일까?
정신질환에 대한 정보에 무지한 것을 누구의 책임으로 돌릴 수 있을까?
이러한 책임은 임상심리 전문가인 나와 같은 '정신건강 전문가'들의 탓이 아닌가 조심스럽게 주장해본다. 물론, 모든 전문가들이 병의 원인을 밝히고 정확하게 진단을 내리기 위해 노력하며, 질환에 맞는 적절한 치료 개입법을 개발, 적용하기 위해 불철주야 노력하고 있지만, 아쉽게도 이러한 것들을 우리의 성역과도 같은 연구실, 병원의 구성원들에게만 공유되고, 정작 문제를 경험하는 당사자들에게는 폭 넓게 전달되지 않고 있는 듯 하다.
그래서 초심 임상심리 전문가이지만, 이러한 책임을 조금이라도 짊어져보자는 차원에서 '심리치료 네비게이션'이라는 다소 고루한 이름으로 글타래를 만들어보았다.
내가 언제 어떤 곳에서 어떤 전문가에게 정신건강 서비스를 받아야 하는지에 대한 가이드를 제공하고 어떤 종류의 정신질환들이 있는지에 대해 간략한 정보를 개관함으로써 마음의 불편을 겪고 있는 사람들 중 일부에게라도 도움을 줄 수 있다면 작은 성공이라 할 수 있을 것 같다.
부디 나의 작은 시도가 미숙한 초심 전문가인 나 이외에도 많은 정신건강 전문가들에게로 뻗어나가 큰 변화를 만들어낼 수 있기를 바라며, 자그마한 프로젝트를 시작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