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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캡틴 제이 Nov 20. 2019

2월의 도쿄 나리타 공항

신참 기장이 정측풍 40 나트의 고비를 넘기다

1994년 2월 대한민국 공군사관학교 성무 비행장

"너 내려!"
"예? 여기서 내리란 말씀입니까?"
"그래 내려, 그리고 뛰어와 주기장까지, 어서!"
이제 지금 막 이착륙 훈련을 마치고 도착한 세스나 훈련기가 아직 활주로를 벗어나기도 전에 갑자기 활주로에 멈춰 서고는 훈련 중이던 소위가 다급히 뛰어내린다. 그리고 프로펠러의 소음을 뒤로 세스나는 털털 거리며 앞서 가고 그 뒤를 아직 헬멧을 머리에 쓴 채 커다란 낙하산을 등에 맨 조종 훈련생 소위가 달리기 시작한다.
세스나라면 불과 몇 분이면 도달했을 거리가 이후 10분이 넘는 완전군장 구보가 돼버렸다. 2월 겨울날 정오에 가까운 시각 아직 쌀쌀한 날씨임에도 그는 벌써 온몸이 땀으로 범벅이다. 바이저 밑으로는 이미 흘러내린 땀이 훈련생을 상징하는 조종복 아래에 두른 파란 마후라를 짙은 남색으로 물들이고 있다.
한참만에 도착한 주기장엔, 엔진이 꺼진 세스나 옆에 멀리서 헐떡거리며 달려오는 낙하산 맨 학생 조종사를 교관이 무료한 듯 기다리고 있다.
"너 오늘 조작은 빠따 깜이야! 알아? 이 정도로 끝내는 걸 다행으로 생각해. 내가 학생 때 내 교관은 날 뒤에서 따라왔어. 그랬음 네가 훨씬 빨리 뛰었을 텐데 흐흐흐" 음흉한 웃음을 지으며 김소령은 학생 정소위를 잠시 측은한 듯 바라본 뒤 이내 "디브리핑은 점심식사 후 1시에 내 방에서, 식사가 아주 꿀맛일 거야 흐흐흐 " 말을 끝으로 대대 건물로 먼저 총총 걷기 시작한다.
그 뒤로
"필-쓰응! 가암사 합니다~ " 훈련생이 많이 과장된 목소리로 경례를 한다. 분명 감사하다는 말을 빌어 소심한 반항(?)을 하는 태세다.
흠칫 어깨너머를 바라보고는 교관은 이내 다시 걷기 시작한다. 그의 얼굴에는 슬쩍 미소가 번진다.

그리고 2017년 2월 16일 도쿄 나리타 공항
오후 4시가 넘어가는 시각 777 한대가 두바이를 떠나 8시간이 넘는 비행을 마치고 공항 관제구역에 들어서고 있다. 벌써 일주일이 넘게 오후만 되면 몰아치는 강풍에 이미 나리타 공항은 회항과 홀딩 , 항공기들의 GO AROUND가 오늘도 예외 없이 이어지고 있었다.
2월 도쿄 나리타 공항의 바람은 조종사들에게 악몽 그 자체다.
이날도 예보는 정측풍 45 나트 거스트 65 나트. 777항공기의 측풍 제한치는 정확히 45 나트. 거스트 바람은 조종사 판단에 무시할 수 있다고 되어있으니 순전히 조종사가 판단해서 내릴 수도, 거부할 수도 있다. 접근 자체를 시도하지 않고 인근 공항으로 회항을 미리 결정한다 해도 법적으로 하자가 없는 날이다.

"모든 나리타 인바운드 항공기에 알립니다. 최소 속도로 줄이십시오. 공항에 1만 피트 이하 윈드 쉬어와 강한 돌풍으로 항공기 홀딩 페턴이 포화상태이며 이중 다수가 인근 공항으로 회항하고 있음" 막 수신한 공항정보는 이미 예상은 했지만 훨씬 구체적으로 긴박한 현 상황을 담고 있었다.
항공기 기장은 이제 총 비행시간 1만 시간을 막 넘은 하지만 기장이 된지는 3달이 막 지난 신참. 부기장은 남아공 출신으로 기장보다는 나이가 네댓 살은 많은 덩치 큰 Christ. 그리고 한 명 더, 긴 비행시간으로 인해 추가된 항로 기장 피지 출신의 이중 제일 나이는 어리지만 기장경력은 이미 2년 차인 Steve. 이제 이들은 불과 30분 이후면 벌어질 일들을 대비해 Landing 브리핑을 시작한다.. "오늘 일단 접근은 해볼 거야. 하지만 접근 중 상황이 나빠지면 우리들 누구라도 CALL을 해서 GO AROUND 하고 바로 회항하도록 하자. 이때 뒤에 앉아있는 스티브 너는 객실에 사과방송을 해주고 Christ는 넌 회사에 회항 보고를 기회가 될 때 내가 잊더라도 꼭 먼저 보내줘" 자 그럼 시작해볼까! 애써 평정한 듯 브리핑을 마친 기장의 머리에는 "아~ 왜 하필 3달밖에 안된 나를 2월의 나리타에 보내는 거야, 이건 아니지."라는 생각이 스치고 있다.

"도쿄 Approach Good Afternoon, Emirates 000 descending FL200"
"Emirates 00 You are Number One Direct 000 clear for App RWY16L"
아~ 이건 뭐지. 항공기들이 홀딩 중이라며???. 접근전 홀딩을 예상하던 조종사들은 순간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며 이 상황이 이해가 안 되는 표정들이다.
"에미리트, 앞에 비행기 없습니다. 모두 회항하거나 일부는 착륙했어요. 현재 바람은 정측풍 40 나트입니다"
아 이러면 무조건 접근을 시작해야 하는 제한치 내의 바람이다.
1만 피트를 통과한 항공기는 거친 위드 쉬어(돌풍) 속으로 진입한다. 자동조종장치가 연신 출력을 넣었다 줄이기를 반복하면서 엔진은 어느 사이 흡사 동물이 헐떡이는 듯 날카로운 엔진 소음을 내뱉고 있다. 속도계는 위아래로 위협적으로 출렁거리고 자세는 5도 가까이 위아래를 넘나 든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아직 자동조종장치가 제 몫을 해주고 있다. ( 터뷸런스가 심한 경우 Auto Pilot이 감당하지 못하고 off 되는 경우가 있어 주의해야 한다) 하지만 자동 Thrust의 상황은 이보다 훨씬 급박하다. 통상 줄어드는 속도에 대한 반응이 느려 연신 기장은 속도가 위험한 상황까지 떨어지지 않도록 매뉴얼 override 상태에서 넣다 빼기를 반복하고 있다. 이 상황이 1천 피트 이하까지 지속되면 GO AROUND 해야 한다.
"One Thousand" 묵직한 남성톤의 항공기 자동 Callout 장치가 이제 착륙이 임박한 1000피트 고도를 알린다. 돌풍이 몰고 온 모래로 잘 보이지 않던 활주로가 이제야 눈앞에 희미하게 드러나기 시작한다. 아~ 생각했던 것보다 짧다. 그것도 측풍으로 인해 아직 정면이 아닌 좌측 어깨 너머로 고개를 돌려야 보인다. 이제 착륙하려면 자동조종장치를 풀어야 할 순간이다. 안전하지 않다고 판단되면 언제든 GO AROUND 해야지 생각을 하며 잔뜩 긴장하며 감아 쥔 THRUST LEVER 위로 GO AROUND 버튼에 손가락을 문질러 그 감촉을 다시금 되새긴다. "언제라도 이걸 누를 수 있어야 한다". 비행훈련 중 교관들과 부기장 시절 기장들이 수없이 반복해서 그에게 강조하던 말.
777항공기의 자동착륙장치의 측풍 제한 치는 최대 25 나트 오늘 바람은 40 나트를 넘고 있으니 자동착륙장치는 소용이 없다. 순전히 조종사의 개인 기량에 달렸다. 탑승한 350명의 승객들이 도쿄에서 기다리는 가족들과 저녁 식사를 제때 할 수 있느냐 아니면 최소 3시간의 딜레이가 예상되는 회항을 할지는 이제 오롯이 그의 손에 달려있다. 오늘은 그가 기장이다. 도와줄 교관은 이미 이곳에는 없다. 그 시절 교관이 앉아있던 그 자리엔 오늘 천진난만하게 해맑게 미소 지으며 날 바라보는 부기장이 앉아있다.
"Manual Flight, Disengaging Auto Pilot" 수동 비행으로 전환을 알리는 Callout을 하기 적전 기장은 늘 그렇든 습관적으로 항법 컴퓨터에 시현된 현고도 측풍을 슬쩍 바라본다. 정확히 정측풍 40 나트. 하지만 그는 알고 있다. 이 바람은 평균치일 뿐 순간순간 몰아치는 돌풍은 고려되지 않는다는 것을.
이제 그의 손과 발을 통해 바로 느껴지는, 자동조종장치가 해제된 항공기는 이제 펄떡이는 날 생선같이 반응이 훨씬 격렬하다. 출렁거리는 속도를 유지하기 위해 다소 과하게 들어간 엔진 출력과 몰아치는 강한 바람이 조종간을 통해 선명하게 여과 없이 느껴진다. 활주로가 짧다. 폭도 45미터로 통상 착륙하는 활주로에 비해 좁다.. 홀딩을 대비해 더 채워 넣은 연료와 예상보다 빨라진 착륙으로 인해 소비하지 못한 연료로 인해 항공기는 최대 착륙 중량 제한치에 가깝다. 시정도 1000미터 정도에 불과하다. 어느 조건 하나 좋은 게 없다. 이경우 터치다운은 정확한 위치에 정확한 속도로 이루어져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착륙 직전이라도 복행 해야 한다. 억지로 착륙을 할 경우 과도한 브레이크로 인해 타이어가 Deflate 될 수도 있는 상황이다. 널뛰는 출력과 항공기의 피치. 흡사 정신 나간 사람처럼 바람 속에서 비행기도 춤을 추고 조종간과 트로틀 레버를 잡고 있는 조종사도 춤을 춘다. 누구도 웃지 않는 Dance Time.. 이미 담 약한 승객들이 내지르는 비명이 환청으로 들리는 듯하다.

착륙.
직전까지 미친 듯 춤을 추며 활주로 상공으로 들어서던 항공기는 언제 그랬냐는 듯 정적 속에 마치 시간이 잠시 정지한 듯 사뿐하게 내려앉았다.. "Speed Brake Up, Reversers Normal", 착륙 후 감속장치들이 정상 작동되고 있다는 부기장의 복창이 귓바퀴를 맴돌 즈음 처음 느끼는 감각은 머릿속의 카타르시스 그리고 이어지는 허리의 통증. 격렬한 댄스 후에 찾아온 날카로운 감각. 그래도 이제는 지상이다. 격렬한 댄스타임은 이미 끝이 났다. 그리고 이어지는 동료들의 축하. 아직 택시 중인데 아주 껴안고 키스까지 할 기세들이다. ㅋㅋ

게이트에 들어서는 항공기.
일본인 여성 지점장이 이제 막 게이트 옆 브리지로 미끄러지듯 들어서는 777항 공기 조종석의 창문 너머 기장을 향해 환한 미소와 함께 연신 90도로 인사를 한다. “흐흐흐. 이분들 오늘 우리 모두와 함께 퇴근이 무척 늦을 뻔했어” 모두들 같은 생각인지 3명의 조종사 얼굴에도 마치 소년들 마냥 짓궂은 웃음이 가득하다. 그리고 그날 밤 이들은 아주 길게 나리타 시내의 선술집에서 또 하나의 무용담의 탄생을 축하하며 술잔을 기울인다. 아주 오래 기억될 우리들의 젊은 날을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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