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려움에 대하여
저는 어릴 적부터 세상 사람들이 말하는 약간의 ‘영성’이 있어서 고생을 하였습니다.
밤에 잠을 자면 악몽을 꾸는 날이 많았고 잠을 깨고 일어나 보면 꿈에 보았던 그 모습이 그대로 저의 망막에 남아서 어린 아이인 저를 힘들게 했습니다. 잠을 잘 때는 늘 플래시를 가지고 자야 했고요. 이런 저를 치료하고자 부모님은 여러 가지 시도를 하셨지만 별 효과도 없이 결국 잠을 자지 못하며 몸이 약해지는 저를 마지막으로 데려간 곳이 대전의 보문산에 있던 한 교회였습니다.
방주 기도원이라고 불렸던 곳으로 기억합니다. 저는 이곳에서 단 하루의 안수 기도를 받고 병이 기적적으로 나았습니다. 전도하려는 의도는 아니니 의심은 말아주시길 …ㅋㅋ
이 이후에는 악몽을 꾸지도 더 이상 밤거리를 바라보아도 환영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전에 어두운 곳을 바라보면 ‘사람들’이 보였거든요. 그것이 실제 귀신이었는지 아니었는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제가 국민학교 고학년쯤 되었을 때 어느 날 잠을 자다 다시 악몽을 꾸고 깨어난 후에 어릴 적 저를 괴롭히던 상황이 다시 벌어졌습니다. 제가 바라보는 벽에 꿈에 보았던 그 모습이 그대로 투사되어 있었거든요.
순간 아직 어린 나이었지만 저는 속으로 이번에도 제가 무서워 이불속에서 어머니를 불러 불을 켜달라고 소리를 지르기만 한다면 또다시 이 환영에 시달림을 받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불을 걷어내고 일어서서 한발 한발 이글거리며 저를 노려보고 있는 환영을 향해 나아가며 저는 소리를 질렀습니다.
“난 네가 더 이상 무섭지 않아! 너는 실제 하지 않아!”
그리고 그 코앞까지 다가가 손을 들어 내리쳤습니다.
그 순간
이글거리듯 불타오르던 환영은 영화의 한 장면처럼 저의 눈앞에서 마치 유리 화병이 깨지듯 산산조각이 나서 흩어지고 환영에 가려 그간 보이지 않던 벽이 저의 손밑에 드러났습니다.
이 경험은 지금도 저에게 이 세상을 바라볼 때 중요한 기준이 됩니다.
두려움은 나의 밖에 존재하는 대상이 아니라 내 마음속에 이미 들어와 있는 것이다. 그 두려움을 회피하고 도망치면 결코 사라지지 않으며 언제나 가장 약한 순간에 나를 다시 찾아온다. 두려움을 이겨내는 방법은 오로지 단 하나 맞서 그 두려움이 허상이라는 것을 나의 몸과 눈으로 확인하는 것이다.
인생을 살면서 우리는 많은 두려움을 맞닥뜨립니다. 조종사가 되고 싶은데 그러자니 지금 누리고 있는 이 현실을 포기해야 하고 일이 잘못될 경우엔 다시는 이 정도의 호사도 누릴 수 없는데라는 두려움과 비행교육에 들어가 내가 잘 해낼 수 있을까 하는 두려움. 과연 우리가 일본의 경제 제재를 잘 이겨낼 수 있을까 하는 두려움.
이 모든 두려움은 사실 우리의 밖에 존재하는 환경이 아닙니다. 그저 우리의 마음속에 자리 잡고 있는 시도 해 보지 않아서 그 크기를 알지 못해서 느끼는 공포입니다.
두려움을 이겨내는 방법은 단 하나 그것이 감정이라는 것을 이해하는 것입니다. 저는 한국에 있을 때는 일부러 이것을 확인하기 위해 강화도까지 막차를 타고 들어가 강화대교에서 남쪽 초지대교까지 4시간이 넘게 밤새 깜깜한 해안도로를 혼자서 걸어본 일도 있습니다. 이때 느끼는 공포는 상상을 초월합니다.
“아, 내가 가지고 있는 공포라는 것이 이렇게 강렬할 것이구나!”
그때 다시 한번 공포가 무엇인지를 확인할 수 있어서 좋았습니다. 공포는 내가 모르기 때문에 생기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것을 직접 경험해 보는 것 외에는 해결 방법이 없습니다. 타인의 설명을 아무리 들어도 공포는 해결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 공포는 우리 밖에 있는 환경이 아니라 우리 마음속에 자리 잡고 있는 상상이 만들어 낸 허구이기 때문입니다.
제가 그러했듯이 용기를 내고 맞서지 않는 한 공포와 두려움은 결코 이겨낼 수 없는 것입니다. 직접 손으로 내리치셔야 그 가려진 이면 곧 실체가 비로소 보입니다.
왜냐하면
공포는 바로 당신 자신이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