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지랖과 친절함 사이
결혼을 하면서 운영하던 개인 카페를 접고, 남편이 일하는 도시로 오게 되었다. 아는 이 하나 없는 낯선 곳에서 적응을 하려니 쉽지 않았지만, 원체 여행을 좋아하고 혼자 잘 돌아다니는 성격이라 조금 익숙해질 즈음이었다. 나이가 있어 2세 계획을 서둘렀는데 선물처럼 허니문 베이비가 찾아온 것이다. 신혼을 즐길 새가 없어 아쉬운 마음도 있었다만 이미 노산이었던지라 제때 엄마, 아빠를 만나러 온 뽀송이가 기특할 따름이었다.
그러나 36년을 제멋대로 먹고살던 인생이 엄마가 되기란 쉽지 않았다. 등산을 좋아해서 매주 두세 번씩은 등산을 할 만큼 활동적이던 내 몸이 내 몸 같지 않았다. 계속 서서 음료를 제조해야 하는 카페일을 하면서도 마감 후, 등산을 할 정도로 체력이 좋았는데 종일 잠만 오고 그렇게 피곤할 수가 없었다. 평소 활동량의 반도 움직이지 않았는데 산부인과 정기검진 때 경부길이가 짧으니 조심하라는 얘기를 들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전대미문의 팬데믹까지 터져 임신 중기부터 외출조차 마음대로 할 수 없었다.
겪어본 적이 없던 전염병에 대한 공포는 상상 이상으로 컸다. 꼭 가야 하는 병원 정기검진이 아니고서는 집 밖을 나서지 못했다. 혼자 몸이었어도 두려웠겠지만 나에게는 어린 생명이 자라고 있었기 때문에 더욱 무서웠다. 이렇게 혼란한 시국에 아이를 낳는 게 과연 옳은 일일까란 근원적인 질문도 들었다. 임신으로 인한 호르몬 변화까지 겹쳐 나는 제법 우울한 시간을 보냈었던 것 같다.
살면서 내가 엄마가 된다는 그림을 한 번도 그려본 적이 없었다. 비혼, 딩크는 아니었지만 나와는 먼 얘기라고 생각했다는 게 맞겠다. 평생 덕질만 하며 살 줄 알았는데 지방 사람치고는 늦은 나이에 결혼과 임신을 한 내 모습에 지인들도 사뭇 놀랐다. 우스갯소리로 내가 응원하던 야구팀의 우승보다 내 결혼이 빨랐다는 축하화환을 결혼식에 선물하겠다는 걸 말렸다. 그들은 나를 보기 위해 멀리서 내가 사는 곳까지 와줬고, 예전처럼 시답잖은 농담을 주고받으며 예비 엄마가 아닌 내가 나로서 버티는데 큰 힘이 되어줬다. 그때 내가 원했던 건 걱정과 조언이 아닌 있는 그대로의 나와 살아온 방식을 존중해 주는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오히려 나를 힘들게 했던 건 미혼이 아닌 기혼유자녀 지인들이었다. 본인이 먼저 경험해 봤으니 뭔가라도 알려주고 싶은 마음은 이해하지만 표현이 틀렸다는 걸 그들은 몰랐다. 임신 초기 지인의 집에 초대를 받아 갔는데 족발과 콜라가 놓여 있었다. 평소 탄산음료를 전혀 먹지 않던 나였지만 족발을 먹다가 텁텁해서 그냥 한 모금 들이켰는데 그걸 보던 지인이 '아무거나 막 먹네?' 하는 게 아닌가. 너무 어이가 없어서 말이 나오지 않았다. 콜라가 아무거나였다면 임산부를 생각해서 다른 걸 놓아줬어도 되는 게 아닐까. 게다가 나는 식단관리를 꽤 철저히 하는 편이었다. 임신 전이나 임신 중인 그때나 밀가루, 튀긴 것, 액상과당을 전혀 즐기지 않았고, 야구를 보며 한두 잔씩 먹던 맥주를 포함한 각종 술도 다 끊은 상태였다. 무리가 가지 않는 선에서 산책도 하며 나름 잘 지내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왜 그런 무례한 말을 들어야 했을까.
그녀는 굳은 내 표정을 보고 실언을 했음을 깨달았는지 탄산을 먹다 임신중독이 온 동료가 있다며 말을 이었지만, 그랬다면 콜라를 내 앞에 두지 않았어야 했던 것 같다. 그녀가 그런 말을 할 만큼 우리는 가깝지 않았고, 걱정이 되어서 그랬다면 다른 방식으로 말을 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종종 오지랖과 친절함 사이를 혼동할 때가 있다. 분명한 건 내가 알려주고 싶은 무언가가 있다면 친절하게 포장해야 불쾌한 오지랖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 자리는 불편한 내 마음처럼 껄끄러웠고 한동안 그녀를 만나지 않았다. 하지만 그때는 몰랐다. 그것이 오지랖의 서막인 줄은. 미혼 때는 몰랐던 결혼과 임신, 출산을 통해 수많은 이의 고나리를 접하게 될 줄은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