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 추운 밤

by 김호양이

자판기, 누를까? 말까?

버스는 약 네 시간을 달려 나를 비엔나에 데려다 주었다.

이제 남은 시간은 비엔나에서의 두 밤뿐이다.

돌아가야 한다는 생각이 머릿속으로 밀려들지만

나는 그걸 막아내려고 애쓴다. 돌아가는 일은, 돌아가는 날 생각하면 된다.

오는 날이 장날이었다.

미리 공부한 대로 트램을 타고 시내를 한 바퀴 돌아 제자리로 올 예정이었는데

20분을 넘게 기다려도 트램은 코빼기도 보이지 않고

어디선가 시작된 소란한 소리가 점점 가까워지더니

갑자기 사람들의 장대한 행렬이 에너지를 뿜으며 내 눈앞에 나타난다.


마라톤 대회였다.

남,녀,노,소...자유분방하고 쾌활한 아마추어 마라토너들의 행렬은 아무리 기다려도 끝나지 않는다. 비엔나 인구가 이렇게 많았던가?

아침에 체코에서 내리기 시작한 비는 아직도 그치지 않은 채 매서운 비바람으로 변해 있다.

사람의 행렬이 다 지나가고 트램이 다시 도시를 유영하기 시작한 건

추위에 떨던 내가 비엔나 소시지를 사서 호텔로 들어가기로 마음먹은 뒤다.

꽤 많은 길거리 음식 중에 비엔나소시지를 택한 건 너무 자연스러운 과정이었다.

비엔나에 비엔나커피는 없다지만 비엔나소시지가 있으니 선택할 수밖에.


따뜻하게 구운 비엔나소시지와 갓 튀겨낸 감자튀김을, 행여 식을 새라 가슴에 품고 숙소로 돌아오는 길, 독한 술 한 잔이 생각난다. 뼛속까지 스며든 추위와 비엔나소시지와 감자튀김이라는 세 종류의 안주를 하나로 녹여 줄 뜨거운 술 한 잔.

토요일 밤이라 가게들은 일찍 문을 닫았지만, 아까 시내로 나가면서 봐 둔 데가 있다. 수십 개의 자판기가 24시간 동안 알아서 장사를 하는 가게였는데, 그 자판기 중에 술 자판기까지 있으면 ‘정말 멋쟁이!’라고 엄지척을 해 줄 용의가 있다.

아, 정말 멋쟁이!

술 자판기가 있다. 양주, 보드카가 병째로, 콜라를 넣은 칵테일 캔, 맥주, 뭔지 모를 불그스름한 술병들... 참 종류도 다양하네? 흡족해서 흝어보고는 이것저것 아이콘을 눌렀다가 취소하고, 또 살펴보고, 다시 다른 스위치를 눌르던 끝에, 성인인증을 해야 하는 절차가 있다.

아, 이런 게 제일 귀찮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도해 본다. 그럼, 나는 어엿한 성인이고말고...'

그 귀찮은 절차를 통과하고 또 술을 골라 이것저것 골라보던 끝에...

이런 자판기가 스무개쯤 들어서 있고 24시간 문이 열려있는 가게


그냥 돌아선다. 뭔가 적당하지가 않다. 상다리가 부러지게 차려진 밥상을 대하고도 허공에 정지했다가 그냥 내려진 젓가락의 모습이다. 지금의 내가.

숙소로 돌아와 생각해 보니, 아마도 내가 원한 건 소주나 고량주였던 것 같다. 마음 속으로 그걸 원하고 있으니 알록달록 다양한 비엔나의 술병들이 성에 차지 않았던 거다.

뜨러운 술 대신 뜨거운 K드라마를 보며

아직 온기가 남은 비엔나 소시지와 감자튀김을 흡입한다.

그래, 어정쩡한 걸 택하느니 이러는 편이 낫다.

가슴에 꼬옥 품고 온 비엔나소시지와 감자튀김. 아직 온기가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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