떼엉적 시선, 떼엉의 해석된 바로는
출근길 15분 남짓 숙대 언덕을 내려오면서, 어딘가 길게 느껴질 때마다 드는 생각이 있다. ‘거주지와 도보 간 적정 거리는 얼마일까, 좋은 거주지의 요건은?’ 그럴 때마다 숙대 인근이 품기는 동네의 이미지를 떠올려본다. 캠퍼스 타운, 여대생들, 떡볶이 가게가 종류별로 있고, 교회가 곳곳에 있으며 언덕 어귀가 조용한 동네. 나는 도시의 인상을 ‘도보 간 적정 거리’라는 다소 딱딱한 단어로 정의했다. 반면 <페스트>에서 카뮈는 도시가 풍기는 느낌을 ‘낌새’라고 부른다.
... 그와 반대로 오랑은 아무리 보아도 낌새가 없는 도시, 즉 완전히 현대적인 도시다
13p <페스트, 카뮈>
다른 도시에서 느껴지는 이질적인 격차, 그 도시만의 문법이 적용되는 ‘질감’이 있다. 해외여행에서 동전을 만지작거리다 보면, 장난감처럼 가벼운 것들이 있고 유난히 각지고 묵직한 것들이 있다. 카드를 들고 다녀 동전을 만질 리 없는 평소엔 느껴보지 못한 이런 일상의 뒤틀림 말이다. 소설 페스트에 등장하는 오랑은 낌새조차 느낄 수 없는 일명 무덤덤한 도시인 것이다. 번외로, 남녀가 성행위에 푹 빠져버려 서로를 탕진하곤 ‘어떤 방식으로 사랑하는지’ 조차 설명하기 힘든 곳이라는 것이다.
이런 작가만이 쓰는 말투와 단어를 ‘-의 해석된 바로는’이라고 부르고 싶다. 작가라 하면, 늘상 건네는 이야기도 그 이의 시선으로 각색되어 달리 표현할 수 있는 능력이 요구된다. 다양한 책을 읽고, 견해를 넓혀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서 나온다. 작가의 개별적인 말하기 방식과 표현들을 배우고, 익히기 위해서이다. 어쩌면 그 작가만의 화법과 어투는 기존의 의미로의 확장, 예로 들면 ‘카뮈적 시선’ 일수도 있겠다.
요즘엔 가장 노래를 잘하는 사람은, 가장 그 이의 말투로 노래를 부르는 사람인 것 같다. 가끔 김광석 노래를 들으면 은율과 멜로디보다는, 메시지에 집중하게 된다. 이 사람이 어떤 얘기를 하고 싶은지 찬찬히 듣게 된다. 좋은 글도 마찬가지로, 가장 그 이의 말투가 녹여내 말하고자 하는 바를 호소력 짙게 전달하는 게 아닐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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