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크스주의자들의 여성해방론'를 읽고
문득 이런 질문을 받은 적이 있다.
‘**씨는 누군가를 진심으로 좋아한 적이 있나요?’
이 질문에는 막힘없이 답변이 나올 수 있었다. 보기만 해도 감정을 주체할 수 없고, 스스로 알 수 없는 이유로 누군가를 찾는 모습. 그것을 나는 사랑이자 좋아함이라 정의하고 있었다. 이 생각이 스치면서 나에게는 문득 이런 질문이 떠올랐다.
‘나는 가족을 진심으로 좋아하는가?’
오늘 소개할 책 ‘마르크스주의자들의 여성해방론’은 책 이름에서 느껴지는 무거움과는 다르게, 짧고 긴 글들의 저작선으로 20세기 러시아혁명 당시 유명한 활동가의 글들이 모여 다양한 생각할 거리를 제공하는 것이 특징이다. 당시의 열악한 여성 대중을 조직하고자 했던 그들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고, 지금과 당시의 관점의 차이를 확인하여 우리 모습을 다시 되돌아볼 수 있는 것이 흥미로운 부분이다.
이 책은 여러 고민 지점을 2021년 대한민국 사회에도 제시해 이야기해볼 부분이 많긴 하나, 나는 오늘 한 가지 주제를 가지고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
우리가 당연하게 생각하는 부분.
다른 모든 이들은 사라져도 내 곁에 꼭 있을 사람들이라 믿는.
‘가족’에 관해서이다.
처음에 스스로 던졌던 질문. 가족을 진심으로 좋아하냐는 나의 의문에, 스스로 꽤 당황하였다. 이런 고민이 필요 없을 만큼 평소에 당연하다고 마음속에 품은 결과이기도 하겠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면 꼭 그렇다고 볼 수 없는지도 모른다는, 약간의 두려움이 있기도 했기 때문이다.
물론 가족은 온몸으로 표현해도 모자를 정도로, 진심으로 감사함을 느끼고 있는 사람들이다. 하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그들을 진심으로 좋아하고 있냐는 질문에, 나는 왜 쉽게 대답을 할 수 없는 것일까.
활동가 중 한 명인, ‘알렉산드라 콜론타이‘는 토대의 변화를 통해 가정의 불평등을 변화시킬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공업 등 산업의 발달을 통해 가정에서의 부가가치 생산이 점차 어렵고 여성들의 노동 현장 진출이 확산이 필수 불가결해짐에도, 가사노동의 업무는 여성에게 부여되는 현 상황이 부적절하다는 이야기이다. 그는 가사노동만 전담하기만 하면 되었던, ’정치적 무권리‘ 상태보다 현 상황이 더 좋지 않음을 지적하며, 변화의 필요성을 설파하였다.
그의 주장이 흥미로운 점은 여기서부터 시작한다.
그는 변화의 결과 중 하나로 가족제도의 변화 혹은 파괴를 꼽았다. 기존 기득권층의 시스템으로는 우리가 원하는 진정한 혁신이 시작될 수 없음으로, 구소련이 추진하고 있었던 재생산노동의 사회화 정책 등을 확충하고 가족을 대체하는 새로운 집단을 만들자는 주장이었다.
이러한 주장은 사회적 정책을 수립하고 집행하는 정치가들의 입장에선 당연하지만, 가족을 대체하여 좀 더 발전된 집단을 만들자는 주장. 이는 가족을 기본 사회조직으로 생각하고 있는 우리에겐 꽤 큰 충격을 주는 이야기이다.
단순히 어느 활동가의 급진적인 주장. 100년 전 다른 나라의 이야기로 치부할 수도 있겠으나, 내가 그의 주장을 그냥 흘려들을 수 없었던 것은 역사적인 측면과 이념적인 측면이 동시에 있다.
역사적으로 당시 러시아는 타 유럽 대륙 국가들과는 다르게 공업 등이 발전하지 않은, 낙후되어있던 국가였다. 혁명과 내전 등의 혼란으로 산업기반이 초토화되었을 때, 국가 중심의 발전으로 이를 극복하고자 하였던 전례가 있다. 나는 이 모습이 전쟁으로 초토화된 한국이 국가 중심의 계획경제를 통해 발전하는 모습과 상당 부분 유사하다고 생각했다.
또한 이념적인 측면에서 과거의 보수적인 생각과 새로운 관념이 공존하고 있고 이들이 충돌한다는 측면에서도, 타 국가의 이념 대립과는 다른, 한국의 그것과 상당히 유사하다고 생각이 들었다.
그의 통찰 속에서 내가 빠뜨릴 수 없는 것은 사랑과 소유욕의 관계를 정립해 나간 것에 있었다. 그는 자본주의 사회가 개인주의·배타적 사유재산이라는 승자의 원칙을 만들었으며, 자신의 것을 내어주지 않고도 ’위대한 사랑‘에 빠질 수 있다는 착각을 불러일으킨다고 한다.
그렇기에 누군가를 통제하고 소유함으로써 사랑을 쟁취하겠다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다는 것이 일반화되어 있다고 한다.
그러나 책 속에서 말했듯이 서로의 감정까지 통제하는 이러한 사랑의 모습은, 중세 시절에는 찾아보기 힘들며 오히려 근대가 되면서 만들어진 관념이라는 사실은 우리가 생각하는 사랑의 형태를 다시 한번 고민하게 만든다.
우리는 서로의 연락이 끊임없이 이어져야 하며, 서로의 이성 관계를 ’깔끔히‘ 정리하여야 하며, 서로를 끊임없이 원하는 방식의 사랑을 일반적인 연인의 모습이라 생각한다. 이러한 귀속 욕구를 쫓아가는 사랑이, ’진정한 사랑‘인지 의문을 표해보는 것도 좋을 듯하다. 관계 속에서 정의되는 나가 아닌, ’개인‘으로서의 나를 생각하면서 말이다.
콜론타이는 가족제도로 대표되는 결혼에 대해서도 부정적인 입장을 취했는데, 이와 관련된 개인적인 일화가 있다. 결혼가 동거의 중간 단계이며 법적인 보호를 하는, 시민결합제도(PACS)가 잘 되어있는 프랑스의 한 커플이 나오는 다큐가 있었다. 그들은 아이를 양육하고 있는 커플인데, 여성은 인터뷰 중 ’아이가 원하지 않는 이상 결혼을 할 생각은 없다‘라는 이야기를 꺼냈었다. 이 인터뷰를 처음 볼 당시 그의 발언이 이해되지 않았었다.
’결혼과 거의 유사한데 왜 하지 않을 것인가?‘
그러나 콜론타이의 글을 보며 그 이유를 조금이나마 추측해볼 수 있었다. 내가 그 당사자라면 서로를 얽매고 서로의 영역을 과도하게 침범하는 그 결혼제도가 싫은 것이 아니었을까?
’물보다 진하다는‘ 가족이든 결합 후 만들어지는 가족이든, 우리 사회는 가족을 해체할 수 있는 것이 가능할까? 한국 사회는 나름 재생산노동의 사회화가 진행됐지만, 가족제도는 유지가 되고 있다. 우리의 인식과 제도의 변화가 어느 정도 이루어져야 가능한 전제인지는 쉽게 알 수 없다.
다만, 가족이 필수적인 무언가가 아닐 수 있다는 가능성은, 왜 쉽게 가족을 좋아한다는 말이 나오지 않는 것인지에 대한 답이 될 수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