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연자에게 필요한 건 ‘콘텐츠’가 아니라 ‘구조’다

100장 슬라이드보다 더 필요한 것

by Sung


난 10년째 한 대학에서 하는 강연 프로그램의 행사의 섭외 진행을 맡고 있다. 매주 진행되는 강의이다 보니, 대학의 예산에 맞게 매주 새로운 주제를 가진 다양한 강사를 섭외하는 게 쉬운 일만은 아니다. 시간이 갈수록 이 강의 한 시간이 누군가에겐 인생을 바꿀 수도 있는 키가 될 수도 있단 사실을 경험적으로 알게 되면서, 되려 더 책임감이 무거워지고 심사 숙고 하게 된다.

내가 강사를 섭외하는 경우도 있지만, 강의 기회를 얻기 위해 나에게 제안을 주는 경우도 많다. 어떤 전문영역이나 특정 경험을 가진 사람들은 자신의 이야기를 꺼내며, "제가 할 얘기가 진짜 많아요"라고 자신 있어한다.

하지만 아쉽게도, 그렇게 스스로의 스토리에 자신이 있는 많은 분들이 정작 자신의 스토리를 구조가 잘 잡힌 강의로 만들어 내는 경우는 잘 못 봤다. 오히려 하고 싶은 말이 너무 많다 보니 시간에 쫓기거나, "그래서 뭘 말하고 싶은 거지?"라는 생각이 드는 경우가 더 많았다.


강연 에이전시를 운영하다 보니 좋은 점은 강의 전에 강의안을 먼저 받아본다는 점인데, 사실 이제는 강의안만 봐도 이 강연이 청중에게 어떤 반응을 얻을지, 어떤 부분에서 청중이 좋아할지 감이 오게 된다.

조금 더 자세히 얘기하자면, 강의안 자체에는 크게 무언가를 드러내지 않아도 한 장 한 장 넘기면서 나도 모르게 스토리에 몰입되고 다음장이 기대되고, 이것이 잘 정리된 귀결로 마무리된 강의안들은 백이면 백, 반응이 좋다. 이런 강의안 들은 내가 일부러 따로 저장해 놓고, 레퍼런스를 삼기도 한다. 그들의 강의는 명확한 흐름과 구조를 가진다. 몇 마디 단어만으로 청중을 이해시키고 마음을 움직이는 포인트가 명확하다. 언변력이 좋지 않고, 대단히 말발(?)이 있지 않더라도 이런 강의는 강사와 청중이 이미 강의 내용에 함께 몰입되기 때문에 충분히 좋은 반응을 얻어낸다.


반면에 100장이 넘는 슬라이드, 직전까지 수정되는 강의안을 보내는 강연자들은 하고 싶은 말이 너무 많아 열거에 그치는 경우가 많다. 그들의 내용은 풍부하지만 지저분하고 빡빡하다. 몰입이나 설득력이 부족하면 청중은 으레 딴짓을 하기 마련인데 그런 청중의 관심을 가지게 하겠다고 오히려 과장된 표현이나 제스처를 쓰게 되는 불상사까지 발생하기도 한다. 이런 경우는 뭔가 많이 이야기한 거 같은데 서로 간에 찜찜함만 남는다. 청중은, 코스요리를 먹으러 온 손님과 같다. 그들은 얼마나 많은 재료를 쓰고 얼마나 귀하게 구했는지는 사실 딱히 관심이 없다. 그저 그 재료 하나하나 잘 융합되어 하나의 완성품이 되어 내 혓바닥에 닿았을 때 느껴지는 식감과 맛, 풍미가 중요한 것처럼- 이 강의란 것 역시 그 사람의 대단한 백그라운드 자체가 아니라 그것이 엮어낸 구조적인 스토리를 귀로 듣고 눈으로 보며 한 템포 한 템포 자신에게 어떤 공감을 주고, 어떤 유익함을 전달하고, 어떤 교훈을 전달하는지 자신에게 체감되는 것을 기준으로 평가한다.

인풋이 아니라 아웃풋이 중요하다는 이야기다. 좋은 강사는 어떤 소재의 인풋이든 좋은 아웃풋을 만들어 내는 사람 이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진짜 좋은 강의의 본질은, 콘텐츠의 양이나 질이 아니라 그것을 엮어낸 구조이다.


1. 왜 지금 ‘구조’가 중요해졌는가


코로나 이후 온라인 강의 시장은 폭발적으로 커졌고, 학습의 개념은 직무를 넘어 삶 전체(감정관리, SNS·부업, 육아, 라이프스타일, 자기 브랜딩 등)로 확장되었다.

이 확장은 두 가지 결과를 가져왔다.

강의의 진입장벽은 낮아졌다. 누구나 카메라 하나로 온라인강의를 만들 수 있고, 단순 경험 기반의 강의도 넘쳐난다.

그러나 경쟁은 훨씬 치열해졌다. 비슷한 메시지와 구성의 강의는 너무 많다. 내용만으로는 차별화가 사실상 어렵다.


이 변화 속에서 청중이 강의를 선택하는 기준은 ‘무슨 내용을 말하는가’가 아니라, ‘이 사람은 그 내용을 어떤 세계관과 구조로 바라보고 해석하는가’로 이동했다.


2. 콘텐츠는 쌓이지만, 구조는 만들어야 한다


경험과 지식은 시간이 지나면 자연스럽게 쌓인다. 하지만 그 경험이 강연자만의 시그니처가 되려면 반드시 구조가 필요하다.


우리는 전 회차에서 강연이 '브랜드'가 되어야 하고, 자신만의 '결'과 '철학'을 가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하지만 이 결철학은 강연 안에 녹아들지 않는다면 그저 관념에 불과하다.


내가 가진 가치관과 결을 청중에게 전달하고 강의에 완벽히 녹아들게 만드는 것은 콘텐츠의 양이 아니라 바로 '구조'이다.


구조는 강의의 '뼈대'이자 강연자의 '세계관'이다. 이는 단순히 순서를 정하는 작업을 넘어, 그 사람이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과 이야기가 어디에 중심을 두는지 보여주는 '틀'이다.

무엇을 우선순위로 두는가

무엇을 문제로 보는가

어떤 방식으로 해결하려 하는가

이것이 바로 구조이다.


좋은 구조를 가진 강연자는 많은 이야기를 하지 않아도 설득력이 생긴다. 자신의 구조적인 스토리텔링에 빠져들며 큰 맥락을 가지고 이야기하기 때문에 메시지가 일관되고, 청중은 “이 사람의 결”을 명확히 느낀다.


언젠가 유튜버 "머랭하맨"님의 강의를 들은 적이 있다. 그는 8년간 자신의 유투버가 잘 안 되다가 어느 순간 이대로는 안 되겠다는 마음으로, 새로운 시야를 가지고 새로운 콘셉트로 다시 도전했고, 자신만의 장점과 끼를 살려 만든 콘텐츠가 대박이 나면서 흔히 말해 떡상을 했다는 이야기를 했다. 대체로 이런 류의 서사를 이야기하는 강사들은 "얼마나 고생을 했고, 얼마나 실패했는지"를 열거하는 이야기를 주로 하는데에 반해 "머랭하맨"님은 자신이 지금 컴포트존에서 못 벗어나고 있는 것은 아닌지, 그 과정 속에서 착각하고 있었던 게 무엇이었는지, 그것이 유튜브뿐만 아니라 일상 속에서도 이런 착각이나 관념 때문에 모든 게 머물러있었던 게 아니었는지 의심하기 시작하였다며 "자신만의 방식으로 이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고민했던 이야기와 해결하려던 방식"에 대해 설명했다. "그저 열심히 하다 보면 언젠가는 잘 되겠지" 하는 마음에 머물렀던 것이 결국 오랜 부진의 답이었다는 말을 듣고, 나 역시 그런 마음으로 그저 버티는 게 문제였나 하는 물음을 갖게 되었고 지금도 종종 내 맘 속에서 나에게 묻는 질문이 되기도 하였다.

그러니까 애초에 섭외를 할 땐, "머랭하맨"의 성공스토리 같은 강의를 기대했었지만, 그가 한 가지 일을 꾸준히 해내가기 위해 겪었던 물음과 대답을 찾는 과정의 스토리가 주였고, 그런 이야기는 모든 사람에게 동일한 공감을 주었고 자신의 삶을 투영하도록 만들어주었다. 그는 강의 내내 쑥스러워하고, 자주 삼천포로 빠지긴 했지만 그 마저도 그 전체적인 이야기의 서사와 너무 잘 맞아떨어져서 딱히 그 요소가 방해가 되진 않았던 것 같다. 그리고 그 후로도 그가 올리는 영상들을 보면, "좀 더 도전하고 있구나""그저 열심히가 아니라, 좀 더 나답게 만들려고 노력하는구나" 같은 게 보였다.

그의 강의를 듣고 나는 이제 그의 결을 알게 되어서, 더 응원하게 된 팬 중에 하나이기도 하다.


만약 그가 그날 "유투버로 성공하는 법""떡상하는 100개의 콘텐츠" 같은 이야기를 강의했다면, 모객은 더 잘 되었을지 모르겠지만 과연 내가 그의 팬이 될 수 있었을까?



3. 나는 연사를 섭외할 때 무엇을 보는가


나는 강의 에이전시를 운영하며 수많은 연사를 직접 선택해 왔다. 처음엔 그들의 시류적 화제성이나 유명세를 기준으로 섭외를 해왔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조금 회의감이 들었다.

유명하다고 해서 강의를 다 잘하는 것 도 아니었고, 유명하지 않아도 정말 내실 있게 강의를 잘하는 강사는 너무 많았다.

내가 그들의 강의를 모두 보고 판단하며 섭외를 할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이제는 정확하게 가지고 가는 기준점은 분명히 있다.

이 사람이 가진 '구조'가 명확하고, 그 위에 '철학'이 서 있는가?


그 사람이 어떤 과정을 거쳐 지금의 메시지에 도달했는지, 어떤 문제의식을 오래 붙들고 살아왔는지, 경험이 어떻게 정리되고 해석되어 있는지. 나는 내가 찾아낼 수 있는 정보 내에서 최대한 검증을 거친다. 그리고 가급적 그들의 강의안이나 강의영상들을 검토하며 확인한다.

분명한 건 이 구조가 분명한 사람만이 청중에게 감정 터치를 만들 수 있고, 그것만의 좋은 강의로 평가받는다.


사실 강의에이전시 대표이긴 하지만, 나도 청중 앞에서 이야기할 경우가 가끔 있는데 정말로 구조적으로 잘 짜인 강의를 하다 보면 업계의 속된 말로 "그분이 오셨다"는 느낌이 들 정도로 나도 모르게 말을 너무 잘하게 되는 경우가 있다. 이럴 땐 강의를 하면서도 내용이 더 잘 정리되고, 생각지 못했던 정확한 표현이나 예시들이 나와서(흔히 말해 애드리브가) 실시간으로 청중과 공감할 때가 있다.

정말로 가사에 몰입해서 노래를 부르는 가수는 본인도 노래를 부르다 울컥하거나 표정변화가 자연스러워서 듣는 이의 마음까지 동하게 하는 것처럼, 강의의 구조와 내용에 몰입되면 강사는 발화하면서도 그 내용을 더 정렬하고 순간적인 구조화를 이루어낸다. 강의력이라 함은 그래서 말발이 아니라 제대로 된 구조적인 강의내용이 준비되었을 때 나올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스스로 구조적인 강의안을 가지고, 이를 통해 연단에서 몰입하여 강의하고 이것을 고스란히 청중에서 전달해 줄 수 있는 "진짜" 강의를 잘하는 사람을 섭외하려고 늘 검증하는 편이다.


4. 브랜드는 구조 위에서 만들어진다


요즘 강의 마케팅에서 "후킹"을 잡으려고들 다들 안달이 나있지만, 사실 진짜 강의브랜드는 어떤 후킹이나 화려한 카피나 디자인으로 만들어지지 않는다. 진짜 강의 브랜드는 그 사람이 일관되게 세상을 바라보는 구조에서 만들어진다.


구조가 있는 강연자는:

메시지가 흔들리지 않고

어디서든 같은 결로 이야기하며

자신의 세계관을 명확히 드러내고

강의를 생태계로 확장할 수 있다


콘텐츠는 복제될 수 있지만 그들이 엮어낸 서사의 구조는 복제될 수 없다. 그래서 구조는 강연자의 대체 불가능성을 만드는 본질이다.



결론: 그래서 강연자에게 필요한 건 콘텐츠가 아니라 ‘구조’다


콘텐츠는 누구나 만들 수 있다. 누구나 경험을 이야기할 수 있고, 누구나 강의를 하나쯤 찍을 수 있다.

하지만 구조는 누구나 가질 수 없다. 구조는 세계관이고, 브랜드의 출발점이며, 강연자가 오랫동안 살아남는 이유이다.


강연자에게 필요한 것은 많은 이야기가 아니라, 자신의 이야기를 흐름 있게 만들고 철학을 녹여내는 힘이다.


구조가 있을 때 강연은 콘텐츠의 홍수 속에서 대체 불가능한 '결'을 만들고, 청중에게 지식 이상의 '울림'으로 오래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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