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렌체 그리고 밀라노
감명 깊게 보았던 영화의 실제 배경이 된 장소로 떠나는 여행만큼이나 매력적인 휴가는 없을 것이다. 몇년 전 영화 <냉정과 열정사이>를 보았다. 영화 속 피렌체는 중세의 모습을 간직한 아름다운 도시였다. 쥰세이와 아오이 두 남녀의 10년간에 걸친 가슴 벅찬 사랑이야기가 더해져 매우 로맨틱하게 다가왔다. 영화를 보고 난 후 시간이 흘러 친구 두 명과 함께 영화의 배경이 되었던 피렌체와 밀라노를 포함해 로마까지 세도시를 여행했다.
이탈이아 여행은 긴 여운으로 남겼다. 여운을 달래기 위해 책 <냉정과 열정사이>를 읽었다. 작가 에쿠니 가오리와 츠지 히토나리가 각자 남녀의 시각에서 쓴 두 책을 단숨에 읽었다. 피렌체와 밀라노를 표현하는 문장을 읽을 때면 도시의 모습이 자연스레 떠올라 깊은 공감을 불러일으켰다. 직접 가본 곳이라 더욱더 생생하게 느껴지고 상상할 수 있었다. 여행의 기억과 설레임을 되살려 준 책 속의 문장들을 사진과 함께 모아 보았다. 이탈리아의 이국적이면서도 아름다운 도시의 매력을 느껴 보길 바란다.
“피렌체의 두오모는 따뜻해.”
그렇게 말한 사람은 페데리카였다.
“결혼한 지 얼마 안 돼서 같이 올라갔거든. 밀라노의 두오모 같은 장엄함은 없지만, 부드러운 색상에 사랑스럽고 따뜻했어.”
페데리카는 피렌체의 두오모를 ‘사랑하는 사람들의 두오모’ 라고 했다. 그녀의 사랑의 기억인 두오모.
피렌체의 두오모는 서로 사랑하는 사람들의 두오모야. 그렇게 말한 페데리카에게 사랑이란 이렇게 거대하고 고요하며, 흔들림 없는 것이었을까
-냉정과 열정 사이(Rosso) 중-
큰길로 나서자, 안개도 사라지고, 눈앞에 두오모의 둥근 지붕이 나타났다. 이 거리 사람들은 몇 세대 전부터 저 쿠폴라를 바라보며 살아왔다. 만날 수 있을까. 아니면...... 두오모가 점점 가까워질수록 큰 기대와 불안이 번갈아 밀려와 서로를 밀쳐냈다. 매일 이 거리를 걸었갔지만 평소와는 느낌이 달랐다. 기대해서는 안 돼, 하고 나를 향해 말해보았다. 만나지 못하는 건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십 년 전, 그것도 몽롱한 약속이었으므로 만나지 못한다 해도 나는 최후의 순간까지 쿠폴라 위에서 기다릴 것이다. 기다리면서 팔 년이라는 시간을 복원할 것이다. 그리고 아오이가 오지 않아도 나는 무너져버린 나를 스스로의 힘으로 재생시키고 당당히 내려올 것이다.
-냉정과 열정 사이(Blu) 중-
대리석 기둥에는 여기저기 낙서가 적혀있었다. 날짜, 이름,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의 이름. 나는 그것을 보고 미소짓는 자신을 느꼈다. 사랑하는 사람의 이름, 벽을 따라 천천히 걷는다. 적갈색 지붕들 너머, 저 멀리로 완만한 구릉이 보인다. 교회의 첩탑, 빨래가 널려있는 창, 올라온 계단의 정 반대쪽, 도시의 반대편이 내려다보이는 장소까지 걸어갔을 때, 내 눈이 한 점으로 빨려들어갔다. 그 사람이 한쪽 무릎을 세우고 앉아 있었다.
-냉정과 열정 사이(Rosso) 중-
세월이 어린 장소에 서면 늘 정겨운 냄새가 나는 것은 어째서일까. 내게 정겨운 장소인 것도 아닌데
-냉정과 열정 사이(Rosso) 중-
나는 성당 쪽 문을 통해 안으로 들어갔다. 그 순간 정겨운 냄새를 맡은 듯한 기분이 들었다. 아주아주 정겨운,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익숙한, 냄새라기보다 공기였다. 준세이의 냄새. 또는 그 시절의 우리들 냄새.
-냉정과 열정 사이(Rosso) 중-
이 관을 관리하는 사람이나 방문하는 사람은 시간과 함께 변화해갈 것이다. 나 또한 이 그림의 생명력 앞에서는 너무도 짧은 인생을 살아갈 것이다.
-냉정과 열정 사이(Blu) 중-
어느 날, 매일처럼 찾아와서 <대공의 성모자>를 바라보는 나에게, 사투르누스의 감사원이 그렇게 말을 걸어왔다.
“훔치고 싶을 만큼 좋아하지요.”
내가 이탈리아 어로 그렇게 말하자 그녀는 순간 몸을 긴장시키면서, 내가 여기서 지키고 있는 한 절대로 안 된다고, 손가락으로 나를 가리키며 말했다. 그리고 우리는 웃음을 터뜨렸다.
“라파엘로의 성모는 세계 최고라고 생각해요. 세상 사람들이 여기서 발걸음을 멈추는 이유가 있어요. 사실 난 라파엘로와 같은 우르비노 출신이죠. 그 거리에서 태어난 사람의 자부심이기도 해요. 여기서 그의 그림을 지키며 보내는 인생도 괜찮을 것 같아요.”
-냉정과 열정 사이(Blu) 중-
피렌체. 도시 자체가 하나의 거대한 박물관인, 아담하고 아름다운 도시. 그래서 관광업에 의지하지 않을 수 없는 운명을 걸머진 도시. 밀라노에서 불과 세 시간 거리라고는 여겨지지 않을 만큼, 전혀 분위기가 다른 도시다.
-냉정과 열정 사이(Rosso) 중-
이 곳은 중세 시대부터 시간이 멈춰버린 거리야. 역사를 지키기 위해 미래를 희생한 거리. 역사적인 미관을 손상하지 않도록 도시 전체가 보호받고 있다.
-냉정과 열정 사이(Blu) 중-
낮은 건물들만 가득한 피렌체 시가지에서 이 대성당은 너무도 고고하게 솟아 올라 있다. 오랜만에 그 웅장한 모습을 바라보며 새삼 감탄하고 마는 것이다. 이렇게 이 년이 지나 관광객의 시선으로 바라보자니, 그것은 고도에 군림하는 국왕처럼 위풍당당했다. 그러나 결코 화려하지는 않다 그 장엄한 외관은 밀라노의 대성당이 보여주는 화려한 미와는 대조적으로, 무척 겸손한 미를 가지고 있다.
-냉정과 열정 사이(Blu) 중-
두오모는 도시의 중심에 있었다. 도시의 비좁음에 비하면 너무도 큰, 그 압도적인 양감과 시간의 흐름이 알알이 새겨져 있는 대리석 벽. 빛바랜, 부드러운 핑크에 녹색이 섞인 색조인데도, 과묵하고 남성적으로 보인다.
-냉정과 열정 사이(Rosso) 중-
두오모는 피렌체의 거리 한복판에 우뚝 솟아 있어 어느 방향에서나 쉽게 눈에 뛴다. 하양, 초록, 분홍 대리석으로 장식된 대성당, 꽃의 성모 성당은 위엄과 우아함이 넘쳐흐르고, 올려다보는 사람을 압도해 버린다.
-냉정과 열정 사이(Blu) 중-
아침을 먹고 한 시간 정도 일찍 아파트를 나섰다. 산타 마리아 델레 그라치에 성당의 중정은 밀라노에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장소다. 네 그루 백목련과 네 마리 개구리가 분수를 에워싸고 있다. 기하학적으로 배치된 녹음. 회랑 돌담에 걸터앉아 소설을 마저 읽었다.
-냉정과 열정 사이(Rosso) 중-
산타 마리아 델레 그라치에 성당 곁에 있는 건물에 갔다. 그곳은 그 옛날 수도승의 식당이었다. 이 성당을 세계적으로 유명하게 만든 것이 이 작은 건물 속에 있는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최후의 만찬>이다. 마치 세균 연구 시설이나 원자력 시설을 연상케 하는 몇 겹의 문을 지나, 작고 기다란 체육관 넓이의 실내로 들어섰다. 그 옛날의 대식당이었다는 그 건물의 막다른 벽면에 그 그림은 당당한 자태를 드러내고 있었다.
-냉정과 열정 사이(Blu) 중-
두오모 앞의 광장에 서자, 그 장엄한 외관에 압도당하는 기분이었다. 정면에서 올려다보는 건물은 거대한 왕관처럼 보였다. 셀 수 없이 많은 첨탑들이 하늘을 향해 뻗어 있다. 그 때문인지, 피렌체의 두오모보다 한층 더 화려해 보였다.
내부로 들어가 보니 겉보기와는 달리 어두컴컴하고, 거대한 스테인드글라스가 엄숙한 공간을 연출하고 있었다. 외부와 내부의 이런 이미지 격차야 말로 중세 사람들의 위대한 상상력을 말해주는지도 모른다. 이곳을 방문하는 사람들이 처음에는 그 화려함에 얼을 빼고, 그리고 안으로 들어와서는 숭고한 신앙적 분위기에 압도당하도록 연출해놓은 것이다.
-냉정과 열정 사이(Blu) 중-
얼마나 아름답다고, 장엄하고, 멋지고, 건물 자체가 이미 조각 품인걸. 하지만 말이지, 뭐랄까, 밀라노의 두오모는 차가워. 사람을 거부하는 듯한 느낌. 밀라노 답기는 하지만.
-냉정과 열정 사이(Rosso) 중-
나날이 여름이 짙게 공기에 섞여간다. 유리창 너머로 보이는 거리도 밝고 시끌시끌한 색으로 물들어 있다. 광장에는 아이스크림을 파는 자판대가 등장하고, 탱크톱에 짧은 바지 차림의 사람들이 짧은 여름을 향유하려 두오모 위에서 몸을 태운다.
-냉정과 열정 사이(Rosso)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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