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나는 아버지를 미워하고 있는가
2020년 10월 26일 월요일 오전 8시 15분
차 별
극심한 차별이었다. 아버지는 늘 자랑처럼 4남매 온전히 4년제 대학 졸업시키고, 말썽꾸러기 같았던 자신의 늦둥이 동생을 그래도 공업고등학교까지 마치게 해서 결혼도 시켰고, 자신도 희망하던 국문학 석사과정도 마칠 수 있었으니 그런 면에서 자신은 어떤 차별도 없었고 다만 열심히 산 것 뿐이라고 말씀하셨다.
우리 4남매는 거의 연년생이다시피 나이 차이가 별로 나지 않는다. 막내만 나와 세 살 터울이 있을 뿐, 오빠와 언니 그리고 나 사이에는 1년 정도의 차이밖에 존재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형제간 서열이 분명해서 오빠가 단연 우리형제들의 대장이었다. 오빠는 항상 자신이 원하는 것을 하려고 했고 그것이 이루어지지 않았을 때는 반항하기 일쑤여서 늘 집안의 분위기를 불안한 상황으로 몰아가곤 했다. 특히 아버지와의 갈등은 언제나 조마조마했다. 하다못해 중국집에 가서 요리를 선택할 때마저 갈등이 컸다. 오빠는 잡채밥을 먹고 싶어 했고 아버지는 모두 짜장면을 먹으라고 하셨다. 언젠가 오빠는 먹지 않겠다며 중국집을 나가 가족 모두의 분위기를 망가뜨린 기억이 있다. 그날은 정말 즐거운 날이었다. 우리는 펜지가 가득 핀 농업고등학교의 정원에서 꽃구경을 했고 그곳에서 서로 나란히 손을 잡고 기념사진도 찍었다. 그런데 단지 음식 선택의 과정에서 의견 조율이 되지 않아 아버지와 고등학생이었던 오빠는 대립했고, 그 여파로 우리는 모두 우울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전혀 갈등할 일이 아니었다. 아버지는 우리에게 모든 것을 다 주셨으면서도 그 방법 면에서 시행착오가 컸다. 중등 국어과 교사였던 아버지는 당시의 내 또래 아이들이 경험할 수 없었던 동화나 한국문학은 물론 동양과 서양문학 그리고 월간 잡지 등을 구독할 수 있게 해 주셨다. 그것만으로도 우리는 충분히 감사해야 할 일일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지금 내가 왜 아버지를 미워하고 있는가에 대해 마음을 정리해 보려 한다.
내가 지켜 본 아버지는 개방적인 듯 전혀 개방적이지 않았고, 지나칠 정도로 자신의 생각을 고집하셔서 사춘기에 접한 오빠나 언니의 반항을 수용하지 못해 그들의 학창시절은 반항의 연속이었다. 중학생이던 오빠는 기타를 배우고 싶어 했다. 당시 트윈폴리오와 사운드 오브 뮤직 그리고 조용필을 좋아하던 오빠는 아버지에게 기타를 사 달라고 했고, 아버지는 그런 대중문화를 무조건 경멸해서 한 마디로 거절하셨다. 나는 그 이후부터 오빠의 반항은 시작되었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리고 또 한 번 오빠가 길에서 걸인을 데리고 집으로 온 일이 있었다. 아버지는 허락없이 걸인을 집으로 데려 왔다고 오빠를 심하게 꾸중했다. 그 때 역시 오빠는 많이 당황했다. 평소 아버지와 엄마는 다른 사람들과 잘 지냈고 특히 어려운 사람들의 형편을 많이 돌 봐 주고 있었기 때문에 오빠도 자연스럽게 그런 행동을 한 것인데 아버지는 어떤 이야기도 들으려 하지 않고 화를 내셨던 것이다. 당시 십대였던 오빠는 아버지의 이중성에 분개했던 것이다.
아버지의 융통성 없는 고집과 오빠의 반항은 늘 우리 집안의 분위기를 어둡고 불안하게 했다. 특히 가족이 모여 앉아 식사를 함께 하는 주말 아침에 아주 심했던 것 같다. 아버지와 오빠의 정치적 견해가 너무 달랐기 때문에 그 부분에서 언제나 언성이 높아졌고 하루 종일 불편했던 기억이 있다.
아버지는 전주 이씨 가문의 종가집의 종손이었다. 조상으로 물려받은 현금은 없었어도 지금 내가 어른이 되어 알게 된 바로는 물려받은 전답과 집터들이 알토란같은 땅들이어서 남부럽지 않은 상황이었던 것 같다. 아버지는 교사들 틈 속에서도 좀 여유가 있는 말하자면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토지가 있는 사람이어서 늘 당당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엄마는 청풍 김씨 학자의 딸로 태어나 국민학교를 다닐 당시 일꾼이 엄마를 업고 등교시킬 정도였다고 한다. 엄마는 배가 다른 형제가 많았다. 외할아버지가 결혼을 세 번 하셔서 아홉 명의 자손을 두었다. 엄마는 둘째 외할머니가 낳은 삼남매 중 둘째였다. 그리고 셋째 외할머니는 사남매를 낳으셨다. 그 사남매는 우리 사남매와 나이가 비슷비슷하다. 특히 막내 외삼촌은 나와 동갑이고 셋째이모는 나의 언니와 동갑이어서 서로 친구처럼 지냈다. 그래도 엄마는 처녀시절 큰 고생없이 부유하게 살았던 사람이었는데 결혼상대를 선택할 때 대학을 졸업한 똑똑한 사람을 만나기를 원했다고 했다. 그래서 아버지를 선택했고, 서울의 이모는 배우지 못했어도 부자와 결혼하겠다고 하셔서 천안의 부잣집 아들과 결혼했다고 한다. 그 덕분인지 서울이모는 홍제동에서 포목점을 하면서 경제적 어려움없이 잘 사셨다. 또한 이모부가 천안의 가풍있는 부잣집 큰아들이었으므로 더더욱 윤택한 삶을 사셨다. 어린시절의 나는 이모가족의 여유로운 삶이 많이 부러웠다.
그런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난 엄마였지만 종가집의 며느리가 된 이후 참으로 힘든 생활을 하셨다. 한 달이면 두 세 번씩 늦은 밤에 제사를 지내야 했고 그 때마다 많은 음식을 준비했다. 특히 엄마는 큰 제사일 경우 시루떡을 직접 하시느라 애쓰셨다. 밤늦게 찾아 온 친지들의 저녁상을 차려 주고 설거지까지 마치고 자야했다. 그러면 늘 밤 12시가 넘었다. 증조할아버지의 병간호와 늦둥이 시동생을 업어 키우다시피 했으니 엄마의 고충은 말로 다 할 수가 없다.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땅이 아무리 많으면 무엇하겠는가. 엄마는 경제적으로 허덕이고 있었다. 옆집과 앞집 그리고 뒷집의 선생님들 집에서 돈을 빌려서 생활해야만 했다. 늘 적자였던 것이다. 그러면서 같은 동네에 사는 그 분들부터 경제적 부족으로 무시를 당하고 있다고 나에게 말씀하신 적도 있었다. 아버지가 엄청나게 부자인 것처럼 떠벌인 것과는 달리 실속은 늘 빚투성이었으니 남들이 그랬다는 것이다. 그런 상황 속에서 엄마는 심한 위염을 앓고 계셨다. 마음속의 고충이 크니 병으로 왔다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다. 지금 생각해 보면 아버지가 그 때 조금만 생각을 열었더라도 엄마가 그렇게까지 힘들게 살지 않았을 거라는 생각이다.
나는 대학에 들어갔지만 비싼 전공서적을 사 달라고 말을 꺼낼 수가 없었다. 오빠와 언니의 대학생활 지원과 돈 씀씀이로 늘 힘들어하시는 엄마를 알고 있었기 때문에 늘 학교의 복사실과 정간실에서 교재를 복사하여 사용했다. 내가 입는 옷들은 늘 언니가 입다가 버린 소매나 목이 축 늘어진 맨투맨 티셔츠나 가방과 학용품도 언니가 쓰다만 것을 사용해야 했다. 대학생이 된 오빠는 술을 마셨고 그 술기운을 이기지 못해 늘 집에 와서 술주정으로 말썽을 부려 집안과 동네를 소란하게 했다. 술을 마시지 않았을 때의 오빠는 폭넓은 지식과 관대함 그리고 유머까지 겸비한 멋진 사람이었다. 예술대에 들어 간 언니 역시 그들 나름의 문화를 즐기는 과정에서 부모님으로부터 걱정스런 꾸중을 듣기도 했다. 우리 집안은 겉으로 보기와 달리 혼란하기 그지 없었다. 오빠와 언니는 용돈이 나오는 날인 17일, 다음 날이 가장 큰 문제였다. 나는 늘 조마조마했다. 저녁 아홉시가 되어도 귀가하지 않는 오빠와 언니가 어디서 무얼하는 지가 늘 걱정이었다. 그리고 그런 나의 염려는 늘 적중하여 한밤중 우리 집은 온 동네를 소란하게 했다. 인정이 많은 오빠와 언니는 용돈이 생기거나 무언가 나눌 것이 있으면 누군가에게 베풀기를 좋아했다. 어떤 날은 한 달 용돈을 하루에 소모하는 날도 있었다.
우리들의 젊은 날은 그랬다. 그러는 과정에서 오빠와 언니는 대학도 졸업하기 전에 결혼을 했다. 오빠는 취업도 하지 않은 상태에서 대학 4학년 무렵, 지금의 새언니와 결혼을 하겠다고 거의 떼를 쓰다시피 했다. 결국 누구도 그 결혼을 말리지 못했고 오빠는 미래에 대한 어떤 준비와 계획도 하지 않은 채 결혼을 했다. 그리고 자신이 그토록 경멸했고 부인했던, 언제나 아버지처럼 살지 않겠다고 되뇌이던 오빠는 아버지에게 의존한 삶을 살기 시작했다. 그 후 나는 늘 생각했다. 그 무렵 아버지가 좀 더 지혜롭게 오빠의 생활에 간섭하지 않고 적정선을 유지한 지원만 했더라면 아마도 머리좋고 똑똑했고 박식했던 오빠의 운명도 아버지와 엄마 그리고 나머지 우리 삼남매의 운명도 달라졌을 거라고.
아버지의 본격적 차별은 오빠의 결혼과 동시에 시작되었다. 나는 아버지가 그토록 손주를 좋아하는 줄 몰랐다. 새언니는 딸 둘을 제왕절개 수술로 낳고, 위험하다는 의사들의 충고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아들을 낳기 위해 셋째를 임신했고 자연분만으로 출산하였다. 그 때부터 아버지와 엄마는 오빠의 세 자녀와 며느리에 대한 애정으로 똘똘 뭉쳐 있었다. 오빠는 서울에 있는 모 보험회사에서 자신만의 리더쉽으로 나름의 지위를 확보하고 있었지만 상사와의 대립에서 자신의 화를 참아내지 못하고 지하차고에 있는 상사의 자동차를 망가뜨려 놓은 상태로 회사를 박차고 나왔다. 그 이후 고향으로 내려와 사업을 한다는 명목으로 아버지에게 돈을 받아가기 시작했다. 아버지는 늘 처음에는 안 된다고 하시다가 오빠가 술주정을 하거나 떼를 쓰면 달래는 식으로 사업자금을 융통해 주기 시작했다. 그 무렵 나는 이미 결혼을 한 상태였기 때문에 상세한 내용을 알 수 없었다. 나는 아버지가 큰 아들인 오빠에게 경제적 지원을 할 때, 남아있는 삼남매 역시 똑같이 아버지의 자식이므로 가족회의 열어 결정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생각했지만 그 모든 결정은 아무도 모르게 쉬쉬 진행 되었다. 늘 나는 사건이 터지고 난 뒤에야 알게 되었다.
어느 날 아무 경제력도 없던 오빠와 새언니가 시내의 오래된 청기와 음식점을 인수해 영업을 시작했다는 소문을 들었다. 나는 아주 늦게 알게 되어 남편과 아들을 데리고 그 식당에 가 보았다. 오래된 청기와 음식점은 시내의 중앙에 위치해서 도청과 그 주변의 공무원이나 직장인 그리고 상가 사람들, 일반인들까지 잘 이용할 수 있는 아주 좋은 위치였고 커다란 정원까지 있어서 멋스럽기까지 했다. 그 때 나는 많은 생각들이 교차했었다. 그들을 축하하고 잘 되기를 기원했다기보다 아버지와 엄마의 차별에 우울했다. 또한 열심히 일하는 것 같지 않은 다만 형식적으로 가게를 꾸며 놓고 아버지의 재산을 이용한 오빠 내외에 대한 불만으로 ‘다시 이 곳에 오지 말아야지!’ 라는 생각까지 하게 되었다. 이러한 내 마음의 작용은 옹졸한 것이었을 지도 모른다. 어떤 시작에 늘 불순한 마음이 작용하고 있는 것은 아니니까~~그리고 정말로 오빠 내외는 잘 해 보려고 시작한 것이었을 테니까~~하지만 중요한 건 그 사업마저 얼마 지나지 않아 문을 닫았다는 것이다.
무분별한 투자였고 차별이었다. 결혼한 나와 나의 남편은 아버지의 오빠에 대한 투자가 잘못되었다고 지적하였으나 아버지와 엄마에게 들은 말은 ‘자네가 상관할 바가 아니네!’와 ‘너는 출가외인이다! 너나 잘 살아라 그리고 상관하지 마라!’는 참으로 냉정하고 야속한 말만 들어야 했다. 거기에 늘 아버지의 재산이 모두 자기 것인 양 떵떵거리고 다니는 오빠의 생활상과 그것에 대해 어떤 제지도 없이 오히려 부추기고 있었던 새언니의 태도는 한숨만 나오게 할 뿐이었다. 또한 그것은 '늘 깨진 독에 물 붓기' 식의 투자가 되어 아버지는 40년 가까이 근속한 교직자로서의 퇴직금을 모두 날렸다. 그리고 젊은 날에 마련한 주택과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알토란 같은 논과 밭, 그리고 자랑처럼 퇴직 후 고향으로 돌아가 전원주택을 짓고 살겠다던 그 집터마저 다 잃게 되었다. 그러한 일들이 벌어지는 과정에서 우리 삼남매는 아무 것도 알지 못했으며 그래서는 안 된다고 말하지도 못했다.
어느새 아버지의 중년과 다를 바 없이 성장한 장남인 오빠의 주장과 행동을 누구도 막을 수 없었다. 아버지 역시 은퇴 후의 퇴직금을 오빠에게 다 쏟아부은 상태였으므로 힘없는 70대 이후를 보내게 된 것이다. 노후의 안정된 삶을 위해서 그리고 자녀들의 공경을 받기 위해서는 스스로 경제력을 잃지 않는 것이라는 것을 아버지는 몰랐던 것일까? 자녀가 올바른 성인이 되고 사회인이 될 수 있게 돕는다는 것은 가끔은 야속할 만큼 냉정해서 스스로 독립할 수 있게 해야 한다는 사실을 아버지는 미리 인지하지 못했던 것일까? 오빠는 스스로 이룬 거라고는 아내와 자식 셋을 두었다는 것 뿐이었다. 그리고 그들에게 마저 깊은 상처와 원망을 남겼다는 것 뿐이다. 이것은 나의 단정적 결론이다. 아닐 수도 있다. 오빠가 남긴 것은 왜 그것 뿐이겠는가? 그러나 한 가지의 큰 실수로 다른 모든 건 보여지지 않았다.
내가 지금 분개하고 있는 것은 이미 지나간 그 일들 때문이 아니다. 3개월 전 여든 둘의 연세로 세상을 떠나신 엄마의 죽음을 슬퍼하며 홀로 남으신 아버지에게 위로가 되고자 끊었던 친정 발길을 다시 하면서 매일같이 그 차별에 다시 눈을 뜨게 되어서다. 5년 전 오빠를 사고를 잃었다. 그 때 역시 오빠는 특별한 벌이가 없이 아버지의 땅인 시골 땅에 전원주택을 짓겠다고 어떤 일을 진행 중이었다. 오빠가 있었을 때도 경제적으로 부모님을 돌 본 것은 나의 언니와 서울에서 직장생활을 하는 막내였다. 대학 3학년 때 결혼한 후 곧바로 이혼한 언니가 홀로 되어 아버지와 엄마의 손발이 되어 주고 있었다. 언니는 자신이 부모님의 속을 썩인 것이 죄송하다는 생각에 마지막 남은 효를 다하고 있었다. 주변 사람들은 부모님의 노후가 그나마 행복한 것은 언니의 따뜻한 인정과 효 덕분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도 늘 언니에게도 닥칠 노후를 걱정했다.그러니까 장남이 있었어도 장남의 돌봄은 없었고, 다만 장남은 제삿날이나 기타 행사에만 나타났을 뿐이었다. 오빠의 부도 뒤처리 역시 아버지의 연로함과 경제적 무능함으로 처리할 수 없었으므로 성실하게 직장생활을 하며 가정을 꾸려 나가던 막내인 남동생이 그 뒤처리를 했던 것으로 알고 있다.
나는 아버지와 엄마의 무분별한 장남에 대한 투자에 지쳐 있었다. 나의 남편은 나와 결혼할 당시 내가 교직자의 딸에 도청 소재지에 주택도 있고 인근 시골에도 주택이 있고, 누가 보기에도 부러워할 만한 토지를 소유하고 있어서 나름 도움도 받을 수 있을 것이라고 꿈꾸었던 것 같다. 하지만 출가외인이라며 상관 말라던 장인, 장모에 대해 실망한 이후 처갓집 방문을 하지 않았다. 나는 그런 남편의 결정을 이해했고, 나 스스로도 부모의 지원을 바라지 않기로 했다. 그래서 마음속으로 ‘나는 고아다!’라고 생각했고 남편에게도 그러한 내 심정을 알렸다. 내가 열심히 살겠다. 내 친정의 도움을 바라지 마라. 내 부모가 도움 줄 사람이 아니다. 그 차별의 벽을 나는 허물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나조차 친정가는 일이 싫어졌다. 그래도 가끔씩 자식된 도리는 그게 아니라는 생각이 들 때와 엄마가 보고 싶을 때만 찾아 뵈었다. 그러나 그 때마다 오빠의 사업 부도로 산꼭대기 마을로 이사하여 살아가야했던 부모님의 환경에 화가 났었다. 또한 경제적으로 의지할 데 없는데다 본인의 삶마저 어려운 언니의 도움으로 궁핍한 생활을 하고 있는 모습과 여전히 고집적으로 장남과 장손 그리고 큰며느리에게만 관심을 쏟고 있는 아버지와 엄마의 행동에 늘 안타까움을 느껴 가슴속에 응어리진 한 마디를 해야만 했다. 그 때마다 나는 답답함에 언성을 높여 좋지 않은 감정만 쌓아 둔 채로 친정집을 나와야 했다.
언니는 어떻게 살라고~ 저 사람 좀 보세요~ 저 사람은 아버지만큼 나이가 되었을 때 아니, 조만간 육십이 되고 머지않아 칠십이 될 텐데 그 때 어떻게 살죠? 저 딸의 미래가 걱정되진 않으신가요? 딸은 자식이 아닌가요? 딸은 그냥 일을 부려먹는 노예인가요? 아버지는 지금 어느 시대에 살고 계신 거죠? 조선시대에 살고 계신가요? 그래서 딸을 출가외인이라고 하며 엄연하게 양성평등이라는 법이 존재하는 세상에서 무책임하게 노력조차 하지 않고 오빠와 똑같이 의존하는 삶을 살고 있는 장남의 아들, 그 손주만이 아버지의 희망인가요? 명절이라고, 아니면 아버지가 보고 싶다고 연락했을 때 그렇게 애지중지하던 그 손주가 아버지를 찾아 뵙던가요? 엄마 돌아가시고 그 장남의 아내 그 며느리가 몇 번이나 찾아 뵙던가요? 다른 형제들 알게 될까 봐, 혹시나 알면 끼어들까 봐 몰래 이 친척 저 친척 찾아 다니면서 아버지가 조상 으로부터 물려받은 땅을 자기 자식 몫으로 돌려놓기에 바빴죠. 아버지를 돌보기라도 했나요? 그 땅 팔아서 당신들 현금으로 가지고 사셨더라도 지금같지는 않았을 텐데요. 생활비 없다고 막내한테 전화하고 기대지 않아도 되었을텐데요. 아님 저기 저 홀로된 딸자식, 남편도 자식도 없이 혼자 살아가야하는 언니한테 그동안 돌봐 주느라 애썼다며 그 땅 줄 수도 있는 것 아니었나요? 아버지와 엄마를 경제적 곤경에 빠뜨리고 그것도 모자라 마지막 재산마저 빼돌린 행동이 정말 인간적으로 아무 문제가 없다고 생각하시는 건가요? 저 사람은 뭔가요? 저 딸은 뭐냐구요? 10년 이상 엄마 아버지의 손발이 되어 준 사람. 하루도 빠짐없이 돌봄에 몰입했던 사람, 그 사람 돈도 집도 없는 사람입니다. 그 사람이 당신의 딸이어서 한 푼도 못 주겠다는 건가요? 딸은 그냥 딸인 건가요? 자식이 아닌 건가요? 출가외인이고 대를 잇지 못하는 존재 뭐 그런 거라고 생각하시는 건가요? 그래서 그렇게 애지중지 아낀 손주가 아버지 돌아가신 후 조상을 모시거나 제사를 지내 줄 거라고 믿고 계신 건가요? 그 손주의 아내가 제사상을 차려 줄 거라고 기대하시는 건가요? 아버지를 눈꼽만큼이라도 기리고 추억하며 고맙다고 할 것 같나요?
당연한 것이 아닙니다. 차별이었습니다. 엄청난 차별이었습니다. 고루고루 챙겨주시고 사랑하여 주셨더라면 아마도 더 많은 발전과 향상이 있었을 수도 있었던 우리였습니다. 아버지와 엄마가 장남인 오빠에게 베풀어 주신 경제적 지원을 저희들에게 조금만 해 주셨더라도 언니는 저 지경으로 늘 맨 땅에 머리박듯 힘들게 살지 않았을 것입니다. 어린시절 사랑하여 주셨던 그 크기만큼 예쁜 삶을 살아갈 수 있었을 지도 모릅니다. 또한 저 역시 ‘나는 고아다!’라는 힘든 내면으로 부모님의 차별을 원망하며 살지 않았을 지도 모릅니다. 맑고 밝게 착하게 살라고 하신 그 말씀대로 오직 선한 삶을 살아가며 원망없는 삶을 살았을 지도 모릅니다. 남동생 역시 막내라는 가벼운 마음으로 예쁘고 건강한 가정을 꾸몄겠지요. 물론 지금도 건강한 가정이지만 그보다 더 많이 건강한 가정이 되었겠지요. 시댁 뒷바라지 하는 것에 대해 지친 듯 이를 악물고 시어머니 돌아가시자 마자 아직 시아버지가 살고 계신 집을 팔겠다고 하지는 않았겠지요. 시댁이 그저 짐처럼 느껴지게는 하지 않았겠지요. 아버지 엄마의 피를 고스란히 물려받은 자식으로 우리 4남매 어쩌면 더 애틋하게 우애를 나누며 살아갈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한번이라도 그것이 차별이었다고 생각해 보신 적은 없으신가요? 적어도 대한민국의 꿈과 희망이었던 사춘기 청소년들을 가르치셨던 선생님으로 자신의 판단이 시대의 흐름을 따르지 못하고 있었음을 돌아 볼 수 있는 것은 아니었는지요. 의식과 문화의 발전을 다만 나라가 망해가는 징조라고 비판하는 배우지 못하고 깨우치지 못한 무식한 사람들의 생각을 고스란히 무의식적으로 품고 살아오신 것은 아니신지요?
to be continu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