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어난 환경에 '죄'를 붙여도 어색하지 않다는 건 비극
1인 사무실을 얻어서 쓰다 보니 회의실이나 카페테리어는 공용 공간으로 나눠서 쓰고 있다. 디자인 회사, 무역회사, 프리랜서들이 주로 입주해 있는데 그중 입시 강의를 하는 강사도 있다. 일요일인 오늘은 고등학생을 대상으로 현대시 강의를 하고 있는데 카페테리어 구석 자리에 앉아 있는 내 귀에 강사의 이야기가 쏟아져 들어온다. 아마도 오늘이 첫 수업인 것 같고 학생들을 대상으로 몇 가지 공지사항을 일러주면서 아래와 같은 이야기를 했는데 나는 내 귀를 막고 싶었다.

"공부가 인생의 전부가 아니라는 개소리는 하지 마라. 그런 소리를 지껄이는 선생이나 그런 소리를 하는 책을 쓴 작가들이 있긴 있다. 하지만 그건 그들의 개인적인 생각일 뿐이다. 특히 외국에서 살다가 왔거나 자기들이 외국에서 사는 경우에 그런 소리를 하는 사람들이 많다. 여기는 대한민국이다. 대한민국은 넘어져서 일어나지 못 하는 사람에게 손을 내밀어 주고 기다려 주는 나라가 아니다. 대한민국은 넘어진 사람들이 다시는 일어나지 못 하도록 짓밟는 나라다. 가진 자들만이 더 많이 가지는 나라다. 지금 너희들이 이 자리에 비싼 수업료를 지불하고 앉아있는 이유는 살아남을 방법을 배우기 위해서다. 왜 이렇게 살아야 하는지 불만이 있을 수도 있다. 미안한데 그 건 대한민국에 태어난 죄다."

하아, 속이 부글거렸지만 어쩔 수 없었다. 이어지는 수업에서는 시의 한 구절을 읽으며 거기서 표현된 것이 시각적 표현이냐 무엇이냐 뭐 그런 수업을 하고 있었다. 그제야 나도 예전 수업시간이 떠올랐다. 학교나 학원에서 문학이라는 타이틀 아래 시를 배웠던 건 다 저런 식이었다. 시에 나타난 감각적 표현의 종류, 시가 비유하는 대상, 시인이 전달하고자 했던 속뜻 같은 걸 주야장천 배웠다.
대한민국에 태어난 죄로 저런 걸 문학수업이랍시고 들었고 여전히 이 땅의 아이들은 저렇게 배우고 있다. 그런가 하면 어떤 아이들은 여성의 인권이란 것이 거의 존재하지 않는 나라에 태어난 죄로 어린 나이에 결혼이라는 이름으로 부모에 의해 나이 든 남자에게 팔려가거나 명예살인이라는 이름 아래 아버지나 오빠의 손에 처참하게 죽기도 한다.

태어난 환경에 '죄'를 붙여도 어색하지 않다는 건 비극이다. 살면서 자신이 태어난 환경을 바꾸거나 변화시킬 수 기회는 자주 오지 않는다. 가끔 찾아오는 기회를 살릴 확률도 낮다. 나이가 어릴수록 환경에 대항하기 보다는 순응해야 하는 경우가 많지만 나이가 들었다고 해서 그 반대가 되는 것도 아니다.
얻어 걸린 좋은 환경 덕분에 고생의 뜻을 사전을 보고 이해하는 사람도 있고 온몸으로 배운 사람도 있다. 고생영역에서 1등을 달성했다고 해서 삶의 지혜 영역에서도 1등을 하는 건 아니다. 금 수저를 물었건 흙바닥에 뒹굴던 수저를 물었건 간에 내 입에 털어 넣는 건 내가 책임져야 한다는 불공평한 경쟁이 싫다면 그런 방식의 경쟁을 관두지 않고는 방법이 없다. 수저를 쓰지 않고 먹을 방법을 찾거나 금 수저를 능가하는 신소재로 만든 수저를 개발할 수도 있다.
자신의 환경을 주체적으로 선택하고 만들어나가기 위해서는 지독한 외로움과 두려움을 등에 업고 고군분투해야 한다. 온 힘을 다해 싸워도 좌절을 반복적으로 경험하다 지쳐 무릎을 꿇을지도 모른다. 얌전히 있을 걸, 괜히 설쳐서 사서 고생이라고 후회할지도 모른다. 후회하게 될까 두려워하며 흘러간 시간이 길어질수록 아무것도 하지 않은 것에 대해 뼈저린 후회를 할 가능성이 높다는 건 다 아는 사실.

나를 둘러싼 좁은 의미, 넓은 의미의 환경 모두에 대해 포괄적으로 생각해보게 되었다. 사회생활이란 걸 시작한 이래 두 번째로 사업자를 내려는 상황에 타이밍이 절묘했다. 첫 번째는 내 명의가 아닌 다른 사람의 명의로 사업자를 낸 것이었고 이렇다 할 소득도 없었으니 이번이 처음인 셈이다. 아직은 시작을 위한 준비 단계지만 앞으로 점점 더 생각이 많아지겠지? 물론 행동(그리고 지출 -.-;)도 많아지겠고! 사업하면서 대한민국에 태어난 게 죄라고 푸념하지 않고 싶다.
어떻게 되건 '사업이 내 삶을 지배하게 해서는 안 된다'는 개념만은 잊지 말아야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