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의 재편집

by 보라구름

오랜만에 피아노 연주회 티켓을 구입해 연말 인파를 헤치고 공연장에 갔다. 무기력증에 빠져 한동안 극장도, 공연장도(음악회, 전시회, 연극, 뮤지컬 등 어떤 장르도) 일절 가지 않았는데 이런 동력이 생긴 건 회사 동료 덕분이다. 혼자서 문화생활을 부지런히 즐기는 모습을 보며 에너지를 받은 셈이다. 그렇지만 역시나 몸을 일으켜 외출 준비를 하는 내내 나갈까 말까를 수없이 반복했고 지각을 하면(영화가 아닌 이상 지각하면 상당히 난감하며 차라리 안 가는 게 나을지도 모를 일) 어떨까 싶어 별별 핑곗거리를 다 찾느라 분주했다.


그런 나를 어르고 달래며 씻기고 입혀 밖으로 나왔다. 다행히 지각하지 않고 조금 여유 있게 착석하는 데 성공했다. 예전에 발레 보러 갔을 때 옆자리 아저씨가 코를 골고 주무셔서 난처했던 기억이 있는데, 이번에는 옆에 앉은 아주머니께서 꾸벅꾸벅 졸다가 아예 상모를 돌리신다. 옆자리 관객 운이 별로 없는 건가 싶어 피식 웃고 그냥 무대에 집중하려고 최선을 다했다. 내 기분 상해봤자 공연 시간을 다시 돌릴 수도 없는 노릇이니.


연주를 감상하고 1부와 2부 사이에 연주자가 마이크를 잡더니 그리 길지는 않지만 멘트를 이어나갔다. 공연에 대한 간략한 소개와 더불어 올 한 해를 보내며 자신이 느낀 점과 관객에게 해주고 싶은 이야기였다. 그렇고 그런 멘트인 것 같아서 흥미가 떨어지려는 찰나 연주자의 멘트 중 '기억', '편집' 이 두 단어가 콕 들어와 박혔다. 역사를 왜곡하듯이 자신에게 유리하게 편향적으로 기억을 비틀어버리는 건 곤란하지만 기억을 어떤 방식으로 편집하여 저장하느냐에 따라 한 해가 다르게 남을 수 있다는 말이었다.


애당초 피아노 연주자의 공연에서 멘트에 대한 기대가 없어서였는지, 아니면 그때 내 마음이 기억과 편집이라는 단어에 유독 흔들렸던 것인지, 연주자가 훌륭한 멘트를 해서였는지 모르겠지만(아마 세 가지 다였을 듯) 그 후로 집에 오면서도 내내 그 말이 맴돌았다.


사실, 기억의 왜곡이 얼마나 심각한지는 몇 번의 경험을 통해 익히 알고 있다. 내게는 너무도 싫고, 힘들고, 끔찍했던 기억이 상대에게는 좋은 추억으로 남았다는 이야기를 그 상대방에게 직접 몇 번이나 들었던 나로서는 몸서리쳐지도록 싫었다. 어쩌면 그것은 싫은 티를 잘 안 내고 그냥 참거나 피하고 넘어가버리는 성격이 만들어낸 비극이라고 생각한다. 그렇지 않고서야 왜곡도 그리 심한 왜곡이 발생할 수 있겠는가.


design-2711676_1920.jpg


올 한 해 파란만장한 일들이 있었고(어째 매해 그런 것 같지만), 별로 다시 떠올리고 싶지 않은 일들도 도처에 널려 있지만 그 기억을 좀 새로운 시각으로 재구성, 편집해보는 것도 의미가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올해, 가장 큰 변화는 술을 굉장히 많이 줄였다는 것(대신 쇼핑이 늘어남). 장단점은 있지만 결과적으로 보면 좋은 변화라고 생각한다. 이런 식으로 한 해를 돌아보며 기억을 다듬어 저장해 보고 싶다. 가급적 차분하게.








매거진의 이전글너의 불행을 원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