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모님과 특별히 사이가 좋은 것도 나쁜 것도 아니라고 생각했다. 멀지 않은 거리에 떨어져 지내고 있고, 격주로 주말에는 찾아가서 식사를 한다. 형제자매가 있는 것도 아니라서 가족 행사라고 해봐야 부모님 생신, 어버이날 정도고 명절 연휴일뿐.
하지만 워낙 풍파를 많이 겪으며 자라난 탓에 내 안에는 굳게 닫힌 마음의 문이 부모님에게 제대로 열려본 적이 없었다. 나의 주된 방어기제는 회피와 자책이며, 억누르기이기 때문.
80을 바라보며 지병이 하나도 없기는 어렵다. 아빠는 비뇨기 쪽으로 계속 문제가 있어서 이 병원 저 병원, 한의원까지 가봤지만 별 차도가 없었다. 심각하게는 생각하지 않았는데 주말에 엄마에게 전화가 왔다. 자초지종을 설명하며 한의사가 당장 응급실로 가라고 했는데도 아빠가 말을 듣지 않아 하루가 지체됐고 지금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일단 상태를 봐야만 할 것 같았지만 한의사가 괜한 소리를 할리는 무방하고, 여하튼 아빠는 그럼에도(?) 스스로 운전을 해서 고집을 피워 다시 그 한의원으로 왔다. 보호자가 아내에서 딸로 바뀐 채로 진료실에 들어가자 의사가 놀라도 너무 놀란 눈으로 응급실에 안 다녀오시고 여길 온 거냐고 묻는다.
의사와 내가 합세하여 응급실 행을 독려하여 겨우 대학병원 응급실에 도착. 발은 퉁퉁 부었고 제대로 걷지도 못할 지경이 되어 갔고, 급기야 휠체어에 앉은 채로 응급실로 들어갔다. 코로나로 인해 의료진 외에 응급실 진입은 전면 통제. 응급실 보호자 대기실은 아수라장 그 자체였다. 사망 소식을 들은 보호자의 흐느낌과 구급차에서 내리는 환자와 울먹이는 보호자. 그 와중에 대기 중인 화면에서 응급실 내 환자 몇 명, 평균 대기시간, 처리 내용, 이런 게 뜨고 있어서 계속 아빠 이름만 좇아 뭔가 변화된 게 없나 싶어 애가 타는데 드디어 보호자를 찾는 의료진 소리에 냅다 달려 나갔다.
젊고, 친절한 의사는 휠체어에 앉은 아빠를 위해서 자세까지 낮춰서 나와 아빠에게 증상과 상황을 설명했고, 아빠는 혈뇨가 가득 찬 피주머니를 차고 힘없이 휠체어에 앉아계셨다. 1400cc의 소변을 빼냈다고. 보통 응급으로 와도 800~1000cc인데 이 정도면 상태가 굉장히 심각한 거라며 조금만 더 지체했으면 위독했을 수 있다고 했다.
서류를 들고, 이리 뛰고 저리 뛰고, 아빠의 코로나 검사를 받고, 입원 수속을 하고, 대리 기사를 불러 집으로 오면서도 멍해진 상태였다.(우리 집에서 아빠 빼고 아무도 운전을 못함)
입원 후 두 번의 수술이 있었고, 암 검사 결과 암으로 판정이 났다. 다행히 전이는 안된 것으로 확인. 의료진과 마찰도 있어서 중간에 중재를 해야 했고, 세 번째 수술이 실패하면서 재수술을 위해서는 2주 정도 요양 후 다시 시도하기로 협의했다.
아빠는 간병인은 강력하게 거부하셨고 결국 엄마는 입원 기간 내내 병원에서 옴짝달싹 할 수 없게 되었다. 부모님 댁에 혼자 남겨진 고양이를 챙기기 위해 오가고, 이것저것 부족한 것들을 챙기느라 양쪽 집을 오갔다. 그렇게 시간이 흘렀고 퇴원하는 날 마지막까지도 아빠는 어제 한 결정을 뒤엎었고, 결국 나는 암환자인 아빠에게 고성을 지르기를 두어 번. 챙겨야 할 서류(보험 청구 관련, 건강 보험 관련)는 또 왜 이렇게 절차가 복잡한지 그걸 엄마가 다 하게 맡겨두었더니 가장 중요한 진단서를 안 받고 주셔서 결국 무용지물.(그래도 엄마에게 고성은 지르지 않았음)
제대로 걷기가 불편하신 엄마는 병간호에도 지쳤지만 여전히 아빠에게 쩔쩔맸고 엄마는 아빠에게 계속 명령조로 이야기를 해서 결국 수십 년간 닫아둔 마음의 문이 자동으로 열려버렸다. 아니 그냥 문이 폭발해서 날아가버렸다고 하는 게 맞겠다.
어린 시절부터 너무 많이 부부의 싸움과 분열을 목격하고 개입되고, 중재가 역할을 했던 내가 40대에 이제는 다른 형제마저 잃은 상태에서 혼자 짊어지려니 내가 미칠 지경이 된 것이다. 엄마는 어린 시절 내가 겪은 일들 중 이야기하지 않았던 몇 가지 일에 크게 놀라 사과하고 진심으로 미안해하셨다.
이 와중에 엄마까지 고질병인 디스크로 척추센터, 통증재활의학과 등의 진료를 받았던 2차 병원의 오진이 확인되면서 두 분 모두 같은 대학병원에서 환자가 되어 계시다. 엄마는 입원까진 아니라 그나마 다행이지만.
그러면서 휴가를 계속 낼 수 없으니 휴가 하루 이틀로 버티고 일하면서 이 모든 상황을 감당하려니 거의 매일 밤 악몽과 가위눌리기에 시달려 한밤에 소리를 지르며 깨어나서 엉엉 울었다.
겨우 정신을 차린 뒤로는 죽음에 대해 여러 차례 생각했고(자살 이런 것 말고 삶과 죽음의 의미), 내가 들어둔 몇 개의 보험에 대해 체크해보았다. 다 너무 예전에 든 것들이라.
내일이면 다시 아빠의 입원이고 3차 수술 날을 받고 기다려야 한다. 앞으로 또 어떤 일들이 있을지 전혀 알지 못하기에 최악의 정의는 아직 이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