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파트 공화국, 대한민국
한국을 처음 방문하는 외국인들 중 다수가 깜짝 놀라는 점이 있다.
왜 이렇게 아파트가 많아?(서울, 경기권만의 상황이 아님)
사람들이 대부분 아파트에 들어가 살고 싶어 한다고?
그렇다. 몰개성의 아파트가 대부분의 주거형태를 차지하고 저마다 위용을 자랑하며 우뚝 솟아 있다. 각기 다른 브랜드 네임을 가지고 있지만 초호화 럭셔리 단지가 아니고는 생김새가 대체로 비슷하다. 심지어 최근에는 순두부 아파트, 순살 아파트라는 조롱까지 받을 정도로 공사를 엉터리로 해서 문제가 되고 아예 분양하기도 전에 부실공사로 무너져 버리는 일마저 생기는 등, 대한민국에서 아파트는 여러 가지 면에서 특별하다.
그래서였을까. <콘크리트 유토피아>는 원작 <유쾌한 왕따>에서 많은 부분을 바꿔서 영화로 나왔다. 기본 골격 정도만 비슷하고 나머지는 아예 다 다르다고 봐도 무방할 정도로.
스포일러 걱정이 무색하게 예상되는 줄거리는 예상한 거의 그대로다.
어느 날 황궁 아파트만 남기고 주변의 모든 곳이 폐허가 된다. 재앙에서도 온전히 살아남은 황국 아파트는 신의 축복처럼 느껴진다. 주민이 아닌 사람은 받아주지 말자는 결정이 내려지고 주민들만이 아파트 안에서 어떻게든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 친다. 주민 대표로 세운 사람이 사실 주민이 아니고, 주민들 사이에도 갈등이 빚어지고, 인간이 인간에게 어떤 짓까지 할 수 있는지 재난 상황이라는 극한 조건에서 하나씩 드러난다.
주민이 아닌 사람을 색출하여 쫓아내 그들이 밖에서 얼어 죽게 만드는 것, 주민이 아닌 사람을 숨겨둔 집까지 찾아내서 문에 빨간 스프레이 칠을 해두는 것. 그런 장면에서는 유대인 학살 장면도 오버랩됐다. 배제되어야 하는 다른 인간을 규정하고 그들은 가차 없이 공동체에서 제거(살해)된다.
'우리'로 규정되는 무리 안에 들어가지 못하면 생존은 불가능에 가깝고 '무리'에서도 규칙에 따라 무리에 순응하지 않으면 추방될 수 있다. 누군가의 생사를 결정하는 권한은 신이 아닌 인간에게 부여되고 그게 자연스럽다는 듯이 받아들이는 사람과 그러면 안 된다고 나서는 사람이 생긴다.
선과 악, 옳고 그름에 대한 판단, 나의 생존과 타인의 생존이 공존할 수 없을 때 하게 되는 선택. 영화는 짐작되는 많은 것들을 스토리 안에서 풀어나간다. 몇몇 부분은 조금 아쉽게 마무리된 것 같기도 하지만 영화 안에 들어가서 자신을 한 인물에 대입해서 본다면(주인공에 대입하지 않더라도) 생각할 거리를 많이 주는 영화라는 걸 느낄 수 있다.
영화 마지막에서 90도로 기울어진 아파트에서 살아가는 생존자 무리에 합류한 주인공이 얼떨떨한 표정으로 합류한다. 자신의 능력이나 무해함을 입증하는 어떠한 절차 없이 같이 살아가는 무리에 속한다.
극적인 상황 앞에서는 자신의 면모도 극적으로 드러나게 마련이다. 하지만 일상의 소소한 순간에서도 드라마틱하게 노출되지만 않을 뿐 우리는 끊임없이 나와 다른 존재를 구분하고, 필요에 따라 나누고(아니라고 부정해도 적극적/소극적의 차이일 뿐), 가치를 매긴다.
감독이 궁금해서 찾아보니 배우 엄태구의 형이고, 필모그래피도 화려하다. 다음 영화를 즐거운 마음으로 기다릴 수 있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