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안 곳곳에 온갖 물건을 쟁여두고 지내는 물건 호더로 살다 보니
욕실이라고 예외는 아니다.
철제로 된 3단 선반이 꽉 차 있고
욕조 아래에 설치한 추가 선반도 빽빽하다.
바디워시를 손가락으로 집다가 흠칫 놀랐다.
**의 제품은 제품마다 검수자의 얼굴이 일러스트로 된 스티커로 부착되어 있다.
평소에는 별로 신경 쓰지 않았는데 어느 날 그 일러스트를 보고
머리털이 쭈뼛 서고 말았다.
맙소사, 그 얼굴은 분명 그녀의 얼굴이었다.
원한을 갖고 있어서 3대가 망하라고 저주를 퍼부을 정도의 감정은 아니나
그렇다고 좋은 감정을 갖고 있을 리 만무한 사람의 얼굴.
그걸 인지하자마자 일러스트 스티커가 보이지 않도록
제품을 반대 방향으로 돌려두었다.
한데 그 바디워시와 똑같은 사이즈의 동일한 제품이 하나 더 있었다.
설마 그것도 같은 얼굴은 아니겠지? 하고 확인해 보니
설마가 사람 잡는다고, 똑같은 그 얼굴 두 개가 동시에 나를 바라봤다.
헉!
순간 나도 모르게 너무 놀라 심장이 쿵쾅거렸다.
당황해서 그 바디워시 두 개를 눈에 안 띄는 곳으로 밀어 넣으려고 허둥지둥하다가 그만
다른 제품들과 선반에서 뒤엉키다가 하나가 순식간에 아래로 떨어졌다.
아악~~
쿵! 하는 소리와 동시에 비명을 내질렀다.
불행 중 다행으로 떨어지면서 욕조 경사면에 부딪히고 내 발가락에 떨어져서
둘째 발가락이 빨갛게 되고 욱신거리긴 했지만 뼈에 이상은 없었다.
하필 그 제품이 또 모서리가 평평하고 둥근 게 아니라 각진 부분이 있어서
정통으로 맞았으면 뼈에 금이 갈 수도 있었을 상황이었다.
진저리를 치며 유효기간이 아직 남아있는 그 제품,
그녀의 얼굴과 흡사한 일러스트 스티커가 붙어 있는 그 제품 두 개를 버렸다.
샤워를 마치고 나와서도 쉽게 진정이 되지 않았다.
끔찍한 기분이었다.
아, 나는 정말 내 감정을 이렇게도 묻어두고 지내는구나.
꽁꽁 싸매두고 스스로에게도 안 들키려고 애를 썼구나 싶었다.
솔직히 그 사람에 대해 그렇게까지 반응할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그런데 그 얼굴을 떠올리게 하는 스티커 두 개가 나란히 나를 본다고 생각하자마자
한바탕 소란이 일어났으니.
내 감정을 세세하게 살펴볼 여유가 없다는 걸 깨달았다.
여전히 감정을 직면할 용기는 없다.
그래도 스스로를 재촉하지 않기로 한다.
준비가 되면 자연스레 감정이 수면 위로 올라오리라 생각하며.
여전히 새로운 내 안의 감정과 반응을 마주한다. 아, 나 이래서 휴직했구나를 새삼 떠올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