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과는 안 가는 게 상책
덴탈 포비아인 내가 그제 사랑니를 뺐다. 왼쪽 아래 사랑니. 오죽했으면 뽑으러 갔을까. 올해 여름에 시린 이가 있어서 치료를 받으러 갔었다. 첫날에 가글 마취를 하고 스케일링을 받은 뒤, 신경치료를 하고 아랫니 하나에 충치 부분을 살짝 갈아내고 때웠다. 아래쪽 사랑니 2개도 발치하는 게 좋겠다고 해서 다음 스케줄을 잡으려다 일이 너무 바빴고, 아파서 휴직을 하게 되면서 치료가 중단되었다. 그렇게 몇 달 잘 버텨주던 치아들이 인내심의 바닥을 드러내버렸다. 찬물이나 찬 음식에만 시리던 것을 넘어 가만히 있어도 참을 수 없이 욱신거리기 시작한 것이다. 특히 잠들기 전에 극심한 고통이 찾아왔다.
피곤해서 잇몸이 부었나?(그럴 리가, 그거랑 통증이 다른데) 좀 지나면 낫지 않을까?(정말 자연 치유될 수 있어?) 등등의 생각만 하다가 시간은 흘렀고 치통은 더욱 극심해져서 진통제가 없으면 잠을 잘 수 없을 지경이 되고 말았다.
결국 다시 용기를 끌어모아 치과에 가야만 했다. 하지만 여름에 치료받았던 치과는 가고 싶지 않았다. 친절한 것은 좋았지만 미용 목적의 치료도 은근슬쩍 권유해서 신뢰가 쌓이지 않았다. 연예인도 아니고 치아를 보이며 일해야 하는 직업을 가진 것도 아닌데 멀쩡한 치아에 미용 시술을 왜 하나 싶었다.
하, 또 어떻게 괜찮은 치과를 찾아야 하나? 고민하다가 한 가지 깨달음을 얻었다. 일전에 산부인과를 찾을 때도 동일하게 느꼈던 부분이다. 같은 증상을 가지고도 수술을 권하는 의사, 권하지 않는 의사가 한 병원 안에서도 둘이었던 여성 전문병원의 산부인과랑 미용 목적의 시술도 은근히 권유하던 치과의 동일한 점은 바로 큼직한 규모의 병원, 깔끔한 신축 빌딩, 화려환 외관이었다. 그래, 저 건물 임대료를 내려면 돈을 많이 벌어야 할 거야.
개원한 지 오래되었고, 신축도 구축도 아니지만 굳이 꼽자면 구축에 가까운 평범한 규모의 병원을 찾기로 했다. 검색을 열심히 한 결과 지역 카페 게시판 몇 군데의 정보로 치과 한 곳을 찾았다. 적절한 규모의 크기, 적절하게 오래된 건물, 그렇지만 깔끔하고 환한 분위기와 친절한 스텝분들. 소탈해 보이는 원장님. 신뢰가 갔다.(제발 이번엔 내 촉이 맞기를!) 치아 엑스레이 사진을 찍고 사진을 확인한 뒤 간단히 진료를 하고 왼쪽 아래 사랑니를 발치하자고 하셨다. 현재 너무 아픈 상태라 바로 할 수는 없고 약을 줄 테니 3일 뒤에 뽑자고. 근데 3일 뒤는 내 생일이었다. 끄아아아~ 생일에 치과에 와서 사랑니를 뽑고 싶지는 않았다. 의사는 우물쭈물하는 나를 보더니 이렇게 말했다. 아, 약속이 있으신가요? 그럼 일주일 뒤에 하시죠!
그렇게 일주일이 흘러갔다. 생일 다음날이라도 뽑을 걸 하는 생각이 절로 들만큼 내내 계속 치통에 시달렸다. 사랑니가 썩어서 그 앞에 이를 건드려서 아픈 거라 달리 방도가 없었다. 그저 병원에서 준 약에 플러스 알파로 진통제를 먹어가며 간신히 버텼다. 고통스러워하는 나를 보며 남자친구는 이렇게 말했다. 조금만 참아 사랑니만 뽑고 나면 다 괜찮아질 거야. 그 말을 듣자마자 나는 속사포처럼 아니 그게 아니잖아. 사랑니 뽑고 나면 뽑고 나서 또 아플 거 아니야아아아악.. 하고 발치 이후의 고통을 떠올리며 비명을 질렀다.
위쪽 사랑니 두 개를 뺐던 내 경험은 다시 떠올리고 싶지도 않을 만큼 고통스러웠다. 제일 처음 뺀 사랑니가 제일 아팠다. 뽑고 나면 괜찮을 거라던 의사의 말과는 달리 뽑고 나서 약을 먹어도 어마어마한 고통이 밀려왔으며 얼음찜질을 하느라 얼굴 반쪽이 날아가버리는 것 같은 느낌까지 들었다. 그 병원에서는 사랑니 빼고 다른 시술도 여러 개를 했기 때문에 그 후로도 병원을 계속 가야 했다.
나머지 한쪽 사랑니는 절대 그 병원에서 뽑지 않으리라 다짐하고 다른 병원을 찾아갔다. 그 병원 의사가 남자였는데 은근슬쩍 진료하면서 팔이나 목을 슬쩍슬쩍 터치해서 불쾌함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오죽하면 나중에 진료 후 간호사가 대신 사과를 했을까.(치료 끝나고 그 의사를 고소하지 못한 게 아쉽다 그땐 cctv도 없었음)
그런 이유로 무조건 여자 의사를 찾겠다고 다짐하고 여자 의사가 있는 치과를 찾아 그곳에서 사랑니를 발치했다. 그런데 정말 힘이 달려서 사랑니 못 뽑는 여자 치과의사가 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은 있었는데 설마 하고 넘겼던 내가 그걸 몸소 체험하고 말았다. 간호사가 뒤에서 의사의 허리춤을 잡고 같이 힘을 모아 간신히 내 사랑니를 뺐다. 그것도 조각을 내고 부수고 나서 간신히. 뽑힌 나도 뽑은 의사와 간호사도 모두 고생을 했지만 그런 경험을 했기에 두 번 다시 사랑니를 뽑고 싶어 하지 않게 된 것도 있다.
그 사이 주변에서 사랑니를 뽑은 사람들을 보면 제각각이었다. 매복사랑니야 뽑기 어려우니 그건 논외로 하고 보통의 사랑니의 경우 하루이틀 좀 고생하다 좋아졌다는 사람도 있고, 아픈 것보다도 너무 얼굴이 부어서 어딜 다닐 수가 없었다는 사람도 있고, 뽑고 나서 고생깨나 했다는 사람도 있어서 그냥 이건 사람 따라 다른 것일 수도 있고 알 수 없지만 어쨌든 나는 너무 무섭도 두려웠다. 오죽하면 사랑니 뽑기 전날 무서워서 잠도 안 왔다.
일주일 후 사랑니 발치를 위한 병원 예약 시간은 떼인 돈 받으러 온 사채꾼처럼 나타났다. 빌린 돈도 없는데 오들오들 떨리는 것 같은 마음으로 치과에 들어갔다. 내 긴장된 마음과는 달리 간호사와 의사는 매우 경쾌한 목소리로 이야기를 건넸고, 그들끼리 대화를 나눴다. 기분 탓인 걸까? 쾌활한 솔톤으로 들렸다. 도레미파솔~
발치할게요!(헉. 나는 저 소리가 너무 무서운데, 두 손 꽉 쥐게 되는데 이들에게는 일상적 업무용어일 뿐)
마취 주사를 놓는데, 어 생각했던 거랑 많이 달랐다. 바로 몇 달 전에 신경 치료 하느라 마취 주사 바늘이 잇몸을 찔러댈 때 매우 불쾌하게 욱신거리고 따끔거렸는데 왜인지 그때보다 훨씬 고통이 덜했다. 많이 불편하실 수 있어요. 욱신거리실 수 있어요. 하는 간호사의 말은 마치 '아메리카노 나오셨습니다'처럼 의미 없이 내 귀를 스쳐 지나갈 뿐이었다. 그렇게 멍 때리고 있느라 의사가 질문하는 데 대답도 안 하고 입만 벌리고 누워 있었다. 많이 불편하시냐고 아까부터 의사가 물었는데.. 간신히 대답했다.
워어 워늬여...
그렇게 마취주사를 맞고 마취가 될 때까지 기다리는 시간이 찾아왔다. 마취 주사가 덜 아팠다는 기쁨도 잠시, 나는 너무 긴장해서 심장이 마구 쿵쾅거리기 시작했다. 공황발작이 올 것 같은 기분마저 들었다. 그대로 앉아 있다가는 미쳐버릴 것 같아서 스마트폰을 집어 들고 뭐라도 했다. 가고 싶었던 영화 GV 예매를 하는 데 성공하기 위해 정신을 거기 집중하고 심지어 어렵다는 그 예매에 성공을 해버렸다. 그러자 집중할 곳이 또 필요했다. 심장이 너무 빨리 뛰어서 기절할 것 같았다. 그때 나는 갑자기 멀쩡히 있다 말고 사레가 들려버렸다.
쿨럭.. 켁.. 커헉.. 켁... 켁..
요란한 내 기침 소리에 간호사가 다가왔다. 기침하면 발치하는데 어려움이 있을 수 있다며 감기에 걸린 건지 물어서 고개를 저으며 컥컥 대자 아, 사레들리신 거군요. 하고는 미지근한 마실 물을 한 컵 가져다주었다. 긴장해서 사레가 들릴 줄이야. 간신히 물을 몇 모금 마시며 정신줄을 붙잡았다. 마취까지 하고 여기 의자에 앉았는데 이걸 또 미룰 순 없어. 안돼애애애~~ 다행히 기침은 잦아들고 마취 시간도 타이머가 울렸다.
발치하겠습니다. 의사와 간호사가 다가왔다. 내 긴장감은 최고조에 달했다. 뭔가 둔탁한 느낌이 좀 났다. 살짝 욱신거렸지만 이 정도는 간밤의 치통에 비하면 그냥 습자지 뭉치로 툭 치는 것 같은 정도였다. 의사가 아픈지 묻길래 이번엔 놓치지 않고 아까처럼 워어니여어어.. 라고 말했다. 마취가 된 상태에선 최선의 답변이었다. 아, 아프다고 안 하니 이제 맘 놓고 뽑겠구나. 제발.. 제발... 빨리 시간이 가기만 바라며 두 손을 꽉 쥐었다.
다 하셨습니다. 거즈 물려드릴게요. 거즈 물고 계셔야 하고 침이랑 피는 뱉지 마시고 삼키셔야 해요.
네??? 정말요??(크게 외치며 묻고 싶었지만 마취한 상태로 거즈까지 물고 있어서 말을 제대로 하는 게 영 쉽지 않았다.) 시간의 속도를 체감하지 못하는 다른 약물이라도 같이 나한테 투여한 건가 싶을 정도로 눈 깜짝할 사이에 발치가 끝나버렸다. 시계를 보니 그런 다른 약물을 투여했을 리가 없었다. 정말 1, 2분 정도밖에 지나지 않았다. 내 오른쪽 처치기구들이 있는 곳을 보니 뽑힌 사랑니가 피와 함께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예전에도 그랬었다. 엄청난 고통의 시간을 지난 후 눈물을 훔치며 고개를 돌리면 피와 함께 무서운 기구, 그리고 뽑힌 치아가 뿌리째 있었고 치아 앞부분은 쪼개서 빼느라 부서져 있었더랬다. 어, 그런데 이번엔 달랐다. 아주 많이 달랐다.
놀랍게도, 음 그러니까 내 치아라서 그런 건 절대 아니고 사랑니가 예뻐 보였다. 사랑스럽게 가지런했다.
그제야 나는 치과 의자에 앉아 모니터에 뜬 내 이름과 치아 사진 그리고 오늘의 처치에 단순 발치라고 되어 있던 걸 기억했다. 단순발치 외에는 난발치랑 또 복잡한 이름의 어쩌구 발치 등이 있었으나 나는 단순 발치로 체크되어 있었다. 아, 그래서 이분들이 그렇게 경쾌하게 발치를 시작했구나 싶었다. 난발치와 그 외 어쩌구 복잡한 발치는 환자만 힘든 게 아니라 당연히 의료진도 힘들 것이니.
이를 뽑고 난 뒤 집에 와서도 마취가 풀리면 극심한 통증이 오는 대신 조금 욱신댈 뿐이었다. 그건 내가 상상했던, 이미 겪었던 이전의 고통하고는 전혀 다른 차원의 불편감 수준이었다. 의심이 많은 나는 그래도 하루는 자고 다음날이 되어봐야 정말 안 아픈 건지 알 수 있겠지 싶었다. 다음날도 고통의 수준은 별로 다르지 않았고 양치질도 조심조심할 수 있어서 큰 문제가 없었다. 그제야 나는, 사랑니 뽑는다면서 뽑기 전날 고깃집에 가서 거하게 고기를 먹었던 것이 조오금 부끄러워졌다.
발치 후 이틀이 지난 오늘도 여전히 치과에서 준 약을 먹고 있고 불편감이 없는 건 아니지만 양치하다 건드릴 때 빼고는 이를 뽑았는지조차 모를 정도로 별일 없다. 여름에 갔던 치과에서는 양쪽 사랑니 발치를 빠르면 한 달 아니면 두 달 간격으로 뽑는다고 했었는데 이번에 사랑니를 뽑은 치과에서는 아무래도 당장 아프지는 않아도 남은 사랑니도 뽑는 게 더 낫겠다고 하고, 현재 사랑니 발치 후 아무는 것 보고 6개월 뒤에 뽑아보자고 해서 더 안심이 되었다.
휴, 올 해가 가기 전에 사랑니 하나를 뺐고, 공황발작이 올 뻔하고 긴장해서 사레가 들리는 등 발치 전에 공포감에 압도되었지만 결과적으로는 해피엔딩이라 참 다행이었다. 내년에 뽑을 나의 마지막 사랑니야, 너도 부디 예뻐 보이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