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과 밖
독감에 걸려 반 좀비 상태가 되어 누워 있자니 뭔가를 하기도 힘들었다. 간단한 일만 겨우 처리하고 약을 먹고 누워서 오늘은 푹 잘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가습기에서 뿜어져 나오는 분무를 보며 까무룩 잠이 들었다. 다행히 독감치료제 페라미플루가 잘 들어서 어제처럼 고통스러운 밤은 아니었다. 그래도 목이 부어서 숨 쉬는 게 힘들고 가르랑 소리가 들려왔다.
꿈자리도 사나웠다. 잠을 자는 동안 육체와 정신 모두 재충전 및 청소의 시간을 갖는다고 한다. 아마 이 꿈도 지나간 시간에 대한 내 감정적 정리겠지 하는 마음으로 받아들이고 보니 마음이 조금은 덜 불편해졌다. 그럼에도 꿈에서 느꼈던 억울함과 불편한 감정이 쉽게 사그라들지 않아서 괴로웠다. 꿈에서 나는 전 직장, 그리고 전전 직장 사람들 앞에서 말도 안 되는 상황에 놓인 채 억울함과 분노를 토로하고 있었다.
잠자는 동안 내 감정도 세탁기에 들어가 돌려지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잠시 했다. 그날의 감정일 수도 있고 최근 며칠, 몇 주, 몇 달의 감정일 수도 있다. 행복하고 좋았던 감정은 남겨두어도 사는 데 도움이 되니 굳이 치울 필요가 없을 테고, 불편하거나 아팠던, 멀리 치워버리고 싶었다 감정들이 쌓이고 모여서 세탁기에 넣어 돌려지는 것 아닐까. 그래주면 고맙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동안은 감정이 세탁기에서 물벼락과 세제 샤워를 맞으며 거품에 패대기질 쳐질 때 나도 그 안에서 허우적거리며 온전히 잠겨버려 세탁기 안에서 뱅글뱅글 돌았던 것 같다. 감정이 세탁기에서 탈탈 털려 밖으로 나와 깨끗해질 때까지 구역질을 참아가며 그 안에서 같이 뒹굴었던 것이다.
그걸 이해하고 나서 이제야 달라진 점이 있다. 감정 세탁기 안에 직접 들어가지 않고 바깥에서 감정을 세탁기에 넣고 감정의 종류에 맞는 세탁 코스를 결정하고 세제를 넣고 세탁 버튼을 누르는 위치에 있게 된 것이다. 투명창으로 뱅글뱅글 돌아가는 감정을 지켜보기만 할 뿐 더 이상 그 안에서 같이 돌아가지 않는다. 세탁 종료 소리가 경쾌하게 울릴 때까지 침착하게 기다리면 된다.
감정은 내가 아니다. 이 말을 언젠가 회사에서 들었다. 자신이 정신과(그때는 정신과라고 불렀음) 상담을 받는 것을 스스로 알린 조직장이 저 말을 구성원 면담 때 몇몇 사람에게 했다가 조롱거리가 되기도 했다. 우스꽝스러운 표정으로 '감정은 내가 아니래.'라면서 그 조직장을 비웃던 연차가 낮은 구성원들이 떠올랐다. 그때 나는 어땠었나? 피식 웃었던 것 같기도 하고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이제는 감정은 내가 아니라는 말이 온몸과 마음으로 와닿는다. 감정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고 수용하고, 그 감정을 처리하는 것이 내가 해야 할 일이다. 감정 안에 들어가서 혼재된 채로 엉망이 되는 게 아니라. 오늘 아침 나는 감정 세탁기를 돌리며 따뜻한 물 한잔을 마시며 하루를 시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