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일
오늘은 내가 태어난 날이다. 엄마가 저녁을 드시고 병원에 가려는 사이 산기가 느껴졌고 병원에 도착해서 환자복으로 갈아입자마자 내가 태어났다고, 옷도 못 갈아입고 애 낳을 뻔했다고 엄마가 그러셨다.
나는 오늘도 살아있고, 살아가고 있다. 세상에 태어나기 전 중절 수술로 저 어둠 너머로 사라지지 않았고, 태어나자마자 버려지는 영아유기를 당하지 않았으며, 아동학대를 당하거나, 조부모 또는 친척집으로 보내져서 양육되거나, 이집 저 집을 전전하며 맡겨지지 않았다. 크고 작은 교통사고를 몇 번 당했지만 수술을 하거나 목숨이 위태로운 정도는 아니었다. 간발의 차이로 살아남아서 오히려 행운이었다고 해야겠다.
나는 나를 낳아준 부모님 아래에서 자랐고 별 탈없이 살아가고 있다.
하지만, 불화가 심한 부모님 아래에서 유기 불안을 안고 자랐다. 어느 날 고아원에 버려지거나 이혼으로 부모 중 어느 한쪽을 선택해야만 하는 상황이 올 수 있다는 것을 느끼며 살았다. 내가 태어나지 않았다면 엄마의 인생은 훨씬 더 자유로웠을 것이라는 죄책감도 느끼며 살았다. 자식만 없었으면 내가 이 생활을 이어가지 않아도 될 텐데, 그렇다면 이혼할 수 있는데 자식 때문에 절대로 그럴 수는 없다는 이야기를 반복적으로 듣고 자랐기 때문이었다.
공부를 잘 해서 상장을 받아오는 것, 피아노를 잘 쳐서 콩쿠르에 나가 트로피를 받아오는 것들이 엄마에게 기쁨을 주는 일이었고 그렇게 받아온 상장은 거실 벽면을 채우며 집에 오는 손님들에게 자랑거리가 되곤 했었다. 반대로 그러한 결과물을 얻지 못하면 심한 죄책감에 시달렸다. 언제나 더 높이, 더 큰 목표가 주어졌다. 그 앞에는 무려 '세계적인'이라는 수식어가 따라다녔다. 뭔가를 잘하려면 세계적으로 잘 해야 잘 한다고 할 수 있는 거라는 생각이 자연스럽게 주입되었다.
물론 매일 이렇게 살았던 것은 결코 아니다. 이런 고통은 그저 일 년에 두어 번 정도였다. 그렇지 않은 평범한 날이 훨씬 더 많았고, 행복하다고 마음에 담아 둔 따뜻한 추억도 제법 있다.
예전에 비하면 거의 잉꼬부부처럼 사이가 좋아지신 부모님의 건강한 모습을 보며 이제는 꽤 오래 전이되어버린 불안한 과거와 조금씩 이별하고 있다.
나의 부모님은 안타깝게도 어려서 부모님을 잃었지만 나는 올해도 부모님과 함께생일 케이크를 먹었다.
내 나이보다 어렸던 부모님의 그 시절 불화와 나를 힘들게 했던 일들에 대해 완전하게는 아니지만 일부라도 이해할 수 있고 아파할 수 있을 나이가 되었다.
참, 다행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