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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Who am I Feb 24. 2022

뮤즈가 우리에게 주고 간 것

영화 <아마데우스, 1984>

#1. 여기 악기가 하나 있다. 악기는 탄생부터 목적을 갖고 태어난다. 연주하기 위해 태어난 것이다. 또, 여기 한 명의 아이가 있다. 그 아이는 목적을 갖고 태어났다. 그 아이의 아버지는 음악분야에서 활동은 했지만 크게 성공은 못했던 사람이었다. 그는 아들의 음악적 재능을 키워 성공시킬 생각이다. 아버지는 혹시나 실패할 것을 대비해 몇 명의 다른 아이들을 더 키웠다. 

처음부터 목적을 갖고 태어난 아이는 운 좋게 음악적 재능을 타고난 아이였다. 아버지의 기대에

부응하는 것처럼 무엇을 가르치든 잘 받아들였고, 빡빡한 스케줄도 제법 소화했다. 

아버지는 이 아이가 수익을 낼 수 있는 그 시기까지 어찌 되었든 돈을 벌기 위해 갖은 고생을 했다. 아이에게 들어가는 식비 교육비부터 종종 아프면 들어야 하는 병원비, 그리고 남들에게 무시당하지 않을 정도의 차림새와 사교적 모임에 들어가는 비용을 대기 위해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하나의 목적을 갖고 태어난 아이는 아주 어릴 때부터 네가 우리 가족을 먹여 살릴 것이라는 

이야기를 듣고 자랐다. 그래서 아파도 아버지가 피아노 연습을 해야 한다 하면 하고, 놀고 싶어도

일정이 있으면 가야 했다. 종종 반항하고 싶지만 어쨌든 아버지가 시키는 대로 해야, 밥도 먹을 수 있고 원하는 것도 가질 수 있었다. 그렇게 그 아이는 목적에 맞춰서 잘 길러졌고, 10대가 되었을 때 아버지가 원하는 만큼의 기대에 부응할 수 있었다. 아버지는 그때서야 웃었다. 아이는 마치 잘 길들여진 악기 같았다. 하지만 악기를 연주할 수 있는 사람은 아버지였다. 아버지가 연주하지 않았다면 악기는 스스로 무얼 할지 몰랐을 것이다.


#2. 다른 아이가 한 명 있다. 이 아이는 처음부터 가족의 기대와 멀었다. 이 가족은 소득 수준이

낮다. 부모는 아이에게 크게 기대하지 않았다. 일찍부터 노동으로 돈을 벌기를 원했다. 교육도 

관심이 없었다. 하지만 아이는 공부가 더 하고 싶었고 특히 음악이 하고 싶었다. 그래서 나이가

들자 스스로 도시에 나가 길을 찾기 시작했다. 학비를 스스로 벌어 간신히 음악학교에 진학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음악 실력은 다른 학생에 비해 그렇게 뛰어난 편이 아니었다. 어린 시절부터 체계적으로 교육받은 아이들에 비해 열등감을 느꼈다. 그럼에도 그는 사교모임 등을 통해 인맥을 쌓았고 지위가 있는 사람들에게 운 좋게 발탁될 수 있었다. 그렇게 그는 사회생활을 통해 자신의 위치를 형성해 간다. 그는 재능은 부족했지만 노력하면 될 수 있다고 믿었다. 다행히도 사람들은

자신의 음악보다도 음악으로 맺어진 관계들을 더 중요시하는 것 같았으니 말이다. 그에게 음악은 신분 상승을 위한 도구가 되었다.


만약 이 두 사람이 만났다면 어떤 결과가 나올까? 이런 가정은 영화 <아마데우스>에서 모차르트와 살리에르의 인생에서 모티브를 얻어 써본 것이다. 

천재적인 재능을 지녔지만 수동적으로 살아왔기에 주도성이 없는 사람. 반면에 재능은 없지만 자수성가를 목적으로 살아온 악착같이 살아온 사람. 마치 극과 극을 보는 것 같은 이 두 사람이 가질 수 있는 관계는 적 아니면 친구 두 가지다. 영화에서는 두 사람이 직접 만나 대화하는 신이 적지만 만약 두 사람이 좀 더 이야기를 많이 했더라면 지독한 열등감이나 아니면 동질성을 느꼈을지도 모른다. 두 사람 모두에게는 결핍이 있었다. 영화에서는 살리에르가 모차르트를 질투해, 계략을 쓰는 것으로 비치지만 사실 모차르트는 살리에르가 아니라도, 스스로 추락하는 중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자신을 키운 아버지와 결별한 이후 그는 오랫동안 방황했다고 하니까. 살리에르는 천재의 몰락을 옆에서 지켜보고 증언하는 역할이라고 해도 크게 다를 것 같지 않다. 살리에르는 모차르트의 죽음 이후 서서히 미쳐간다. 그리고 그 유명한 엔딩씬. 그는 정신병원에 있고 그의 곁에 수없이 많은 환자들의 모습을 돌아보며 그는 

“너의 죄를 용서하노라”라는 유명한 대사를 읊는 것으로 끝난다. 그의 대사는 모든 평범한 사람들, 재능 없는 사람들을 위로하는 것처럼 들린다.


#3.  사람들은 모차르트를 타고난 천재 혹은 음악을 위해 태어난 사람 이렇게 말했다

어떤 인생이 작품을 위해 태어난 것이라면 작품도 인생에 딱 맞게 완성되어야 하는 것 아닌가. 마치 악기가 연주를 목적으로 태어난 것이라면, 연주할 수 없을 때 악기의 효용가치는 없어진다. 그런 논리라면 이 천재 음악가의 인생도 음악 창작을 더 이상할 수 없을 때 끝나야 옳다. 하지만 실제는 그렇지 않다. (갑작스러운 사고야 어떻게 할 수 없을지라도) 그는

차마 다 끝내지 못하고 작품을 남기고 죽었다. 음악을 위해 태어난 사람이, 차마 곡을 쓰지도 못하고 인생을 마친 것이다. 인생은 알고 보면, 그의 편이 아니었던 것 아닌가?  다른 이들이 부러워한 것처럼 그렇게 인생이 그의 편에서 항상 그린 라이트를 비추는 행운의 상징이었다면, 

다 쓰지도 못한 곡을 남겨놓고 무덤으로 그를 데려갔을 리가 없지 않겠는가. 

또한, 인생이 살리에르에게 항상 부당했다면, 그는 라이벌의 죽음이라는 호재를 맞도록 했겠는가

그리고 그는 발판 삼아 사회적으로 승승장구했을 수 도 있다. 하지만 그 역시도 마냥 그 기회를

즐기지 못한다. 왜 그랬을까? 단지 실력 차이 때문에?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인생이 한때 모차르트에게 훈풍을 불어서 그라는 배가 나간 걸 수도 있다.

하지만 말년의 그는 곡을 쓰기 위해 자신의 인생과 싸웠다. 더 쓰고 싶은데, 그에게는 시간이 주어지질 않았다. 그의 작품은 저항의 산물이다. 도와주지 않는 운명에 대항해 밀고 나가는 힘. 

놀라운 것은 그의 작품을 듣다 보면, 놀라울 만큼 평온한 부분이 있다는 것이다. 이런 평온은 외부가 아닌 내부에서 오는 종류의 것이다. 그는 평온은 대체 어떻게 나오는 걸까

(프로 예술가는 작품을 작품으로 대할 줄 아는 놀라운 힘이 있나 보다. 이런 걸 보면 아주 잘 만들어진 미니어처 하우스가 생각난다. 실제 사는 집과 닮았지만, 사실은 아무도 살지 않는 집 말이다. 예술로 만들어진 집이 효용을 위해서 이겠는가? 그래서 더 아름다운 건지도 모른다.)

https://youtu.be/5wPJWloT6-g


우리는 사실, 누군가의 성공신화를 듣고 너무 쉽게 믿어버린다. 그 사람은 운이 좋았어. 그 사람은 부모가 원래 돈도 있고 괜찮은 사람이었어. 재능이 있었어. 주변에서 잘 도와줬어. 등등

하지만 그 사람이 이겨낸 것에 대해서는 왠지 추상화를 보는 느낌이다 전기 작가는 모차르트가 어려운 시기를 이겨내고 훌륭한 음악가 롤 성장했다고 쓰고 있지만, 사실 그는 어린 시절 마차를 타고 다니면서 ‘오늘은 제발 피아노 연주를 그만했으면 좋겠다’라고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커서는 ‘오늘도 돈을 벌기 위해 연주를 나가야지’ 이 생각을 하고 나갔는지도 모른다. 그렇게 따지면 그는 생계를 위해 돈을 벌러 갔다가, 돌아오지 못한 가장의 한 명에 불과할 수도 있다. 유명세가 있다고는 경제관념이 부족해 하루 벌어 하루 먹고살았던 그에게 그것이 유일한 밥벌이의 수단이었다. 귀족들의 비위를 맞추는 음악은 무척이나 힘든 일이었고. 생각보다 잘 안 되는 사업이었다. 그의 생계수단이 그의 생명을 단축했을 수 도 있다.


그럼에도, 이 젊은 음악가는 한 가지 생각이 달랐다. 수단으로써의 음악이 아니라, 그 자체로서의 음악이 참 좋다는 것 말이다. 그의 생각을 어떻게 알 수 있느냐고? 그건 그의 음악을 들으면 알 수 있다. 음악을 배웠거나 배우지 않았거나 상관없이 모든 이에게 공감을 줄 수 있는 음악. 듣고 있으면 마음이 편안해지고 행복해지는 그런 음악. 그런 세계가 그에게는 있었다. 그리고 그가 아는 그것을 정직하게 작품에 녹여냈다. 적어도 음악이 그런 역할을 할 때만큼은 그는 아버지의 도구나 수단보다 더 나은 존재가 될 수 있었다. 심지어 운명이 문을 두드리고, 죽음의 사자가 찾아오는 순간에도 그는 계속해서 무언가를 쓰고 있었다. 그리하여 그는 만인의 무덤 속에서도, 묘비 없이도 우리에게 음악을 남겨주고 있는 것인지도. 

하지만 나는 아직도 그의 세계를 다 이해한 사람이 다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가 들려주지 못한 수많은 음악들이 너무나 많았을 것을 생각하면.


살리에르에 대해 한 가지 덧붙이자면, 그가 음악의 맛을 진정으로 느낀 것은 아마도 나이가 들어

모든 것을 놓아버린 후가 아니었을까. 힘없이 그는 떠오르는 음악을 흥얼거리다가. 그것이 그 누구의 작품도 아니고. 그냥 음악 그 자체임을 알게 되었을지도 모른다. 그리하여 그는 비로소 자유로워진 것이 아닐까. 누군가는 그를 열등감의 괴물이라 했지만 나는 다르게 생각한다. 그는 비로소 말년에 정신병원에서 뮤즈의 정체를 알아버린 사람이라고. 알고 보면 조커의 시작이나 크게 다를 것 없는 건지도 모르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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