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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랫목에서 듣는 동화

안녕달 작가의 <겨울 이불> 속에서 ..

by Who am I

안녕달 작가는 최근 유아 어린이 그림책을 잘 아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유명한 작가다. <수박 수영장>

<당근 유치원>, <눈 아이> 등등 아이들에게 익숙한 그림책들을 모두 안녕달 작가의 작품이다.,

우리 집은 <수박 수영장>을 겨울에는 <겨울이불>을 보는데 안녕달 작가의 작품에 잘 표현된 계절 감성이 메마른 감성을 채워주는 느낌이랄까.


<겨울 이불>은 엄마아빠에게도 익숙한 겨울풍경으로 시작한다. 온돌방이 지글지글 끓던 할머니 할아버지 집 풍경으로부터 말이다. 학교 끝나고 할머니 집에 가보니 할머니는 안 보이고 꽃무늬 솜이불이 방바닥을 덮고 있다. 바깥의 꽁꽁 얼어버릴 것 같은 추위를 견디고 온 주인공은 겉옷과 잠바 양말을 휙휙 벗어던지고 내복만 입은 채 이불 안으로 기어들어간다.

놀랍게도 그 안에는 곰이 운영하는 찜질방 공간이 펼쳐져있고, 목욕탕 주인 같은 곰이 반갑게 맞으면서 "왔어?"하고 이야기한다. 곰의 옆에는 개구리 너구리 거북이.. 둘러앉아 수다를 떨며 놀고 있다. 그리고 보고 싶은 할머니와 할아버지가 그곳에 있다.


익숙하면서도 어딘가 새로운 풍경들, 여기에 작가적 상상이 피어난다.

친근한 사람들, 귀여운 동물들, 그리고 이불속에서 귤 까먹고 고구마와 식혜 겨울간식을 먹으며, 할머니 무릎을 베고 잠들던 어린 시절의 추억까지 한결 같이 아름답다.



지금 우리 아이들에게는 내가 어린 시절 겪었던 '할머니의 시골집'은 없다. 아이들에게 할머니의 집은 아파트에 있다. 아이들도 어른이 되어 나같이 기억하는 뭔가가 있을는지 나도 알 수 없다. 지금도 한국 아직도 어딘가에는 동화 속 할머니 집 풍경처럼 따뜻한 온돌방이 있는지 모르겠다. 요즘아이들은 자기들끼리 찜질방에 가서 삼삼오오 모여 놀면서 시간을 보낸다.

나는 다행히도 할머니가 파주에 사셔서, 시골집에 대한 기억은 일부 가지고 있다. (할머니가 도시에 살지 않으셔서 얼마나 다행인가)

물론 80년대~90년대에도 할머니 집은 단층주택이고 많이 현대화된(특히 화장실) 상태였지만, 할머니 집에 가면 축사에서 키우던 돼지와 시골마당에서 키우는 강아지와 어미개가 있었고 뭔가 비밀이 가득할 것 같은 창고와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 서울에 없는 것들이 많았다. 지금도 할머니 집에 대한 풍경은 하나하나가 사진처럼 기억에 남아있다. 할머니 집에만 느껴지는 독톡한 냄새, 할머니가 차려준 밥상 위의 반찬들(평소에는 전혀 먹어보지 못한 간장게장 같은 음식들), 할머니 집에만 있는 오래된 식기와 숟가락, 여름이면 한가득 삶아주시던 옥수수와 감자 그리고 겨울이면 먹었던 붕어빵이나 호떡 같은 간식들 말이다. 왜 그런 것들은 잊히지 않을까. 아직도 할머니를 따라나섰던 읍내 정육점에서 고기를 신문지에 싸주던 그 장면이나 한약방의 약재 냄새, 기름집이나 방앗간애서 나오는 냄새 같은 기억들은 내 기억 속에 고스란히 남아있다. 이제는 그 기억들 마저 구멍 뚫린 사진첩처럼 드문드문 구멍이 나긴 했지만 말이다.

그 가운데서도 한 가지 더 기억나는 것은 , 할머니집에서 잘 때 덮는 겨울 이불이었다.

할머니의 취향이 가득한 화려한 꽃무늬, 무거운 목화솜, 그리고 모서리와 뒷면은 빳빳한 광목 같은 천으로 바느질된 겨울이불. 그리고 누우면 목이 딱딱한 원통모양 메밀 베개는 진정한 짝꿍이다. 서울 집에서는 전혀 경험할 수 없는 그 무거운 이불을 목까지 덮고 나면 어린이는 움직일 수도 없을 정도로 무거웠다. 보통 집에서 덮는 이불이 부드럽고 따뜻한 느낌이라면 할머니 집 이불은 '차가우면서 따뜻한' 낯선 촉감이었다. 엄마가 감기 걸리지 말라고 목까지 이불을 덮어주시면서 가장자리를 꾹꾹 눌러주셨던 기억이 난다. 처음에는 무겁다고 난리를 치다가 결국 잠들고 만다. 아무리 추워도 절대 걷어찰 수 없는 강력한 이불.

출처: 리테리어 공식 블로그. https://blog.naver.com/thereterior/221469710446



종종 꿈을 꾸면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그 공간이, 희미하게 재구성되어 다시 살아나는 것 같다. 어쩌면 나는 40년을 살면서 수없이 많은 공간을 경험했고 이곳저곳 다녔는데, 왜 할머니 집에 대한 기억만 유독 기억에 남아있는 것일까. 그것은 내가 그 공간에 있었던 그 시간이 할머니와 할아버지에 대한 기억들로 얽혀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한마디로 나에게는 의미 있었던 시간들이었기 때문. 그것은 단지 하루 이틀 머무르는 장소의 개념으로는 평가할 수 없다. 10년 20년에 걸쳐 들러도 항상 그 자리에 있는 할머니 할아버지 집이 그대로 있다는 사실이 주는 그 심적인 편안함 말이다. 내 성장기의 시간은 계속 흐르고 변했지만, 할머니 집과 그 안에 있는 물건들은 변하지 않고 있다는 것의 위안 말이다.

그럼에도 할머니가 엄마와 이모 삼촌들을 낳고 무려 50년을 사셨다는 그 집은, 20년 전에 재개발되면서 사라졌다. 두 분은 집을 넘기고 삼촌들이 사는 곳으로 거처를 옮겼다. 지금은 그때의 할머니도 그 집도 더 이상 없다. 우리도 그 후로 그 집에 가본 적은 한 번도 없다. 그렇게 기억 속 장소는 현실 속에서 존재하지 않게 되었다. 그 집에 살았던 사람만이 가진 기억으로 소멸되어 완전히 이 땅에서 사라졌으니 말이다.

(가끔 파주 근처를 차를 타고 지나갈 때 할머니 집이 있었을 만한 장소가 저기였을까 생각해보곤 한다. 하지만 사진이 아니라면 그것을 어떻게 증명할 것인가. )

박완서 작가의 유명한 작품 중엔 '그 산이 과연 거기에 있었을까'라는 제목의 작품이 있었는데 나는 작가가 왜 제목을 그렇게 지었는지 공감했다. 작가의 기억 속의 장소는 더 이상 현실 속의 공간이 아니라는 점에서 말이다. 그러나 현실 속에서 지워졌다고 완전히 지워진 것일까)


만약 내가 글을 쓰지 않는다면, 안녕달 작가처럼 그림을 그려 남기지 않는다면, 이런 평범한 기억들의 모음을 대체 누가 기억해 줄까. 그 장소에 사람과 강아지와 돼지와 감자와 옥수수가 자라는 곳이 존재했다는 것을. 엄청난 역사가 아니지만 온돌에 묻어놓은 것 같은 스테인리스 밥공기 같은 소소하게 우리를 밝혀주었던 그런 삶을 말이다. 어쩌면 기억은 우리 자신 스스로인지도 모르겠다.


나는 이런 것들을 기억하고 싶다. 그리고 다른 누군가도 <겨울이불> 같은 작품을 기억해 주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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