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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의 습작>을 다시 들으며..

음악이 전부였던 시절, 이어폰이 이어줬던 그 인연들

by Who am I

오전에 뉴스를 켜니 과거 전람회의 멤버이자 베이시스트였던 서동욱 님의 별세 소식이

올라와 있었다. 향년 50세. 이 뉴스를 들으면서 문득 세월이 흘렀다는 것이 피부로

느껴졌다. 고등학교 시절 들었던 노래들이 나온 것이 벌써 30년 차라니..

전람회의 <졸업> 앨범에 실려있던 <우리>라는 곡을 다시 유튜브에서

찾아서 들어도, 전람회를 들었던 그때 시점과 내 마음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는데 언제 이렇게 시간이 가버린 건지..

그 사이에 나도 나이가 먹었고, 대학시절의 풋풋한 모습이었던 그분이 벌써 부고 소식을

전하다니 마음이 아팠다.


이어폰과 기억의 습작 그리고 건축학개론


<기억의 습작>을 다시 듣게 된 건 이 노래가 나온 지 20년이 흐른 시점이었다.

우연히 쇼핑몰을 지나다가 <건축학개론>이라는 제목의 포스터를 보고 제목에 의아했던 기억이 난다.

대학강의실에나 나올 듯한 제목의 영화가 로맨스 일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던 터라,

영화가 유명해졌다는 소식에 좀

놀랐던 기억이 난다. 예상을 벗어나는 제목과 스토리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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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속에는 과거 여주인공이 옥상에서 강남을 바라보면서 남주인공에게 이어폰을

건네어주는 내용이 있었다. 후에 이 장면은 영화 <라붐>에서 소피마르소에게 남자친구가 헤드폰을

씌워주는 장면만큼이나 유명한 장면으로 남았는데, 그 무렵에 학교를 다녔던 사람들에게

이어폰으로 같이 음악을 듣는다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 다들 알았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싶다.


시대별로 음악을 듣는 방식은 10대와 20대 대중문화와 깊은 관련이 있었다. 40년대~60년대 LP로

음악을 들었던 세대, 카세트 플레이어를 들고 다니면서 노래를 듣던 세대, 마이마이와 같은 휴대용

플레이어에 이어폰을 끼고 들었던 세대, 휴대용 CD플레이어와 MP3로 음악을 들었던

세대는 모두 각각 다른 10대와 20대 시절 추억을 갖고 살아가니 말이다.


다운로드 (2).jfif 2000년 무렵 인천공항에 에릭과 문근영의 애니콜 광고가 벽을 가득 채울 정도로 크게 걸려있던 기억이 난다. 휴대전화로 음악을 듣는 이미지는 '신세대'의 상징이었다.


80년대와 90년대에 휴대용 플레이어로 내 음악을 들을 수 있다는 것은, 당시 학생들에게

작지만 가장 큰 사치 중에 하나였다. 설에 받은 용돈을 모아 겨우 마련할 정도였으니 말이다.

거기에 새로 나온 가수들의 앨범에 들은 가사집의 깨알만 한 가사를 읽는 재미까지..

긴 연휴로 여행을 갈 때, 가족 여행이 지루할 때, 친척집에 갈 때, 수학여행 갈 때, 지하철이나

버스에서 이런 기기를 들고 다니면서 음악을 듣는다는 것은 귓속에서 펼쳐지는 개인적 공간 만들기나

다름없었다. 나의 취향에 맞는 음악을 골라서 담아 들고 다닐 수 있다는 것은 큰 행복이었다.

(스티브 잡스가 아이팟을 처음 만들게 된 이야기가 기억난다. 잡스는 음악을 좋아하는 10대 딸에게

기본 1000곡은 넣을 수 있는 신박한 기기정도는 있어야 하지 않냐고 했다는데.. IT 기업 수장인

아빠가 딸에게 주는 '선물'이 결국 세상을 구했다는 전설에 가까운 이야기...)

휴대용 음악기기라기보다는 차라리 감성박스라는 말이 나았을 듯하다. 그렇게 스마트 폰이 없던

시절조차 MP3는 이어폰과 함께 음악은 가방 속에 항상 들어있어야 했다.

(2002년 MP3 플레이리스트: 너바나, 라디오 헤드 그리고 콜드플레이, 오아시스..)

친구가 우연히 나에게 준 아이리버 MP3.. 미키마우스 귀를 돌리면 음악이 나왔다.

그런 세대 사람들에게 영화 속에서 <건축학 개론>에서 이어폰을 수지가 주인공에게 주면서 같이 듣자고

한 그 장면의 의미는 '앞으로 너에게 내 마음을 보여줄게' 이렇게 말하는 것과 크게 다름없이

들렸을 것이다. 더군다나 너와 나의 추억과 미래를 이야기하는 <기억의 습작>이라니..

뻥 뚫린 옥상에서 듣는 그 아련한 가사와 목소리와 분위기가 이 영화를 전설로 만들었다는 모두가

아는 사실이다.



5호선을 타고 매일 아침 출근하던 시절, 이어폰을 끼고 지하철을 오가다가, 문득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오르내리는 사람들 모습이 어떤 음률에 맞춰져서 하나로 느껴질 때가 있었다. 사람의 흐름이

음악이 흐르는 것과 겹쳐지는 나만의 상상이 오디오 안에 펼쳐지는 날엔, 그래도 힘들고 추웠던

출근길이 조금은 편해지는 것 같았다. 팍팍한 세상이었지만 배경음악을 하나 바꾸면 그래도 아름다운

그림이 되어 다르게 보였다.

마찬가지로, 피곤했던 어느 날 버스 뒤에 앉아서 우울했던 나에게 같이 듣자며 이어폰을 전해준 그

친구들.. 그들도 다들 많이 변했을까.

어쩌면 그런 추억들이 남아서 <기억의 습작>의 한 편이 된 것은 아닌지 뒤늦게 생각해 본다.


고 서동욱 님의 영면을 기도합니다.



많은 날이 지나고 나의 마음 지쳐갈 때


내 마음속으로 쓰러져가는 너의 기억이 다시 찾아와


생각이 나겠지


너무 커버린 미래의 그 꿈들 속으로


잊혀 가는 너의 기억이 다시 생각날까


<1994, 전람회, 기억의 습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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