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현재 선생님의 '힘 빼고 말하는 법'
이현재 선생님의 수업이 시작된 한 달이 채 되지 않아 나라에도 꽤 큰 변화가 몇 건 있었다.
채윤이는 예전에 비해 뉴스를 좀 더 관심 있게 지켜보게 되었다. 그것도 제일 재미없다는 정치 뉴스를
말이다.
확실히 정치는 복잡하고 어렵고 깨끗해 보이지 않는 어른들의 싸움이긴 했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이런 주제에 대해 좀 더 말하는 것이 덜 거북하게 느껴진다는 사실이었다. 왜 우리는 말을 하기도
전에 일단 금지부터 시켰을까.
채윤은 지난 기억들을 떠올려보았다. 채윤의 집에는 직장노조에 가입한 삼촌이 한 명 있었고 아버지는
자기 동생임에도 삼촌과 사이가 좋지 않았다. 아버지는 사무직이었고 삼촌은 생산직이었다. 그 사실만으로
서로의 의견은 크게 엇갈렸다. 삼촌과 아버지는 명절이나 제사 때 서로 만나면 각자의
주장만 하다가 기분이 안 좋아서 돌아가곤 했다. 이 두 사람에게는 싸움을 말려줄 할머니가 더 이상 없었다.
지지난 해에 할머니가 돌아가신이후에는 서로를 향한 날을 감추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채윤이는
삼촌이 크게 나쁘지 않았다. 삼촌은 알고 보면 채윤이에게 다정한 사람이었다. 그렇다고 채윤이는 아빠를
싫어하지도 않았다. 아빠는 평소에 채윤이의 의견을 애써 들어주려고 노력하는 사람이었다. 딱히 아빠가
가부장적이거나 권위적인 사람도 아니었다. 만약 애초에 두 사람의 인성이 나빴다면 채윤이는 기대도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두 사람이 왜 만나기만 하면 그렇게 언성을 높이는지 알 수 없었다. 채윤이는
사람에게는 참 다양한 면이 존재하는구나라고 생각했다. 아빠가 평소에 이성적이려고 노력하는 사람이라고 해서 또 다른 누군가에게 그렇게 대하는 법이라는 것도 아니라는 것도. 채윤이에게 다정한 아빠지만, 직장이나 형제 관계에서는 다를 수도 있다는 걸. 채윤이가 고등학생이 되고 공부로 인해 다른 것에 관심을 끄게 되면서 채윤이는 명절이나 제사 때는 자연스럽게 자기 방에 들어가서 이어폰을 끼고 공부에만 집중하려고 애썼다. 채윤이는 아빠와 삼촌 어느 쪽도 편을 들 수 없었다. 채윤이가 정치에 대해서 거부감을 갖고 가급적 입을 다물게 된 것은 곧 아빠와 삼촌의 태도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한편으로 그런 채윤이를 변화시킨 것은 이현재 선생님이었다.
채윤이의 경험을 떠올려보면 이현재 선생님은 화를 내지 않고도 상대방을 설득시키고 자신의 주장을 전달하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그런 것이 대체 어떻게 가능한 것일까? 선생님에게는 온화하지만 단호한 강한 심지가 있었다.
항상 논리 정연했고 복잡한 상황도 잘 정리했다. 어려운 교과내용이나 정치 개념도 선생님이 정리하면
놀랄 정도로 깔끔했다.
무엇보다도 이현재 선생님은 학생들이 날리는 각종 질문들도 두려워하지 않았다. 이현재 선생님은
보통 한국사람들은 토론하는 것이나 자기주장을 말하는 것에 지나치게 힘이 들어가 있다고 지적했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도 지나치게 예민했다. 선생님도 처음에는 말하기가 안돼서 거울을 보고 시작했다고.
그러다가 어느 순간에 자연스러워진 거라고 했다. 사람은 어떤 식으로도 말하지 않으면 죽을 수도 있다 했다.
선생님이 보기에 토론이나 말하기가 어려운 건 어릴 때부터 자연스럽게 몸에 익지 않은 탓이었다. 채윤이네도 그렇지만 많은 한국 가정에서는 저녁식탁에서 긴 이야기를 하는 것을 서로 부담스러워하는 분위기였다. 어떨 때는 너무 피곤해서. 어떨 때는 각자의 생각이 너무 달라서 여러 이유에서 말하기는 금기에 가까웠다. 선생님 말에 의하면 그런 가정에서 자란 대부분의 아이들이 커서 막상 사회에 나가서는 제대로 말하는 법을 모른다고 했다. 그래서 상사나 윗사람이 부당한 것을 지시하거나 동료에게 사기를 당해도 힘 빼고 자기 생각을 말하는 법을 모르는 거라고. 그래서 여자들은 말하기 전에 눈물부터 터지고, 남자들은 주먹부터 나간다고 했다. 사실 그렇게까지 할 필요도 없는 작은 일들에 말이다. 그런 조직에서는 대부분 말을 하지 않으니 눈치 빠른 여우 같은 술책들만 살아남는다.
그에 비하면 이현재 선생님에 의하면 '말하기'란 물리치료사가 남의 몸을 만지는 것에 거부감을 갖지 않거나, 치과 의사가 벌린 입과 드릴 소리에 익숙해지거나 마찬가지로 기술적인 부분이었다. 영업사원이 고객을 상대하는 일, 물건을 팔고 매출이익에 민감해지는 것처럼 배우면서 점점 좋아지는 능력에 불과했다. 이현재 선생님은 말하기 능력이 얼핏 사람의 성격이나 심리상태 내면과 관련된 복잡한 문제처럼 보이지만 막상 배우고 나면 물건을 잘 정리하는 능력이나 다름없는 사회적 기술에 불과하다고 했다. 세상에는 몇몇 학자들이나 다룰 만한 정말 복잡한 사회문제도 있지만 대부분은 잘 정리하는 단계에서 이미 정리된다는 것이다. 우리에게 상대의 이야기를 들어줄 조금의 인내심과 이해력과 여유가 존재한다면 말이다. 사실 말하기의 반대쪽에 있는 '듣기'란 그렇게 어마어마한 능력은 아니라고.
선생님은 정말 상대와 대화하기 힘들면 차라리 글로 쓰라했다. 그러면 적어도 화를 한 단계는 낮출 수 있다. 속사포처럼 나가는 비난과 막말도 조금은 피해 갈 수 있을 거라고. 조건은 카톡이 아니고 연필과 종이에 써야 한다는 것.
실제로 이현재 선생님과의 수업시간에 어떤 학생은 "선생님은 좌파이신가요?"라고 물어보는 도발적인 학생도
있었다. 지금 대한민국에서 이슈화되는 정치 이슈를 직접적으로 물어보는 학생도 있었다.
선생님은 자신이 좌파인지 물어보는 학생에게 잠시 생각해 보더니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예전에 어떤 학자가 언어는 곧 상징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 '빨강'이라는 말은 빛의 스펙트럼이라는
대상을 임의로 나누어 놓은 사람들이 필요에 의해 만든 상징적인 기호인거지. 어떤 누구도 실제 스펙트럼에서 분산된 다양한 자연의 색 가운데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정확한 빨강인지 확답할 수가 없다. 미술을 하는 학생들은 알겠지만 한 가지 색에도 엄청나게 많은 종류가 있지. 그렇지만 우리는 그것을 다 합쳐서 '빨강'이라는
색으로 부른다. 정치적 입장에도 자연의 색만큼이나 다양한 입장들이 존재한다는 것이 사실이지. 나는 고등핛교 교사이니 교육에 관한 부분에 분명한 내 입장이 존재한다. 그러나 그것만이 정답이라고 생각한 적은 한번도 없다. 사람들을 하나로 규정하고 묶으려는 시도에는 선생님은 반대한다. 여론조사와 투표는 어디까지나 수단에 불과한거지 목적이 아니다. 너희들이 정말로 관심을 가져야 할 것은 우리나라에는 한 가지 정치세력만 있어야 된다고 말하는 사람들이지. 서로가 의견을 교류할 시도를 막고 폭력적으로 행동하는 사람을 저지하는 것이 한국의 헌법이다. 입으로만 민주주의를 말하는 사람들을 잘 가려내고 피하는 눈을 기르길 바란다"
역시 선생님이 맞았다. 채윤이는 오는 명절에는 삼촌과 아빠를 위해 '형제간의 대화의 규칙을 정하는 법'을
서로 종이에 쓰도록 시켜야겠다고 생각했다. 나와 우리의 헌법은 가족관계에도 필요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