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측할 수 있는 것과 예측 불가능한 것. 그 사이에서 고민하다
요즘 유행하는 학습법들이 대체로 그렇듯, 얼마 전부터 나는 AI를 체스 선생님으로 모시고 체스를 배우기
시작했다. 확실히 AI 선생님이 좋긴 좋았다. 잔소리도 안 하고 화도 안 내니까. 아무리 이상한 수를 놓아도
선생님은 다시 생각해 보세요 만 말할 뿐 100번도 기다려 주니 말이다. 나는 이 착하고 인내심 깊은
선생님을 모시고 체스 퍼즐을 내가 원하는 만큼 무제한으로 풀 수 있었다. 체스 닷컴에서 제공하는
체스 퍼즐 중에는 딱 한 두 수 만 놓으면 체크메이트를 시킬 수 있는 문제가 무한 제공되는 데, 거기에
빠지면 두 시간은 마치 10분처럼 지나간다. 거기다 잘 모르면 힌트도 제공하고 잘 모르는 초심자는
답도 가르쳐준다. 말 그대로 초심자가 스트레스 없이 게임을 승리하는 법을 훈련받는 셈이다.
그런데 게임에 빠지다 보니 한 가지 생각이 들었다. 내가 게임을 계속할 수 록 나는 인공지능이 체크메이트라고 결정짓는 기준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다는 것이다. 체스는 생각보다 복잡한 게임이라서 목적은
킹을 잡는 것이지만, 킹한테 대놓고 달려들지 않는다. 단지 킹 주변에 도망갈 칸이 전혀 없이 두 기물에게
공격받거나 코너에 몰리면 패배를 선언하는 식이다. 나는 반복되는 퍼즐 속에서 이 AI가 원하는 다음 수를
'예측'할 수 있었고, 그러면 AI는 나에게 칭찬을 해준다.
하다 보니 어떤 문제는 쉬웠지만, 어떤 문제는 왜 이게 체크메이트 일까? 이해가 안 가는 문제도 있었다.
그러나 퍼즐 게임은 단답형이라 일일이 설명해 주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일부는 때려 맞혀서 운 좋게
맞는 경우도 존재했다. 나는 궁금해졌다. 만약 인공지능이 아니고 사람이 가르쳤다면 어땠을까?
나는 질문을 했을 것이고, 상대방은 이유에 대해 설명을 했을 것이다. 그래, 별거 아닌 그 차이가
중요한 것이다. 왜?라는 그 말.
학창 시절에 배운 철학책에 따르면 우리의 생각은 경험적 추리와 연역적 추리로 이루어진다고 한다.
그렇다. 우리가 체스같이 어려운 게임을 배우는 방법에는 원리를 배우는 것과 무수히 많은 연습
두 가지를 다 필요하다. 우리는 실전 없는 이론만 달달 외워서 게임을 할 수 없고, 오로지 경험만
가지고 전법 없이 달려들지도 못한다.
따지고 보면 나의 AI 선생님은 수많은 데이터에 기반한 학습을 나에게 적용하고 있는 셈이다. 사람들은
같은 상황이면 백이면 백 똑같이 판단할 그런 예측가능한 수를 그는 훤하게 알고 있으니 말이다.
그러나 그 많은 데이터를 추출해 봤을 때 아주 명백한 한 가지 수를 추출한다는 것은 가장 확실한 것이면서도
나머지 가능성과 의문을 없애는 지름길이기도 하다. 답은 오직 한 가지니까.
게다가 나 같은 저 레벨이 무슨 반박을 하겠는가.
재밌게도 나는 체스 닷컴 창시자는 인공지능에게 체스를 학습시켰고, 나는 그 학습된 인공지능에게
학습받으면서 이 선생님의 의도와 취향을 배우게 된다는 것이다. 나는 어떻게 하면 좀 더 정답을
많이 낼 수 있는지를 알면 알 수록 점수 보상을 받는다는 것에 익숙해져 버렸다.
내가 인공지능을 배우는 만큼 인공지능도 나를 파악하고 있었고, 아마도 나는 내 선생을
이긴다는 것이 거의 불가능한 일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치사하게 한 수를 무르는 편법을 쓰거나 힌트에 도움을 제외한다면 말이다.
나는 이런 학습 방식이 요즘 배우는 영어공부 방식이나 아이들이 디지털 학습에도 고스란히 적용된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무엇을 판단한다는 것은? 무엇이 답인지 안다는 것은? 대체 무슨 뜻일까?
그것은 어떤 관점에서 원리와 개념을 동반한다는 것, 어떤 관점에서 대부분의 사람들이 생각하는
상식에 기반한다는 것 두 가지를 다 의미하고 있다. 그렇다면 디지털 학습에서 대부분 이루어지는
답 고르기 스타일의 문제 풀이는 일종의 객관식 문제의 확장판이 아닐까. 문제 풀이도 쉽고
채점도 쉽다는 단점이 있고, 복습도 무한 반복 가능하지만 중요한 것은 원리를 알기 위해서는
우리는 굳이 '머리'를 써야 한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엄청난 학습양에도 불구하고 답이 답인지 설명할 수 있는 이유를 설명하지 못한다면, 우리의 학습은
확률이 좀 높은 뽑기에 불과하다고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특히 언어학습에서도 상대화자의 예측 불가능한 질문에 나올 수 있는 모든 경우의 수를 따져 가장
적합한 것을 고른다는 것은 이론상으로 거의 불가능한 것이나 다름없다. 중요한 것은 그 상황을
우리가 직접 '판단' 해야 한다는 것이다. 내비게이션에서 실 교통상황에 맞춰 운전하라고 말하듯
말이다. 사실 그것이 제일 어렵다. 그 많은 정보 가운데 뭐가 맞다는 것을 안다는 것.
얼마 전부터 사람들이 카카오톡 프로필을 온통 chat gpt의 지브리 풍 그림으로 채우기 시작했다.
단 몇 분이면 애니메이션 스타일의 본인의 얼굴을 가질 수 있다니, 충분히 재미있는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남편은 시키지도 않았는데 나와 아이들이 찍혀있는 사진을 잔뜩 변형해서
보내주었다.
그러나 내가 생각한 것은 내 초상권에 대한 문제만은 아니었다.
그 귀엽고 잘 그려진 그림은 내 얼굴인가? 에 대한 의문이다. 가령 GPT가 주어진 사진을
바탕으로 젊은/ 안경/ 긴 머리/ 특정 화풍으로 가장 비슷한 결과를 추출해서 작품을 만들었다고
하자. 나는 나와 조금은 닮은 그 그림이 썩 나쁘지는 않지만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을 배반하는 것을
안다. 휴 프로필 사진이 나를 많이 안닯아서 다행인가.
그림 속의 나는 젊고 귀엽고 자랑하고 싶을 정도이지만 현실의 나와는 비슷할 뿐 일종의
거짓말이다. 말랑말랑하고 부드러운 현실과는 사뭇 다른 현실의 모습.
만약 어떤 범죄자가 페이스북 프로필 사진으로 이처럼 귀여운 프로필 사진으로 꾸며놓았다고 하자.
우리는 그 사람의 실체적 진실이 무엇인지 과연 알 수 있을까?
다른 한편으로 나는 약간 소름 끼치는 사실을 생각했다. 모든 사람의 얼굴이 다 지브리 풍으로
웃고 있는 세상 말이다. 이 프로필 사진은 튀는 것도 싫고 남과 다른 것도 싫은 사람들의 얼굴을
복사해서 붙여놓듯이 그렇게 일반화된 스타일, 특히 한국사람들이 좋아하는 '유행' 편승
문화 말이다. 내 얼굴조차 내 거가 아니다.
"이번에는 '지브리 스타일'로 바꾸어 봤어" 하는 하나의 대상일 뿐이다.
인공지능은 그런 것일 테다. 나를 만 가지 데이터로 분석해서 '학습 불능자'라고 판단하는 그 경험치 말이다.
그러나 나는 다시 궁금해졌다. 그런 만 가지 데이터를 다 합쳐놓은 것이 나인가?
대한민국에 98퍼센트가 따르는 선택지가 있다면 나머지 2%를 따르는 사람은 과연 뭘까?
인공지능이 특히 싫어하는 학생이 나 같은 예측불가능한 학생이겠지.
우리가 할 수 있는 가장 현명한 선택은 다른 학습법과 마찬가지로 인공지능이 효율적이고 저렴한 수단이라는 것을 깨닫는 그것이 아닐까. 기존의 지식들을 배우는 방법과 병행해서 써야한다는 것. 그게 정답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