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게 쓰레기를 던진 사람에게

포기하거나 싸우거나.

by Who am I

오랜만에 돌아온 김에 좀 더 밝은 주제로 이야기를 시작해야 하는데

이런 주제라니 독자님께 죄송하다. 하지만 나는 이 이야기를 지나친 우울 모드로

끌어가려고 쓴 게 아니다. 나는 그보다는 어이없이 쓰레기를 맞는 어이없는 상황에서도

어떻게 하면 웃으며 그 상황을 '작파' ( 무엇인가 부수어버림, 중단 중지의 뜻) 해버리고 가던

길을 갈 수 있는지 그 방법을 이야기하고 싶어 이렇게 글을 쓴다.


어떻게 하면 그런 일을 당할 수 있냐고?

첫 번째와 두 번째는 실제 상황이고 다른 하나는 그런 상황을 비유한 것이다.


작년 가을 나는 분리수거장에서 쓰레기를 버리고 있었다. 우리 아파트 분리수거장은 나무로

지은 가건물인데 긴 나무판자를 가로 세로로 짜올 린 형태다. 천장은 비가 올 것을 대비해

막아놨지만 벽면은 나무 사이로 뚫린 공간이 많다.


그날 나는 아무 생각 없이 플라스틱과 비닐을 분리해 버리다가 분리수거장 입구 쪽으로

거대한 트럭이 오는 것을 보았다. 트럭의 옆면은 나가는 입구 쪽을 막았고 나는 잠시 동안 밖으로

나갈 수 없어 당황했다. 황당한 것은 그다음 순간이었다. 무언가 뿌리는 물줄기 같은 것이

가건물 위로 쏟아지기 시작했다. 에잇 이게 뭐야라고 할 틈도 없이 알 수 없는 그 물줄기로

샤워를 한 나는 얼마 지나서야 그것이 수목 방제용 농약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제야 낮에

작업자들이 농약통을 메고 길에 다니면서 나무에 약을 뿌리던 것이 기억났다. 그때

아니 한가한 오전에 뿌리지 아이들이 하교하는 오후에 뿌리나 이 생각을 했었는데

이번에는 분리수거장 주변에 나무가 있다는 이유로 사람이 있는지도 소독차에 있는

소독약을 가건물 위로 뿌린 것이었고, 가건물 사이의 공간이 많으니 내가 하필 그 자리에서

고스란히 맞은 것.


나의 1차 반응은 물론 화가 났다. 나는 작업자에게 소리를 질렀다. 아니 왜 사람 있는데

뿌리는 거예요? 작업자는 달아나면서 외쳤다. 사람 있는지 몰랐다니까~

집에 돌아와 남편에게 이야기했다. '옷값이라도 물어내야 하는 거 아냐?'

하지만 내 마음은 그게 아니었다. 돈 이상으로 짜증이 올라왔다.

샤워를 하면서 내 피부가 걱정스러웠다. 수목방제약을 뒤집어썼는데 괜찮은 걸까?

인터넷에서도 찾아보니 간접적으로 맞은 사람은 있지만 나처럼 정통으로 맞은 사람은

없는 듯했다. 입주자 카페에도 글을 올리니, 사람들이 참 안되셨네요. 샤워하고 똥 밟았다고

생각하세요. 이런 댓글이 주였다. 관리사무소에서는 죄송하다고 다음에는 작업자에게

주의를 주겠다고 그게 다였다.

하지만 그런 걸로 내 마음이 덜 속상했을까? 그렇지 못했다. 다행히도 씻고 나니

큰 문제는 일어나지 않았고, 그러나 이런 상황을

어떻게 판단하고 지나가야 하는지 나는 알 수 없어 그냥 흘려보내고 말았다.


다른 하나는 정말로 음식물 쓰레기를 맞은 일이다. 내가 사는 아파트 윗 집에는 비만 오면 음식물을

베란다 창 바깥에 버리는 신기한 습성을 가진 사람이 한 명 있다. 비가 오는 여름이면 특히 심해지는데

그 종류도 다양해서 베란다 창틀 전체가 끈적거리는 오물로 덮인 적도 있었다. 창문에 튀는 건 덤.

그러나 누가 그런지 알 수 있었을까? 알 수 없었다. 입주자 카페에 글을 올려 대략 추정을 해볼 수는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증거를 잡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다. 그렇게 주기적으로 떨어지는 쓰레기를

치우며 그때마다 원망하는 수밖에 없었다.

아래 윗집이라고는 누가 사는지도 모르는 아파트에서 누가 옆집에 대마를 키우는지, 범죄가 일어나는지

알 게 무엇인가. 어떤 노인이 치매에 걸려 밤마다 음식물을 버린다고 해도, 아이들이 먹고 버리는 음식을

던진다고 해도 잡아낼 길을 전혀 없어 보인다.


마지막으로 다루는 사건은 정서적인 오물을 우연히 맞은 경우다. 눈에 보이는 쓰레기보다 더 견디기 힘들다.

나는 그다지 멀지 않은 한 다리 너머 인간관계 가운데 한 명이 심각한 분노장애를 안고 사는 것을 목격하고 산다. 그 분노장애가 향하는 곳은 어이없이도 그 집에서 가장 약자인 어린 자식이다. 그렇게 파렴치하게 매일 아이에게 화풀이하는 사람을 보면서도 나는 손을 쓸 위치에 놓여있지 않다. 나는 그저 못 본 척 살아가는 게 정답이라는 말만 듣고 사는 중이다.

그러나 이미 다 봤으면서 못 본 척 살아가는 것도 사실 무척이나 괴롭다. 마치 그 사람이 나에게 보이지

않은 쓰레기를 던진 것 같은 기분이 든다. 그렇게 집에 돌아오면 나는 마치 몸을 직접적으로 맞은 것처럼

몸이 아팠다. 마음이 아픈 게 몸에 직접적으로 온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 스트레스가 몸을 때린 것 같았다.

며칠을 그 후유증을 안고 잊어버리려고 노력하며 산다. 그러나 피할 수는 있고, 희미해질 수는 있어도

본질적인 상처는 나에게도 남아있다. 그런 상처는 불면과 불안으로 온다. 폭력이란 게 단지 당사자들

문제가 아니라 주변사람들에게도 정신적인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나는 깨달았다.

나도 그런데 그 집에 사는 사람들과 아이는 대체 어떻게 사는 걸까. 나는 상상도 할 수 없다.

마음 한편에는 침묵하는 사람들 모두가 비겁자 같다. 그러나 깊은 사정까지 모두 들어보지 않는 한

나는 그냥 외부자에 불과할 뿐이다.


나는 아무도 답변해 주지 않는 이런 문제에 대해 스스로에게 답을 해야 했다. 그러지 않는 한 나는 계속

화만 내고 있을 테니까. 그리고 답변한 내용은 길게 분석하지 말 것이라는 이었다. 그래!

똥은 똥이고 쓰레기는 쓰레기다. 똥을 오물이라고 하고 쓰레기를 폐기물이라고 순화한다고 바뀔까?

아니다. 그냥 그것은 덩어리다. 누가 왜 무엇을 어떻게를 분석할 수 있을까? 아니다. 그건 그냥

우발적인 것. 그뿐이다. 거기에는 뭐가 없다. 그냥 던져진 덩어리만 있을 뿐이다. 던진 사람도 모르지만

던져진 존재에도 이유가 없으니 그 자체가 쓰레기인 것. 쓰레기가 갈 곳은 결국 휴지통뿐이다. 내 버려진

감정도. 아깝게 지나간 시간도. 잘 버리고 잘 날리는 수밖에 없다. 나는 그렇게 상황을 정리했다.


그렇게 나는 눈에 보이는 세 개의 작은 상자를 만들어야겠다고 결심했다. 하나는 해결. 다른 하나는 보류. 다른 하나는 말 그대로 쓰레기 통이다.

(내 감정 쓰레기 통은 사람이 아니라 작은 상자가 될 예정이다. 이 상자에는 해결이라고는 없는 우발성 사건이 들어갈 것이다.) 나는 작은 쪽지에 적어 매일 그 상자에 넣으려고 한다. 부디 해결 쪽이 더 많길 바라며.


나는 불완전한 존재니까, 나에게 닥치는 일도 종류를 가리지 않고 오는 것이다. 내가 신이었다면 모든 것을

해결했겠지. 그러나 그렇지 못하니까. 안 되는 일은 안 되는 대로 보고 하하 웃어버리는 수밖에.

합리적 정서행동치료를 창시한 알버트 엘리스는 비합리적인 사고와 신념의 종류에 Must와 Should를 둔다.

모든 불행한 사건 (A)에는 대응하는 사람의 반응 (B)가 존재하고, 그 결과 나의 반응(C)이 나오는 거라고.

반드시 무엇을 한다와 해야 한다는 자체가 비합리적이라고. 그렇게 따지면 남과 나에 대해서도 조금은 유연해질 수 있을 것 같다. 아무리 힘든 일이라도 B라는 나의 선택의 여지는 남아있다.

그렇게 압박감을 줄이면서 상대가 폭력적이라도 나 역시 폭력적이 되지 않도록 조절하는 해야 한다고 책은 말한다.


나의 분노는 일회성인가?


어릴 때는 길에서 나에게 장난 거는 아이에 대해 참아내지 못했다. 친구들과 놀다가 내 가방만 혼자 버려진 것도 싫었다. 중학생 교실에서 나에게 종이뭉치를 던지는 애들도. 나는 그들을 향해 웃지 못했다. 나는 그럴

만한 여유가 없었으니. 그래서 나는 약자였다.

그러나 나는 이제 어른이다. 만약 내가 지금 시대에 그런 아이들을 다시 소환해 폭력적으로 푼다고 한들, 요즘말로 참교육 한들 나는 나아질 것인가? 나는 과거의 그 아이들과 지금의 생각 없는 아이들을 안다. 어른 중에도 아이보다 못한 사람도 많다. 어쩌면 그 둘은 대칭을 이룬다. 생각 없음과 폭력적인 진압. 자극과 반응. 이것은 단지 나이 먹고 힘이 세졌다는 것의 차이에 불과하다.

나이가 들면서 정말로 생각 없는 아이든, 생각 없는 아이 같은 어른이든 바꾸고 싶다면 아주 유효한 한방. 유효한 힘. 정확한 지식, 정확한 저지력 이것만이 효과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힘의 균형처럼. 단단한 저지력이 있을 때 함부로 하는 행동도 없어진다.

그러려면 나부터 정신적으로 단단해야 한다. 정의란 추상이 아니고 실질이니까. 유효한 한 방의 힘이 있을 때까지 나아지기를 기다리고 포기하지 않는 것. 자신을 믿는 단단한 마음. 자기를 존중하고 사랑하는 마음이 잘못되고 부당한 것들을 바꿀 수 있다는 것을 다시 한번 깨닫는다.

본인들이 아무리 그렇게 엉망으로 바꾸어도, 사람이란 생각보다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다는 것을 믿도록

포기하지 않아야 한다.


20250409_145159.jpg 베르톨트 브레히트 [억척어멈과 그 자식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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