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은 생명이다. 세상에는 수많은 사물이 있지만 우리가 이름을 부르지 않는 사물은 의미를 부여받지 못한다.
예를 들어 내가 아이를 부를 때 00아~하고 부르는 것과 야~! 하고 부르는 것은 얼마나 다른가. (후자는 분명히 사고 친 후에 나도 모르게 내 입에서 튀어나오는 반사신경언어라고 해두자)
우리 동네에는 우리 꽃 식물원이라는 곳이 있다. 그곳에는 아주 작은 꽃들도 모두 우리말로 된 이름을 하나씩 명찰로 달고 있다. 그 이름을 붙여준 사람들은 식물학자나 배운 사람들도 아니다. 그저 산과 들에 피는 꽃들에게 '있는 그대로의 이름'을 달아준 평범한 사람들이었다. 애기 오줌 똥풀이나 개불알 꽃, 말 오줌 때, 종이꽃 같은 이름을 고상한 분들이 붙였겠는가. 그래도 각양각색의 꽃들을 보다 보면 자신들의 이름은 없어졌을지언정 꽃들에게 하나하나 이름을 달아주었던 옛 분들의 정성 어린 마음이 전해진다. 이름을 지어준 덕분에 그 꽃들은 잡초가 아니라 이름을 갖고 식물원 온실에서 보존되고 있지 않은가
딸아이가 받아쓰기를 하다가 글씨를 틀려왔다. 숙제로 3번을 고쳐 쓰라는데 단어가 '부뚜막'이었다. 딸에게 이 단어가 무슨 뜻인지 알아?라고 묻는다. 모른다고. 하긴 본 적이 없으니. 그래서 그 후에 아쿠아리움에 갔다가
근처에 전시되어있던 부뚜막과 가마솥을 보고 설명해 주었다. 옛날의 부엌 같은 곳이라고. 이곳에서 밥도 짓고 국도 끓이고 한다고. 물론 엄마의 설명에도 아이는 관심이 없다. 오랜만에 나온 아이는 팔랑팔랑 종이처럼 뛰어다닐 뿐. 이런 아이도 '브이로그' 같은 단어는 기가 막히게 설명해낸다. 브이로그의 뜻이 뭐냐는 나의 질문에 '유튜버들이 일상생활을 찍어서 올리는 거야'라고 정확하게 대답한다.
나 역시도 고전을 읽다가 서까래의 뜻이 이해가 안 가서 사전을 찾아보았다. 분명 많이 들어본 단어이긴 한데한옥 지붕 밑에 살아본 적이 없는 나로서는 잘 떠오르지 않는다. 그러다가 우연히 산책을 간 공원에서 정자를발견하고 서까래를 직접 볼 수 있었다. 서까래, 단청, 대들보, 용마루, 단청... 관심을 갖지 않았다면 그냥 의미 없이 스쳐갔을 그런 이름들. 진짜 서까래 밑에 서니 비로소 서까래라는 단어가 살아나 내 기억 속에 들어온다.
서까래란 지붕밑에 줄지은 저 기둥이구나
정자나 한옥이 사라진다면 이런 단어들도 같이 사라질 것이다. 그리고 정자나 한옥에 대한 옛 기록도 사람들은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나는 비교적 오래되지도 않았을 듯한 이 정자 그늘에 앉아 이런 생각을 했다. 옛 역사가 아무리 가치가 있어도 사람들 가까이 있지 않고 더 이상 이름이 불리지 않는다면 의미가 없는 거라고.
21세기에 무슨 고리타분한 이야기냐고. 최근에 강원도에 레고랜드가 개장하면서 화제를 모았던 것은, 놀이공원에 관한 것도 있었지만 개발과정에서 나온 청동기 시대 유물에 관한 것도 있었다. 그러나 이때 발견된 고인돌과 유물들은 비닐하우스에 검은 천을 덮어 보관 중이라고, 유물을 보관할 박물관은 첫 삽도 뜨지 못했다고 한다. 아이 엄마로서 새로운 놀이공원이 생겼다는 것은 반길 일이긴 하지만, 이 공원을 통해 강원도가 관광산업이 부흥되면 다행이라고 생각하지만 도청의 반응이 '가볍다'는 느낌이 드는 것도 사실이었다. 청동기 시대 유적지에서 롤러코스터를 타고, 레고 닌자고를 관람하다니.
개발은 막을 수 없다. 시대가 변하니까. 사람도 변하니까 편의성에 따라 바뀔 수 있다. 하지만 그 개발 과정에서 나왔던 옛 흔적들은 노력한다면 따로 기념하는 방법도 있을 것이다. 기록의 방식은 찾고자 한다면 그렇게 어려운 것이 아니다. 하지만 그런 섬세한 배려가 없다면 기억도 기록도 사라진 채, 단지 어디서나 보았을 듯한 평범한 개성 없는 장소가 될 뿐이다.
나는 우리 꽃들의 이름부터 서까래와 부뚜막 같은 옛말들이 사라지지 않으면 좋겠다. 사람들이 자꾸자꾸 부르고 기억해서 그 말들이 사라지지 않고, 미래에는 새로운 대상으로 태어났으면 좋겠다. 그래서 새로운 것의 의미가 되고 오래된 것과 새것을 이어갔으면 좋겠다. 나태주 시인의 시 '작은 것들을 위한 시'가 BTS의 노래가 된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