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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Who am I May 12. 2022

호랑이와 무궁화 그리고 스테레오

-무엇을 버리고 무엇을 발전시킬까-


아침에 아이를 등원시키면서 경비실 한쪽에 버려져 있는 스피커를 보았다. CD와 DVD로 음악을 듣고, 영화를 보던 시대 쓰던 스테레오 스피커였다. 스피커는 제법 큰 편인데, 더 이상 지금의 시대에는 고물 이상의 의미를 갖지 못하니 버려진 것이다. 이것을 보자니 문득 생각이 떠올랐다. 대부분의 옛 물건은 폐기되고 버려지지만, 보존되는 것은 아주 드물고 더욱이 일반적인 모델은 보존가치가 떨어진다. 하지만 고려시대 사람들이 가치를 모르고 버렸던 그릇 하나가 후대에는 소중한 유물로 박물관에 있다. 가치평가의 기준이란 변하는 것이지만 가치를 어디에 두고 판단하는 가는 평범하지만 중요한 능력 중 하나라 생각한다. 오래된 이 물건은 쓰레기인가? 아니면 보관의 가치가 있는 물건인가? 이를 결정하는 것을 '핵심가치'다.


핵심가치의 기준이 무엇인가

 나 역시도 시대가 지나면 21세기 살았던 분류될 그런 이름 중 하나일 수도 있다. 납골당에 찾아오지 않는다면 그냥 지구랑 지나가는 인연으로 사라질 것이다. 무엇이 버려지고 지켜지는 가는 대단히 어려운 질문이다. 변하는 시간 속에서 사람의 머리는 점점 늙어가는데, 새로운 것에 묻혀가는데 무엇은 가져야 하고 무엇을 버려야 하는가는 인생관이나 철학과 연관이 있기 때문이다. 인간관계도 생각도 오래된 인식도 태도나 지식들도 모두 이런 판단을 요구한다. 그래서 나는 편하게 사는 것, 이제는 좀 익숙하고 살만하다고 느끼는 자기 자신을 경계한다. 20대 청년의 위기는 자신의 기반이 불안정한 데서도 오지만, 중년의 위기는 자신이 뭔가를 할 수 있고, 잘 안다고 생각하는데서 온다고 생각한다. 익숙하지 않은 것에 도전하는 것을 포기할 때 사람은 진짜로 늙어간다. 그리고 그로 인해 오는 우울감과 상실감은 위험한 것이다. 중년이 가지는 사회적 위치 때문에 가족이나 회사 구성원에게 까지도 그 영향이 퍼지니 말이다. 책임져야 할 사람은 많은데 더 이상 사춘기처럼 방황할 수도 없고 달래주는 사람도 없다. 그러지 않기 위해선 '잔인한 4월처럼' 낡은 세계를 찢고 나오는 수밖에 없다. 사람은 매일 다시 태어나야 사는 것이니까. 10번째 맞는 봄이나 40번째 맞는 봄이 매번 새롭게 와닿는 사람이라면, 그 사람은 늙은 것이 아니다. 그런데 내 머리 속에 있는 핵심가치는 무엇일까.


내 머릿속의 역사

 나는 국민학교 세대다. 월요일에 학교에 가면 제일 먼저 애국조회를 하는 것이 일과였다. 국기에 대한 경례를 하고 가슴에 팔을 얹은 채 늘 익숙하게 나오는 그 웅장한 음악에 맞춰 '나는 자랑스러운 태극기 앞에..'를 외웠다. 월요일 아침에는 운동장 앞에서 항상 교장선생님의 조회가 있었고, 체육시간에는 국민체조를 했다. 교과서에는 첫 장에 무궁화나 호랑이가 그려진 대한민국 지도가 있었고, 학교에서 제일 먼저 가르치고 배웠던 것은 '한글'이었다. 이른바 그 시절 국민학교에서 배우는 것의 첫 번째가 '국가와 민족에 대한 의식'이었던 셈이다. 올림픽이나 축구 같은 스포츠에도 대한민국을 대표한다는 말이 빠지지 않았다. 자랑스러운 88 올림픽은 늘 단골 주제였다. 역사시간에는 6.25와 3.1 운동에 대해 배웠다. 비록 부모님 세대만큼 반공산주의 교육을 받지는 않았지만, 교련이 있었고 민방위 훈련을 했다. 통일에 대한 노래도 부르고 시도 지었지만 항상 학교에는 정해진 교육방식이라는 것이 존재했다. 어느 선까지만 정하는 것이다. 그것이 너무 당연해서 논할 가치가 없었다. 그리고 그렇게 10살 이전에 배운 역사와 국가에 대한 의식은 머리에 '잘' 심어졌다. 역사란 마치 책꽂이 한편에 기념으로 꽂혀있는 졸업 앨범처럼 졸업 후에 한 번도 들춰본 적은 없지만, 의미를 가진 '가치'로 남아있었다.  


그런데 국민학교를 졸업하고 난 어느 날부터 '국민학교'라는 이름이 사라졌다. 96년 즈음인 것 같은데, 나는 

내가 다녔던 학교의 간판이 철거되고 '초등학교'라는 이름으로 바뀌는 것을 보았다. 이유란 그랬다. 일제가

쓰던 '황국신민'이라는 말에서 나왔기 때문에 '국민'이라는 이름이 바뀌어야 한다는 것이다. 민족적인 이유라는데, 납득이 가는 이유이기도 하고 아니기도 했다. 왜냐하면 '국민학교'라는 이름이 사라진 후부터는 어느 순간부터 학교에서 더 이상 '국가에 대한 교육'을 첫 번째 목표로 삼는 것 같지 않아 보였기 때문이다. 말 그대로 '국민'이라는 의미가 사라지면서, 그냥 초급교육과정으로 학교의 의미가 바뀐 것 같아 보였다. 더 이상 무슨 행사를 해도 '국기에 대한' 경례를 애써 참아내지 않아도 되고, 조회는 운동장에서 힘들게 진행되지 않아도 다른 방식으로 간결하게 대체되었다. 국정교과서에 대한 철통 같은 규칙들도 흩어져갔다. 마치 무슨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말이다. 


 큰 아이가 초등학교에 입학하면서 접한 '초등학교'란 180도 달랐다. 코로나 시대에 입학 절차 없이 서류 몇 장에 학교를 보낸 나는 학교를 이해하지 못했지만 그냥 받아들이는 수밖에 없었다. 입학식도. 선생님과의 대면도 반 엄마들과의 모임도 없다. 교실이 어떤지. 반장이 있는지. 칠판에 글씨를 쓰는지. 청소는 누가 하는지. 급식은 어떤 식으로 먹는지도 본 적이 없다. 알 수 있는 것은 앱에 깔린 알림장과 하이콜이라는 정해진 전화와 메시지를 통해서다. 학부모 공개수업이 있지만 줌으로 2시간 정도 보여주는 것이 전부다. 학교란 학부모가 알 수 있는 것을 최대한 제한하고자 하는 것처럼 보여, 나서기도 민망하다. 가끔은 학부모 자원봉사를 받지만 등교에서 학교까지 겨우 4시간 남짓한 시간 동안 무엇을 하기에도 마땅치 않은 형편.  학교는 그냥 학교와 아이들이 아는 곳에 그치고 만다. 학교에 대한 옛 기억만 가진 나로서는 '바뀌었다'는 말 조차도 사치스럽게 느껴진다. 코로나 시대에는 '학창 시절에 대한 향수'조차 없다. 

그래도 다행인 건 아이가 학교 가는 걸 좋아하는 것. 친구가 좋고. 선생님이 좋다는 것. 그것이면 충분하다. 학교는 그냥 아이가 존재하는 생활의 영역이다.

나는 가끔 혼란을 겪는다. '국민학교'라는 말이 사라지면서, 그 안에 있던 시간들과 기억들, 배웠던 것들 이런 것도 현재와 연결되지 못한다. 그냥 그 시절 사람들은 초등학교와 연결되지 못하고 '옛날'로 박혀버렸다는 것. 그럼 그렇게 10살 이전에 순수한 머리에 배웠던 것들은 대체 뭐란 말인가. 내 잘못도 아닌데. 지금의 학교는 잘 모르니 최소한의 아는 부분만 이야기하고 입을 닫는다.

(나는 가끔 글을 쓸 때 국민학교 시절이라고 적어야 하는지 초등학교 시절이라고 적어야 하는지 난감해진다. 누군가 과거를 잘라놓은 것 같은 아쉬움이 들어서, 나 스스로 옛날 사람이라고 말하기도 뭐하고 그렇다고 초등학생이었던 적도 없었는데 굳이 그렇게 쓰는 것도 맞지가 않으니 말이다.)

 

아이가 가고 나서 아쉬운 대로 아이의 교과서를 들춰보았다. 더 이상 애국가나 무궁화 그림, 국기에 대한 경례도 없다. 지금 교과서는 아이의 성장에 초점을 맞춰서 공동체 문화를 이루는데 도움을 주는 내용들이 대부분이다. 내 세대의 부모들이 힘든 것은 이른바 '단절'이라는 걸 겪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부모가 배웠던 것을 그대로 아이에게 가르쳐 주는 것이 전통이라면, 내가 아이에게 가르쳐줄 수 있는 것은 더 이상 교육과정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교과서에 비하면 오히려 과자나 아이스크림이 오히려 덜 변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세대에서 세대로 이어지는 핵심가치는 이미 바뀌고 없었다. 내 부모도 아마도 우리 세대에게 이런 걸 느꼈겠지. 세대 간의 단절은 단지 교육의 내용이 바뀌고 자연적인 시간이 흘렀다는 차원의 문제만은 아니었다. 교육에서의 '핵심 가치'를 설정하고 이어오지 못했기 때문에 각각의 세대에서 다른 교육목표로 성장한 아이들이 '가치 충돌'을 일으킨다. 나는 국가주의를 옹호하지 않는다. 하지만 이미 성장해 버린 사람으로서 핵심가치가 무엇이었는지 묻고 싶었다.




고전을 다시 읽다가, 신기하게도 300년 전 사람과 우연히 연결되는 경험을 겪었다. 나는 내 부모세대와도 이야기가 안 통한다고 느꼈는데, 통하지 않는 것은 단지 시간 때문만은 아니었다. 중요한 것은 생각의 다름이 더 컸다. 300년 전 사람이라도 생각이 통하면 가까이 느끼는 것이고 불과 한 세대 전이라고 해도 그렇지 않을 때가 있는것.                                                                                                                                 

열하일기 속에서 박지원은 '책문'에 이르러 허울뿐인 국경에 놀란다. 국경에 도달하기 전까지 이미지는 엄청 삼엄하고 대단한 것이었는데, 단지 풀숲이 우거진 작은 지표석과 허술한 경계 생각보다 작고 오래된 성, 그리고 이방인들의 와글 와글한 난리통 정도였다. 그는 실제와 이미지의 차이를 느끼고 놀란다. 그 후로 평생을 배워온 텍스트 속의 '중국'을 실제로 보고 와장창 깨지는 경험이 이어진다. 어떤 것은 생각보다 훌륭했고 어떤 것은 실망스러웠다. 

나는 열하일기를 다시 읽으면서, '국경'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한반도 지도란 호랑이 그림으로 내 머릿속에 고정적으로 박혀있었다. 하지만 막상 다시 공부해 보니, 국경이란 외교의 영역이었을 뿐 그렇게 신성불가침의 영역이 아니었다. 백두산이 한반도의 제일 북쪽에 있는 큰 산이긴 하지만 백두산 자체가 우리 민족만의 영역도 아니었다. 백두산이나 호랑이는 그냥 상징적인 이미지였을 뿐. 내 의식이 진보하지 못하고 무지한 상태로 박제되어왔던 것.

심지어 백두산에 정계비가 세워지고 청과 경계를 정한 것은 조선 숙종 때 있었던 일이니 생각보다 오래된 일인 것이다. 이것은 이미지 속 민족정기가 아닌 '실질외교'에 대한 생각을 다시 한번 하게 했다. 그것은 내 고정관념이 부서지는 순간이기도 했다. 민족을 계속 논하는 시대에도 국경은 계속해서 남으로 밀렸던 것. 복잡한 역사 속에서, 현재는 금기의 땅이 되어버린 그곳에 대한 우리 정부의 권한은 아무것도 없다. 나는 국경 대신 임진각에서 휴전선을 볼 수 있을 뿐이다. (임진각도 실제로 가보면 느낌이 다르다. 임진강 너머를 보고 있으면 마치 연암 시대 압록강 너머 국경선을 보고 있는 느낌이 든다. 지금의 단동에서 북한 주민을 바라본 요즘 시대 연행단의 생각도 복잡하기는 마찬가지다) 우리 아이들에게도 언젠가 이런 이야기를 할 그런 날이 올까? 나는 부모로서 후세대에게도 책임이 있으니.


나 역시 객관적으로 놓고 보았을 때, 하나의 역사적 증거 자료다. 내가 배웠던 교육. 그리고 기억하는 역사적

사건들 그리고 남기는 글도 하나의 기록이다. 비록 내가 지위가 없다고 하더라도 나는 내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으로서 이 시대를 증언하는 역할로 남을 수 있다. 가장 일반화된 대상으로. 나는 스테레오 처럼 되지 않으려는 스테레오 타입으로 무엇을 해야하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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