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Who am I Jun 29. 2022

나이가 학력의 기준일 수는 없는 이유는

교육은 선천적인 것을 후천적으로 극복하는 것

월요일 전쟁


월요일 아침 눈을 떴는데 무려 8시다! 지난밤 나는 열대야 때문에 잠을 설친 상태였고, 새벽녘에 비몽사몽 시원한 거실 바닥에 누워 새우처럼 잠이 들었다. 일어나니 등은 굳어서 아픈데 정신이 없다. 등교 준비는 해야 하는데. 프라이팬에 계란과 베이컨을 뒤집느라 정신없이 바쁜 나를 보고 아이가 한 마디 한다.  

"나 발이 아파서 잠을 못 잤어. 학교 못 갈 것 같아."

솔직힌 엄마는 주말이 지난 월요일에 학교에 못 간다는 말이 제일 무섭다. 주말에 세 식구를 먹이고 치우느라 이틀을 고생했는데 하루가 연장된다는 말이니. 기분이 좋지 않다. 우선 내 체력부터가 방전되기 직전이라.

일단 학교 선생님에게 연락을 해서 결석 이야기를 하고 둘째를 준비시킨다. 때마침 일기예보는 9시부터 비가 올 거라고 뜬다. 며칠 전 하교 길에 비에 세게 얻어맞아서 젖은 기억이 있는 나는 등교 시간 비 소식이 무섭다. 둘째를 다그쳐서 유치원을 보내고 돌아온다. 아이와 나는 한마디도 없이 바쁜 길만 걸어서 유치원 등교를 마쳤다. 둘째가 가니 첫째를 준비시켜서 병원에 데려가야 한다. 그 와중에 남편은 <장마철에 차를 관리 안 해서 곰팡이 피면 어쩌나?> 문자를 보낸다. 병원에 데려가려면 차 상태를 먼저 살펴야 할 것 같아. 먼저 지하주차장에 가서 차를 살펴보고 돌아온다. 휴. 다행히도 지하주차장은 제습기를 돌리는지 차에 이상은 없다. 기름은 겨우 한 칸 남았지만 기름값도 비싼 요즘. 어쨌든 오늘을 버텨보기로 한다.  

대충 그릇을 씻어 부엌을 정리하고 병원으로 차를 몰았다. 빗방울이 떨어지는 것을 보니. 제발 많이 오지 말아라 속으로 기도를 하게 된다. 가면서 아이에게 묻는다.

 "정형외과? 소아과? 피부과?

진료는 빨리 끝났다. 의사는 겉으로만 봐서는 잘 모르겠는데, 운동을 많이 해서 그런 것 같다고 쉬어 보라 한다. 말이야 방귀야. 찜찜한 채로 진료확인서를 받고 수납을 하고 약국에 들른다. 아이는 아프다더니 생각보다 잘 걸어 다닌다. 오는 길에 약국에서 공항 피로회복제를 사 온다. 먹어야 오후의 2탄도 버틸 수 있을 것 같다. 약봉지에는 만 7세라고 쓰여있었다. 아이가 7세였나? 그것밖에 안되었나? 피곤한 와중에도 7세라는 말이 머릿속에서 콱 와닿는다. 내가 아이를 너무 크게 보고 살았나?



만 7세

초등학교 2학년인 아이는 2014년 7월 생이다. 7월이면 만 8세가 된다. 생일이 오기 전까지 아이는 만 7세다.

집에서 9살이라고 불릴 때와는 다른 느낌이다. 훨씬 꼬꼬마가 된 것 같은 기분.

솔직히 나는 한국식 나이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우리 조상님들이 태어날 때부터 생명의 소중함을 생각해 1살을 주셨다. 하지만 좋은 의미와는 별개로, 나이 계산하는 것이 여러 방법이 되다 보니 영 귀찮다. 특히 교육 기관에 다니는 나이가 되면서부터 말이다. 더욱이 한국에서 태어나 나면서부터 1살을 얻은 아이는 12월 31일에 태어났다 해도 해가 바뀌면 2살이다. 1월 1일에 태어난 아이에 비하면 태어난 지 겨우 하루밖에 안되었지만 말이다. 솔직히 태어나면서부터 1살이면 다음 생일까지는 1살로 취급해줘야 하는 것 아닌가. 태어나면서 한 살 먹고. 가 지나 떡국 먹었다고 한 살 더 먹으니 이게 웬 나이 부자인가. 만약 1월 1일 생이 있다면 그 애한테는 맞겠지.

그래서 나는 어린이집 입학 나이를 계산하는 표가 만 0세 반. 만 1세 반.. 이런 식으로 표기될 때 2살을 뺀 나이로 계산한다. 그러니까 0세는 보통 2세. 1세는 3살인 셈. 그렇게 치면 입학 연령은 만 6세다. 우리가 입학 때쯤이면 다 커서 학교에 갈 나이라고 하지만 생일이 늦은 아이들 입장에서는 겨우 만 6년을 살았을 뿐 아직도 한 참 어린 나이다. 그러나 8세라고 부를 때는 한글도 수학도 다 할 수 있을 것 같은 왠지 큰 아이 같은 느낌이 든다.



교실 안의 세계

나는 11월 생이다. 사실 우리 때는 '빠른' 이란 신기한 나이 법이 있어서 같은 해에 태어났어도 2월에 태어난 내 사촌은 나보다 한 학년 먼저 학교에 올라가서 오빠가 되었다. (그래도 오빠라고 부르진 않았지만. 확실히 나보다 모든 면에서 빠르긴 했다.) 따지고 보면 나는 3월 생일인 친구들에 비해 최대 8개월 정도 늦게 태어난 편이었다. (이 정도의 월령 차이가 심각한 건가? 아이를 키워본 부모 입장에서는 8개월의 나이가 의미하는 정도를 잘 안다.)

이런 조건은 성장기 아이들에게는 확실히 불리한 것이기도 해서, 수업 이해의 정도나 신체운동도 따라가기 쉽지 않았다. 내 체격이 원래 큰 편도 아닌데 생일이 빠른 아이들은 항상 뭘 해도 앞서 나가는 편이었으니.

6학년쯤 되자 내 친구들은 중학생 같아졌지만

나는 여전히 어린이 같았다. 학창 시절 늘 뭔가 부족한 느낌의 원인 중 하나는 늦은 생일이었다. 더욱이 나는 불리한 조건을 치고 나갈 그 한 방이 없었다.

나와는 대조적으로 2월 생이지만 해에 입학한 2살 차이의 오빠는 학교 생활에 그렇게 어려움을 겪지 않았다. 오빠는 다른 아이들에 적응이 빨랐다

그 당시엔 나이 기준이 맞는 건지

아무도 따져 묻지 않았다. 11월생인 내가 힘들었다면 다음 해 1월생으로 그이 전해에

입학한 3월과 같이 다닌 아이들은 어땠을까


현재는 단순하게 입학 연령을 1월부터

12월까지 규정하는데

이건 합리적인가?


궁극적인 문제는 내가 같은 반 친구들과 성적으로 경쟁할 때 드러났다. 사실 월령에 따라 발달 정도가 다른 신체조건이 다른 아이들을 대상으로 놓고 경쟁한다는 것이 무슨 의미겠는가? 아이들마다 다른 건 사실 당연한 것이다. 하지만 90년대에는 순위가 중요했으니. 그 순위는 대학 입학 전까지 쭉 이어졌다. 나는 도토리가 걸리듯 변별되어 일렬 선상의 줄에 세워졌다.  

사실 나는 다음 해에 재수를 통해 대학을 들어갔는데, 대학에서 만난 친구들이 동생이라 했지만 사실상 차이가 덜 했다. 나이의 격차에서 처음으로 빠져나온 셈.

어린 시절 나는 공부가 어렵다고 했지만, 사실은 내 발달 상태보다 학습이 더 빨리 나간 걸 수도 있었다. 만약에 선생님이나 부모님이 내가 입학할 때 8세가 아니라. 만 6세라고 공식적으로 인정했다면 학습에 있어 나이를 좀 생각할 수도 있지 않았을까.


경쟁사회와 나이


마이클 센델은 <정의란 무엇인가>로 유명한 미국의 하버드 대학 교수이다. 그는 수업의 첫 시간에 묻는다.

학생 가운데 첫째인 사람은 손 들어보라고. 의외로 많은 사람의 학생들이 손을 들었다. 센델 교수는 묻는 이유는. 우리가 스스로가 똑똑하고 능력 있어서 이룬 것이라고 믿는 '그것'을 의심해보라는 뜻. 학교는 공정한 곳인가?


아주 단순하게 모든 아이의 학력의 기준을 조금 낮춘다면 아이들의 자신감이 올라갈까? 교육부가 그렇게 자주 말하는 변별력이 떨어지는 걸까? 왜 많은 아이들이 1학년 과제를 2학년에 깨닫는 걸까.

모든 아이의 나이를 '만'으로 바꾼다면 엄마들이 우리 아이가 아직 8살인데 한글도 모른다고 걱정하거나 영어나 수학을 아직까지도 못한다는 말을 좀 덜할까. 만약 학제가 개편되어서 학년 입학 시기를 상반기와 하반기로 나눈다면 그래서 1월부터 6월까지 생인 아이들이 한 반. 7월부터 12월까지 생일인 아이가 한 반이 된다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 이런 생각을 해본다.  더 나아가 입사 시험에서도 나이 칸을 없앤다면 세상은 어떻게 될까.

어차피 공교육이 모든 아이들에 맞출 수 없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나이 기준이 바뀐다면 세상이 어떻게 변할 까 생각한다. 우리가 만든 그 단단한 나이의 벽이 정말로 깨질까  

나이를 공짜로 많이 먹는 한국의 문화가 아이를 빨리 키우고 싶어 하는 사람들의 심리와 맞아 경쟁심리를 부추기는 건 아닐까. 한 해가 지나 이제 한 살 더 먹었으니 형님처럼 행동해야지 같은 뻔한 말들은 사실은 의미가 없다는 걸. 대한민국 사람이 모두 먹는 나이를 공짜로 얻은 것뿐. 아이들은 비로소 '제 나이'가 지나야 우리가 생각하는 뚜렷한 변화가 보인다는 것을.


지금의 학교는 등수가 적힌 성적표를 주지 않는다.


 나는 선행학습도 의미가 없다고 본다. 연령보다 빠른 학습내용을 가르친다는 것은 사실상 열리지 않는 문 앞에서 뭔가를 전달하는 것이나 다름없다고 본다. 배운 내용이 아이 머릿속에 들어오고 안 들어오고는 아이가 정하는 것도 있지만 아닌 것도 있다. 사실 내 아이는 선행은 고사하고 몇 개월씩 차이나는 친구들을 따라가기에도 바쁜 아이 중 한 명이라는 걸. 학원이 아니더라도 학교에서 겪는 격차로 인한 심리적 스트레스도 적지 않다는 것. 아이 스스로는 적응하려고 어떻게든 애를 쓰고 있다는 것. 가끔은 집에 와서 뮨울 닫고 멍 때릴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 아이에게는 선행보다는 그냥 적기교육이 더 났다. 스트레스를 덜 주니까.

빨리 큰다는 것이 항상 좋은 것만은 아니라고


지금 학교에 앉아서 분투하는 그 아이는 사실 태어나면서부터 다른 아이들보다 2. 8 킬로그램으로 작게 태어난 아이가 아닌가. 다른 아이들이 신생아 때 먹는 양의 절반도 못 먹고 늘 먹다 잠들던 애였는데.

그래도 크면서 여기저기 많이도 아팠지만 초등학교 입학 후 반에 들어가 기죽지 않고 버텨내고 있는 것 아닌가.  그거면 충분하다. 이 아이는 태어나면서부터 병원에서 1프로 이하의 몸무게 성적 그래프를 받곤 했었다. 부모 입장에서는 그것도 견디기 힘들었는데 아이는 꿋꿋하게 자기 길을 간다. 오히려 엄마를 위로하면서.


학교가 성장을 위한 곳이면 좋겠다



연암 박지원의 열하일기를 읽다가. 청나라 시대 관리를 뽑는 시험장에 대해 읽은 적이 있다. 나에게는 그 부분이 무척 흥미로웠는데. 기록에 따르면 시험을 치르는 수험생의 수만 7천500명 정도 되는 데, (중국에선 이 정도가 적은 건가?)이 수험생들을 위한 각각의 방을 다 만들었다고. 벽이 없는 이 건물은 안에 온돌과 부엌 등이

갖춰져 있고 다닥다닥한 줄로 붙어있다. 고전을 위주로 한 시험 내용은 1000자 원고지 같은 곳에 기록하게 되어있는데, 마치 지금의 논술 시험 같은 느낌. 이 시험지를 봉인된 양식에 맞춰 제출하게 되어있다.

재밌는 것은 떨어진 수험생의 답지에도 시험관들은 일일이 첨삭을 달아서 낙방의 이유를 자세히 설명해 주었다는 것. 또한 등급을 매기지 않는다.

시험제도도 이렇게 다를 수 있구나. 과거에 살던 사람들이라고 해서 우리보다 생각이 덜하지는 않았구나 이런 인상을 주었다. 시험에 떨어져도

기분은 좀 덜 나빴겠다.


참고서적: 열하일기 . 김혈조.돌베게

매거진의 이전글 아이에게'외모'에 대한 교육이 필요한 이유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