펜은 칼보다 강할까
처음으로 돌아가서 생각하기
어느 순간 글쓰기가 더 이상 안될 때, 왠지 쓴 글을 또 쓰는 것 같고 내가 쓴 글이 보기 싫어질 때
진부한 소재밖에는 생각이 안될 때, 내가 돈도 안 되는 독자도 없는 이 노릇을 왜 하고 있나 하는
생각이 들 때, 내가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자고 내 척추를 희생해가며 키보드를 두드리나 생각이 들 때를 위해 펼쳐보시기 위한 글쓰기 방법론 매거진으로 만들고자 합니다. 어쩌면 논란의 여지가 있을 수도 있는 내용이 될 수도 있으나, 글을 쓰시는 분들이라면 한 번쯤 고민해 볼만한 주제가 될 수도 있겠습니다.
당신은 왜 어떤 이유로 글을 쓰는 건 가요?
펜은 칼보다 강하다?
학창 시절에 간혹 들춰보았던 명언집이나 격언집에는 항상 이런 말이 있었습니다. 저도 격언의 주인공이 누군지는 모르겠습니다. 뜻을 모르는 게 아니라 저에게는 자주 들어 좀 뻔하고 식상한 격언이었습니다.
그보다 무서운 건 현실이었습니다. 머리가 커지고 세상을 알게 되면서부터는 세상의 어떤 폭력이 우리를 짓누르고 억압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그 앞에서 펜은 한 없이 나약한 도구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그나마 최근에 생긴 SNS 파워블로거라면 모를까 지난 학창 시절 한 없이 우리를 괴롭히는 학교폭력 앞에서 선생님께 드리는 절절한 편지 같은 건 평화에 도움이 되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사회에 나와 몇 번인가 시도했지요. 부당한 대학행정에 대해서 등록금을 주식 투자한 총장에 대해 몇 번이고 대형 언론사에 기고했습니다. 교내 시위의 정당성에 대해서 쓴 게 한 언론사의 오피니언 란에 아주 작게 실렸던 건 기억이 나네요. 하지만 막상 써보니 제 글쓰기의 힘은 생각만큼 대단한 게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난 뒤 저는 한동안 글이 세상을 바꾼다는 생각을 접었습니다. 누군가 억울한 일을 당했을 때 올린 카페글에 댓글을 달아주는 걸 빼고요.
그리고 21세기 새롭게 도래한 전쟁과 억압의 시대를 살면서 수많은 언론인들이 '보도했다'는 이유만으로 죽임을 당하고 사라지는 것을 매일 뉴스로 봅니다. 그분들이 파워블로거나 인기 유튜버처럼 명성과 인기를 누렸나요? 인스타그램 스타처럼 돈을 벌었나요? 아닙니다. 그들은 단지 보도국의 기자로서 직업적으로 취재를 했던 평범한 언론인들 중 하나였습니다. 본인의 일을 했을 뿐인데 그 이유로 죽었습니다. 그들의 죽음에는 후속보도도 없고 설명도 없습니다. 카타르에서 중국에서 이란에서 남수단에서 러시아에서 우크라이나에서그렇게 언론인들이 죽거나 사라졌습니다. 하지만 나는 이들의 이름을 누군가 기록하고 기억해 주었으면 좋겠습니다. 단 하나의 기사와 목숨을 바꿀 만큼의 용기는 저에게는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모두들 입을 다물고 있고 역사는 묻혀 갑니다. 이 정도로 언론을 탄압하는 사회에서 역사 발굴이란 무슨 의미가 있나요? 하루 전의 시간도 소리 없이 지나가는데.
더욱이 제가 사는 대한민국도 그렇게 하고 싶은 말을 할 수 있는지 확신할 수 없습니다.
시녀 이야기를 빌어
마거릿 애트우드의 1984년 작 <시녀 이야기>는 출산과 인구 증식이라는 목표 아래 여성을 생식 자원으로 활용하는 길리어드 사회를 그린 디스토피아 소설입니다. 찾아보니 원작 소설을 바탕으로 한 드라마도 있네요. 드라마와 소설은 구성이 좀 다르지만요. 저는 이 소설을 읽으면서 들었던 의문이 있습니다. 만약 이 가상의 국가에 주인공이 증언록의 형태로 이 글을 썼다면 어떻게 그것이 보존되고 전달되었을까? 저는 이 부분이 가장 흥미로웠습니다. 책의 말미에는 어떤 학회에서 여러 장의 테이프 리코더와 증거물들이 복원되고 해석되는 장면이 나오는데요. 이것은 주인공이 기록한 흔적일까요? 소설 내부에서는 주인공이 글을 쓰거나 녹음을 할 수 있는 장비를 갖추고 기록하는 과정 자체는 나와있지 않습니다. 펜도 없고 공책도 없고 그럴 수 있는 자유로운 시간이나 사적인 공간. 보관할 수 있는 공간도 나와있지 않습니다. 작가는 그 지점에 대해 특별히 언급하고 있지 않아서 알쏭달쏭합니다. 조지 오웰의 <1984년>은 3인칭 시점으로 되어있고 윈스턴 스미스가 텔레스크린을 피해 작은 공간에서 공책에 글을 쓰는 과정이 설명되어있거든요. 윈스턴 스미스가 기록을 하고 전달을 하려 했던 공책은 빅브라더에 의해 사라졌겠지만 어쨌든 3인칭 작가의 시점으로 되어있으니 어느 정도는 설명할 수 있습니다. 윈스턴을 알았던 누군가가 구두로라도 전달하고 전달하고 전달해서 후세에 남겨진 걸 수도 있을 테니까요. 하지만 길리어드의 이름 없는 여인은 본인 목소리로 증언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전달 수단이 살아남았다고 가정해야 이야기 성립됩니다. 그건 대체 누구에 의해서였을까요? 메이데이로 나오는 비밀 단체?
저는 그 부분이 좀 모호했습니다. 이 증언자를 누가 객관화시켜서 설명해 줄 수 있을지. 그것이 핵심이니까요.
덧붙여 미래의 학회에서 길리어드의 이 여인의 증언이 모호하다는 이유로 뭉개려는 식으로 책은 마무리됩니다. 이 디스토피아 소설이 끝까지 암울한 건 사람들이 역사를 통해서 아무것도 배우지 못했다는 사실이 아닐까요. 힘지어 그 학회의 저자들은 길리어드의 후손 인지도 모르잖아요. 길리어드 사회 덕분에 인류의 명맥이 끊어지지는 않았는지는 모르지만 역사의 교훈은 배우지 못했기에 이들의 미래도 확답할 수가 없습니다.
펜이나 매체는 억압에서 살아남을 수 있기나 한 건가요?
물론 어떤 작가든 사회적 억압에 저항하기 위해서만 글을 쓰는 사람은 없습니다. 작가의 역할을 그렇게 설정한다는 것이 더 무섭게 느껴집니다. 하지만 세상에는 자유로운 글쓰기라는 그 항목만 억압하는 사회가 분명히 있고 그 주제는 정치적인 것에 국한되지 않습니다. 권력자에게 한 번 공인 넘어가기 시작하면 링안에서 무자비하게 펀치를 날리는 건 늘 있는 일이 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권력이 항상 그 선을 넘지 않도록 주시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펜은 칼보다 강하다'라는 말을 바꿔서 표현하고자 합니다. '이성은 폭력을 이길 수 있다' 이 말로요. 이것은 불가능하지만 가능한 신념에 가깝습니다. 그것은 가해자와 피해자의 두 사람 모두에게 적용되는 규칙입니다. 법은 가해자와 피해자를 구분하려고 하지만 저는 거의 불가능하다고 봅니다. 모두가 감정적으로 변한 상태에서 경계를 따지는 것이 얼마나 가능할까요. 우크라이나와 러시아의 전쟁 사이에서 누가 더 많이 죽였나를 따지는 건 대체 무슨 의미인가요. 찾아야 할 것은 보다 지루하고 힘들고 고통스럽지만 찾아야 할 현실감각과 이성, 평화협상 입니다. 더이상의 전쟁은 부서진 건물더미와 시체만 늘릴 뿐이죠.
글쓰기는 확실한 자기 혁신의 도구가 됩니다. 사람을 이성적으로 바꾸거든요. 말과는 분명 다릅니다.
읽는 것도 어렵고 쓰는 것도 어렵고 이해하기란 더 힘들지만 공책에 일일이 있었던 과정을 쓰고 다시
생각하면서 자신을 가다듬는 것만큼 자신을 바꾸는 일은 없습니다. 우리는 공격자와 공격적인 상황에서 일단 나와서 자신의 위치를 다시 한번 생각합니다. 쓰기를 통해 무엇을 욕망했고 어떤 결핍이 자기에게 공격성을 낳았는지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이는 우리는 모두 동물이며, 괴물은 외부에 존재하는 게 아니라 누군가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고 자기 안에 있는 것이며 죽여서 없애는 것이 아니라 길들이고 이해하는 것이라는 결론까지 이끌어냅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이들이 어렵고 지루한 과정을 통해 읽기를 배우는 것이라면 좀 너무 뻔한 말인가요.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다음에는 글쓰기 내부의 서사구조에 대해 이야기해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