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지와 <위플래시>로 본 독재자의 그림자
어린 시절에 우리 집 책장에는 아버지의 책들이 꽂혀있었다. 그중 하나가 나관중의 소설 삼국지였다. 하지만 어린 시절의 나는 그 복잡한 세계를 전혀 이해할 수 없었고, 기억에 남는 것은 인물들을 그린 책 표지의 그림들이었다. 나는 그 인물들의 모습을 보면서 나만의 상상에 빠지곤 했다. 하지만 고전들이 그렇듯 이야기는 많이 들었으나 직접 읽을 기회는 없었다. 그러다가 우연히 넷플릭스에서 중국 CCTV 드라마 신 삼국지를 보면서 제대로 된 삼국지 입문을 하게 되었다. 그리고 동아시아 역사상 가장 유명한 악당 ‘조조’를 만났다.
역사는 승자의 편이라고 한다. 널리 알려졌다시피 삼국지연의는 실제 역사가 있었던 시대가 흐른 후 소설로 재구성된 역사소설의 범주에 속한다. 따라서 삼국지연의가 쓰였던 그 시대의 작가의 관점에 따라 인과 의를 중시하는 영웅 유비가 한 왕조의 부활을 도모하며 군주가 되는 과정을 중심으로 구성되어 있다. 하지만 막상 드라마 <신 삼국지>를 보고 있으면 딱히 누가 영웅인가를 답하기 쉽지 않은 것을 느꼈다. 그것은 각기 다른 성을 가진 제후들이 한족 중심의 중국역사를 깨기 위해 얼마나 치열하게 싸웠는가에 대한 기록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400년간 중심이 되었던 왕조가 그 힘을 잃고 쓰러졌을 때 왕조의 정당성을 증명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인지. 왜 다른 성씨의 황제가 새로운 국가를 세울 수 있는 근거는 무엇인지. 명분과 실질의 갈림길은 무엇인지 치열하게 논쟁하고 다툰다. 이제껏 이토록 솔직하면서 직접적인 정치 역사 드라마는 본 적이 없다는 것이 나의 평. 보통은 중고등학생 필독서라고 하지만 단연컨대 ‘어른’들의 이야기이며 실제 전쟁 영웅담은 결코 미화될 성질이 아니다. 그리고 그런 실질적인 질문들은 고전을 직접 맞닥뜨리고 내용을 완전히 알아야 가능하다는 것. 나는 지금까지 유비에 대해서도 조조에 대해서도 일반적인 편견을 넘지 못했었다는 것이 안타까웠다. 나는 반쪽짜리 역사만 보고 살았던 것이 아닐까. 유비의 입장이 아닌 조조의 입장에서 다룬 역사를 한번 생각해 보게 된다.
<신 삼국지>의 초반부터 드라마를 장악하는 캐릭터는 진건빈이 연기하는 조조다. 초반에는 역적 동탁을 왕좌에서 끌어내리기 위해 18 제후들이 연합해 군사회의를 하는 장면이 있다. 앞으로 나올 모든 영웅들을 한 번에 소개하고 복선을 만들어주는 일종의 무대 장치 역할을 한다고 할까. 그 중요한 순간에 관우 유비 장비가 한 번에 나가 동탁의 장군을 죽이고 뒤이어 맹장인 여포와 싸우는 장면은 대단히 드라마틱 하고 영웅적인 장면이다. 하지만 그런 그들의 뒤에는 매우 현실적으로 정치력을 발휘하는 계산적인 조조가 있다. 그는 직접 싸우지는 않지만 두뇌플레이로 전세 파악을 잘하고 말을 잘하는 야심 가득한 정치인이다. 밥그릇 싸움하기 바쁜 연합군 속에서 그의 목소리를 귀 기울이는 제후는 사실상 없다, 젊은 조조는 기존 정치를 갈아엎고 새로운 구도로 재편하고자 하는 개혁을 목표로 하는 신인으로, 자기는 자신의 이익만을 추구하는 다른 무리 들과는 다르다고 말한다. 연합군을 떠나면서 오직 유비와 자신 그리고 손견 만이 새로운 세계의 영웅이 될 거라고 복선을 깐다. 이런 그의 발언은 그의 정치적 야심이 사적인 욕망을 넘어 새로운 대국을 건설하고 새로운 질서를 만들겠다는 목표까지 다다를 수 있을 것이라는 암시를 준다. 그리고 그런 그의 주장은 더 나아가 새로운 정치 질서에 중심인물이 자기 자신이고, 역사가 자기를 가장 적합한 인물로 택했다는 전제가 깔려있다.
“내가 세상을 버릴 수는 있어도, 세상이 날 버릴 수 없다”는 유명한 그의 말은 역사의 논리상 세상이 가장 통치에 적합한 자로 자신을 택했고, 자신은 그 역할을 맡아서 나아갈 수밖에 없다는 역할론이자 자기 합리화의 주된 근거가 된다. 그래서 그는 갈등하거나 고민하지 않는다.
그런 그의 캐릭터를 잘 보여주는 드라마의 장면은 (물론 역사서에는 없겠지만) 남들이 보는 데서 편하게 오줌을 누고 밥을 먹고 심지어 자기 숙부를 죽인 그날조차도 잘 자는 속 편한 그의 모습이다. 그는 그것이 ‘자기 자신’ 그대로의 모습이며 눈치 보지 않고 자연스럽게 사는 본인 그 자체라고 설명한다. 앞에서 욕을 먹어도 당황하지 않으며 말을 바꾸어도 약속을 바꾸어도 표정 하나 바뀌지 않는다. 어디까지나 자신은 패권 군주로서의 자기 역할을 숨을 쉬는 것처럼 편하게 수행하는 것이다. 모욕과 정신력을 흔드는 무엇을 넘어선 힘의 논리를 대해서 아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감정은 한순간이지만 그 감정 넘어서 주는 교훈이 있다는 걸. 적어도 그 결과가 주는 교훈의 의미는 그가 먹고 자는 것을 빼고는 전쟁에 결코 소홀히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가족이나 그 어떤 가치도 그의 한 가지 목적을 넘어설 수 없기에 오로지 ‘중원 장악’ 한 가지 만을 향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그를 막는 것은 쉽지 않다.
앞서서도 말했지만, 그는 감정에 크게 휩쓸리지 않는 담대함을 가졌다. 그의 인생 초기도 그렇지만 어떤 선택이 어떤 결과를 가져오는지는 지켜봐야 안다. 젊은 시절 동탁이라는 독재자를 암살하고자 했던 자신의 선택이 자기 인생을 어떻게 바꿀지 그도 몰랐을 것이다. 다만 실패하면 죽는 것이라고 단순하게 생각했었다. 하지만 막상 암살시도가 실패하는 과정을 보면 그의 캐릭터가 가진 복잡한 성격을 드러나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는 동탁이 잠든 순간 죽이려고 하지만 갑자기 동탁이 깨어나자 들었던 칼을 바로 내리고 칼을 바치는 척하면서 위기를 모면한다. 불리한 상황에서 입장을 전환함과 동시에 동탁이 선물로 준말을 타고 재빨리 현장을 빠져나간다. 그리고 이어지는 도피 생활에서도 그의 속이기는 계속되는데 자신을 영웅이라고 믿고 동행하게 된 진공 대와 숙부인 여백 사의 성에 들어갔다가 의도치 않게 여백 사의 가족들을 죽이게 된다. 자신을 위해 돼지를 잡는 상황을 자기를 암살하려는 시도로 알고 미리 공격한 그는 자신을 비난하는 진공대를 무시한다. 술을 사서 집으로 돌아오는 여백사를 숲에서 공격한다. 진공대는 친족을 죽이고도 양심 없이 행동하는 조조를 계속해서 비난하고 새벽녘 깊이 잠든 그를 죽일까 고민한다. 하지만 겨우 하루 전에 조조를 따르겠다고 결심한 자기 자신을 용서하지 못한다. 하루 만에 변절해서 죽이는 것은 줏대 없는 일이라 판단하고 잠든 조조를 그냥 둔 채 떠나간다. 삼국지의 긴 이야기에 비하면 서두의 작은 에피소드에 불과한 이 사건이 가지는 의미는 생각보다 상징적이다. 가치관의 차이가 역사에 끼친 영향이란 이렇게도 결정적이기 때문이다. 조조가 진공대의 손에 죽지 않았기 때문에 그는 점점 커져서 전쟁의 길에 본격적으로 진입하게 되는 것. 아침에 일어나서 진공대가 자신을 죽이려 했지만 그렇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은 조조는 대수롭지 않게 툭툭 털고 일어나며 말한다. “죽이려 하면 할 것이지. 그냥 두고 가는 것은 뭐. 괴로워하는 것은 결국 자기 자신이지.”
여러 가지로 의미를 남기는 이 말을 다시 떠올려보면, 한 가지는 조조가 동행인 진공 대를 심각하게 여기지 않고 무시했다는 것이다. 또 자기와 함께 가면 고생하지 않고 성공의 길로 갈 것을 포기했네! 이런 뜻이기도 하다. 또 동탁 암살시도에 실패한 자기 자신에 대한 합리화이기도 하다. 하지만 조조는 절대 반성하지 않는다는 점. 진공 대가 자신을 신뢰했다가 실망한 감정이며 자신과의 의리를 지키기 위해 암살을 포기한 사실을 알면서도 모르는 척하는 그의 캐릭터는 얄밉다.
진공대와 조조의 후일담은 후에도 이어지는데 세월이 흘러 조조는 제법 세력을 갖추고 여포와 대결을 벌이면서 진공대와 다시 만나게 된다. 여포를 죽이고 그의 책사였던 진공대를 다시 만나게 된 조조는 어쩔 수 없이 그를 죽이게 된 상황을 몹시(의외로?) 괴로워한다. 그를 절벽에 세워놓고 눈물을 흘리는 조조는 단순한 위선자일까? 아니면 진심으로 친구를 생각해서 우는 인간인가? 갈등하게 만든다. 여포를 죽일 때에 비하면 좀 다르다. 죽기 전에 진공 대는 조조가 과거에 여박사를 죽였던 사건을 신하들 앞에서 큰 소리로 말하는데, 그 상황에서도 함부로 반응할 수 있는 간 큰 신하는 없었다.
조조는 이 말에도 크게 흔들리지 않으며 여유롭게 웃으며 대처한다. 적어도 그는 자기 무장된 신하에게 보호받는 처지며 그 누구도 자신의 반박할 수 없는 상황에서는 과거란 하나의 사건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진공대 입장에서는 일생에 감춰왔던 비밀을 가슴속에서 풀어놓는 일이었을 것이다. 그 덕분에 조조의 과거는 역사에 남아 재평가를 받게 된다. 그의 업적에는 긍정적인것도 있지만 그에 대한 호불호가 갈리는 이유도 이 때문이다.
권력과 경쟁이란 의미를 생각해 보자. 경쟁이란 과정이고 권력이란 결과이다. 하나의 힘에는 이긴 한 명만 존재하고 나머지는 모두 그 밑에 꿇어야 한다. 어차피 한 명만 이기는 구조에서는 다수의 패배자가 생기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이긴 한 명에 비해 패배한 99명은 실력이 그만큼 없는 것인가? 그것은 경쟁 시스템의 문제일 수 있는데 사람들은 이 시스템에 자기의 본질과 자존심을 건다. 이기고 싶은 것이 단지 상품과 명예 때문만이 아니다. 그러므로 경쟁이라는 시스템을 완전히 포기하고 돌아선다 해도 마음도 왠지 홀가분하지 않다. 왠지 그 경쟁이 자신의 의미를 말해주는 것 같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머지 99명은 자신들이 다수라는 건 깨닫지 못한다. 자신들이 힘을 합치면 1명을 쓰러트릴 수도 있다는 것을. 그러나 그렇지 못한 것은 그렇듯 권력이 심리적인 싸움이기 때문이다. 결코, 너희는 이길 수 없다는. 99명은 분열하기 때문에 내부에서 패배한다. 이것은 문화권이 다른 여러 작품에서 사실상 별 차이가 없는 구도로 여러 번 반복되어 왔다.
예전에 <위 플래시>라는 영화가 있었다. 이 영화에는 악마적일 정도로 가혹한 방식으로 학생들을 훈련하는 플레처라는 음대 교수가 등장한다. 그리고 그 밑으로 19살의 햇병아리나 다름없는 네이먼이 밴드에 들어온다. 교수의 수업방식은 대단히 전제적이어서 실수한 학생에게 소리 지르고 의자를 던지는 것은 보통이고 모욕이나 신체적 폭력도 서슴지 않는다. 그것도 다른 학생이 있는 곳에서 그런 식으로 체벌하기 때문에 학생들은 플레처에게 아무도 대항하지 못한다. 교수의 그런 억압은 학생 한 명이 아니라 누구라도 그렇게 될 수 있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플레처는 완벽한 곡을 연주하는 교실에서의 군주이자 독재자나 다름없다. 네이먼은 이 가혹한 상황에서 살아남기 위해, 밴드에서 한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피가 나도록 노력한다. 아무것도 집중할 수도 없고 체력도 바닥나는 최악의 상황에서 끝까지 버틴다. 왜냐하면, 이 교실에서 돌아나가는 순간 그는 특별함보다 평범한 인생을 선택하게 될 것이고 결국은 음악을 포기할 수밖에 없을 그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가족을 욕하는 최악의 모욕까지 참아가며 교수 밑에 있으려고 한다. 심리적 가스라이팅이 의심되는 상황에서 주변 사람들에게조차 말하지 못한다. 그것이 치욕이기 때문이다.
결국, 네이먼은 무대에서 자신을 모독하는 교수의 행동을 참지 못하고 교수에게 달려들게 되는데 결국 학교를 그만두고, 플레처 역시 학교에서 쫓겨 나는 상황까지 이르게 된다. 하지만 그게 끝이 아니었다. 그는 음악에 미련을 버리지 못한 상황에서 재즈 클럽에 들렀다가 플레처를 만나게 되고 그에게 밴드 입단의 제안을 받으며 무대에 서자는 말을 듣는다. 그러나 이것도 사실은 플레처의 함정이었던 것. 플레처는 공연 직전에 '나를 밀고한 사람이 너였냐' 는 소리를 하며 심리적으로 압박한다. 심지어 공연 전에 네이먼이 모르는 곡으로 악보를 바꿔버리는 만행을 저지른다. 당연히 박자를 못 맞추는 네이먼을 향해 동료와 플레처의 공격이 이어지고 레이먼은 그대로 무대에서 쫓겨나갈 위기에 처한다. 무대에서 나가던 네이먼은 다시 돌아와 플레처에 대한 복수를 진행한다. 레이먼은 플레처가 가장 두려워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았고 그 약점을 깨달았으니 이제는 그것을 과감하게 실행한다.
나는 위플래쉬라는 제목을 한국어로 들었을 때 We flash 정도로만 생각했었다. 하지만 영어철자가 Whiplash고 채찍질이라는 원래 뜻을 알게되었다. 막상 뜻을 알고 나니 좀 섬뜩해지는 면이 있다. 재즈에 원래 같은 제목의 노래가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노래가 이런 제목을 갖게 된 것에는 여러 가지 의미가 있을 것 같은데, 그만큼 곡이 빠르고 격렬한 드럼 음향이 동반된다는 뜻으로 추정해 볼 뿐이다. 밴드에서 드럼이 맡은 역할을 따져봤을 때 칼같이 박자를 인지하라는 교수의 강요는 사실 틀린 말은 아니다. 본인이 맡은 분야에서 감각을 정확하게 열고 있을 때 전체 팀에게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한편으로 네이먼은 어린 나이에 교수가 요구하는 특정 수준까지 드럼연주를 할 수 있게 되었으니 그 결과 자체를 뭐라 하고 싶지는 않다. 아마도 플레처는 레이먼이 자기를 넘어선 존재로서 크길 바라는 마음도 조금은 있었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그 과정이 옳았는가는 다시 질문하게 된다.
조조와 플레처는 공통점은 무엇일까. 어쨌든 그 둘은 구성원들에게 성공적인 미래를 보장해 주겠다고 약속했다. 그리고 방법이야 어찌 됐든 그를 따랐던 사람들은 그에 대한 보상을 받았을 것이다. 사람들은 그것 때문에 그들의 행동이 정당하다고 말을 했다.
하지만 다시 생각해 보자. 일정 부분 성과를 받은 뒤에도 지배자들은 개인의 효용 가치가 없어질 때까지 계속해서 뭔가를 요구한다. 잘 됐을 때는 그나마 보상이라도 받지만 실패했을 때는 가차 없이 당한다. 그것이 독재자를 판단하는 정확한 포인트이다. 그들이 약자와 실패에 대한 태도가 그들의 가장 잔인한 점이다. 또한 그들은 말을 바꿀 가능성도 얼마든지 있다. 그가 공개적인 위치와 석상에서도 그런 태도를 보이는지 잘 살펴보라.
또한, 그 독재자들은 사람을 속이려고하는 자신의 시도를 백 퍼센트 확신을 갖고 시도하는 걸까. 나는 아니라고 본다. 사실은 그들도 상대가 그런 반응을 보일지에 대해 반만 확신하며 배신에 대해 누구보다도 잘 아는 그들이다. 그런 그의 시도의 나머지 반은 그를 상대하고 있는 누군가가 채워주는 것이다. 그렇기에 상대방이 걸려들면 그는 자신에게 더욱더 확신을 가지면서 두 번째 세 번째 시도한다. 이때 누군가가 한 번이라도 반격하면 믿을 수 (없겠지만) 자기 확신이 줄어든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사람들이 귀찮아서 혹은 두려워서 하지 않을 때 걷잡을 수 없이 커지는 것이 독재자의 습성이다. 진정한 의미에서 타인과 잘 지내는 방법을 사실 잘 모르기 때문에 그들은 사실은 역으로 공격당할 가능성도 존재하는 것.
이 긴 글의 논점을 한 가지로 정리하자면 누구도 완벽한 사람은 없고 완전하게 옳은 사람이 없다는 것이다. 모든 사람은 타인으로부터 객관적인 선택을 받고 잘못된 점은 지적받을 수 있으며 고치는 것은 당연한 것인데도 '그 사람만' 안 듣는다면 그 이유는 무엇일까. 그리고 그가 리더라면 어떻게 해야할까. 그럴때는 1가지 뿐이다. 그 1명이 99명과 대화할 태도가 될 때까지 말을 안 듣는 것. 그것말고도 더 좋은 정답이 있다면 답을 달아주시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