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이 왔다갔다...
줌은 스타트업으로 시작했지만, 코로나 시기를 기회로 미친 듯한 성장을 했다. 내가 합류했을 때는 이미 자금력과 시스템이 대기업처럼 구조화되어 있었고, 업무도 세분화되어 있었다. 하지만 의사결정 방식이나 회사 문화는 여전히 스타트업에 가까웠다.
루프트한자는 다소 달랐다. 모기업(마더 컴퍼니)의 영향을 완전히 벗어날 수 없었기에, 자금 지원과 의사결정은 탑다운 방식이 강했다. 하지만 내가 몸담았던 루프트한자 이노베이션 허브는 스타트업 생태계에서 파트너십을 발굴하고 스타트업을 육성하는 역할을 맡았다. 덕분에 본사 직원들보다 훨씬 많은 자유(그리고 책임…)가 주어졌고, 업무 방식도 유연했다. 예를 들어, 업무 시간이 정해져 있지 않았고, 100% 리모트 근무 여부도 전적으로 개인의 선택이었다. 모든 미팅과 점심 시간에 진행되는 ‘Lunch & Learn’ 같은 행사도 온라인을 기본값으로 설정했다.
이제 다시 글로벌 테크 대기업으로 돌아온 지금, 두 환경에서 일하며 느낀 점을 정리해 봤다.
대기업은 시스템이 곧 힘이다. 일이 돌아가는 방식이 정해져 있고, 매뉴얼이 있다. 보고 라인이 명확하며, 최종 결정까지 여러 단계를 거쳐야 한다. 장점은 안정성이 높다는 것. 단점은 속도가 느리다는 것.
반면, 스타트업에서는 모든 것이 빠르게 움직인다. 정해진 프로세스가 없고, 상황에 따라 최적의 방식을 찾아야 한다. 덕분에 새로운 아이디어를 시도하기 쉽지만, 방향이 자주 바뀌어 혼란스럽기도 하다.
대기업은 인력이 충분하기 때문에 역할이 세분화되어 있다. 마케팅이면 마케팅, 제품이면 제품. 각자의 영역이 확실하며, 다른 부서의 업무를 건드릴 필요가 없다. 덕분에 특정 분야에서 깊이 있는 경험을 쌓을 수 있지만, 다른 부서의 결정이 내 일에 영향을 줘도 직접 해결하기 어려운 경우가 많다. 물론 요즘은 대기업도 크로스펑셔널(Cross-functional) 프로젝트가 많아지면서 부서 간 협업이 증가했다. 하지만 여전히 업무 분장이 명확한 편이다.
스타트업에서는 한 사람이 여러 역할을 해야 한다. 마케팅을 하면서 세일즈도 돕고, 프로덕트 전략도 함께 고민한다. 영어로 ‘여러 모자를 쓴다(wearing multiple hats)’고 표현하는데, 이게 동전의 양면 같다.
동료들과 시너지가 좋다면 짧은 시간 안에 다양한 경험을 쌓을 수 있고, 성취감도 크다. 하지만 반대로 조직이 체계적이지 않거나 매니저가 방향성을 제대로 잡아주지 못하면, 전문성을 쌓기가 어려워진다. 내 경험상 이럴 때는 내가 원하는 방향을 명확히 설정하고, 관련 프로젝트에 더 집중할 수 있도록 매니저와 적극적으로 논의해야 한다. 즉 장기적인 내 커리어 방향을 생각해 내 밥그릇을 내가 잘 챙겨야 한다.
그리고 스타트업이라고 무조건 좋은 건 아니다. 조직 문화가 독이 되는 경우(toxic)도 많다. 일이 특정 사람에게만 몰리거나, 상사가 외부 행사에만 신경 쓰고 내부 관리는 소홀히 하는 경우, 혹은 회사가 전략 없이 방향을 수시로 바꿀 때, 직원들은 지쳐서 이직을 고민하게 된다. 스타트업은 본질적으로 ‘돈 많이 받고, 복지 좋은 곳’이 아니라 도전과 성취를 기대하는 곳인데, 이런 기대가 충족되지 않으면 빠르게 다른 기회를 찾아야 한다. 베를린도 스타트업이 참 많은데, 이러한 부정적인 조직 문화로 퇴사하고 번아웃(burn-out)이 와서 이직하거나 퇴사하는 경우를 너무 많이 봤다. :*(
대기업에서는 최종 의사결정이 여러 단계를 거쳐 내려진다. 수많은 회의와 보고가 필요하며, 하나의 안건이 통과되려면 몇 달이 걸리기도 한다. 만약 관련된 이해관계자(Stakeholder)가 많거나, 외부 대기업이나 정부 기관이 얽히면 세월아 네월아 하다가 1년이 지나기도 한다.
예전 회사에서 내부 승인에만 2개월이 걸렸고, 외부 기업과 정부 기관의 협력을 얻기까지 추가로 4개월이 소요됐다. 프로젝트가 빛을 볼 수 있을지 의문이었지만, 결국 1년 만에 실행됐다.
반면, 스타트업은 의사결정이 빠르다. 대표나 주요 의사결정권자가 직접 피드백을 주고, 바로 실행에 옮길 수 있다. 하지만 방향이 자주 바뀌면 직원들은 혼란을 겪는다. 오늘 내린 결정이 내일이면 바뀌고, 다음 주에는 또 새로운 전략이 나오는 경우가 많다. 결국 실행을 담당하는 직원들은 계속 휘둘리고, 피로감이 쌓이게 된다.
대기업에서는 시스템에 적응하는 것이 생존 전략이다. 내가 없어도 조직이 돌아가기 때문에, 구조를 이해하고 이를 최대한 활용해야 한다. 그리고 관련 부서나 경영진의 ‘Buy-in(지지)’을 얻는 것도 중요하다. 아무리 좋은 아이디어가 있어도 조직 내에서 설득하지 못하면 실행할 수 없다.
스타트업에서는 문제 해결 능력이 생존을 좌우한다. 시스템이 없거나 부족한 경우가 많으므로, 직접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필요한 자원을 스스로 찾아야 하고, 상황에 따라 유연하게 대처하는 것이 핵심이다.
첫 직장에서 일할 때는 자유로운 분위기와 빠른 실행력을 가진 스타트업이 더 좋아 보였다. 하지만 막상 스타트업에서 일해보니, 체계가 없고 조직이 제멋대로 운영되는 게 너무 답답했다. 서로 자기 일만 하고 커뮤니케이션이 부족하면 팀 프로젝트가 제대로 돌아가지 않는다. 이럴 때는 대기업의 정교한 시스템과 체계적인 프로세스가 너무 그리웠다.
다시 대기업으로 돌아온 지금, 물론 한국 대기업과는 다른 문화지만, 대기업은 대기업이다. 그러다 보니 스타트업 특유의 빠른 의사결정, 창의적인 문제 해결 방식이 그리워질 때도 있다.
결국 중요한 것은 어디에서 일하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일하고 배우느냐다. 스타트업 경험이 없었다면 지금처럼 유연한 사고를 가질 수 없었을 것이고, 대기업에서 일하지 않았다면 조직을 움직이는 방식을 이해하지 못했을 것이다.
다양한 기업 문화를 경험하며 배운 것들이 지금의 나를 만들었다. 결국, 어느 환경이 더 좋은지는 내가 어디에서 더 잘 성장할 수 있느냐에 달려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