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력에 저항한 대가로 치러야 했던 빛
아버지의 눈
안녕하세요. 덕왕입니다.
오늘은 2025년 12월 3일입니다. 작년 이맘때, 우리 모두는 잊을 수 없는 밤을 지나왔습니다.
TV와 유튜브에서는 그날의 기록들을 다시 비추고 있고,
저 또한 그 선명한 기억들 앞에서 여전히 닭살이 돋습니다.
계엄에 대한 글을 준비했었습니다.
하지만 아무래도 사내 게시판에 올리기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
정치적 중립성을 지향하는 그곳에서, 누군가를 불편하게 할 수 있는 내용을 담기란 쉽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오늘만큼은 조금이라도 남기고 싶은 이야기가 있습니다.
제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이번 계엄과 제 아버지는 45년이라는 세월을 넘어 어딘가에서 맞닿아 있습니다.
그 접점에 대해 쓰고 싶습니다.
제 아버지는 공무원이셨습니다.
젊은 시절, 아버지께서는 학문의 길을 걷고 싶어 하셨습니다.
책을 읽고, 글을 쓰고, 진리를 찾는 삶을 꿈꾸셨던 분이었습니다.
그러나 현실은 녹록지 않았습니다.
뒤로는 줄줄이 달린 삼남매가 있었고,
귀가 얇아 이 사업 저 사업 뛰어들었다 번번이 실패하고 주저앉아 계시는 할아버지가 계셨습니다.
그저 순박하기만 하신 할머니는 그런 가장을 말없이 바라볼 뿐이었습니다.
아버지께서는 꿈을 접으셨습니다. 그리고 취직을 택하셨습니다.
밤낮으로 공부하시어 행정고시에 합격하셨고, 곧바로 공직의 길을 걸으셨습니다.
가족을 부양해야 한다는 책임감이 학자의 꿈보다 무거웠던 것입니다.
어떤 이들은 그것을 현실과의 타협이라 부를 수도 있겠습니다.
하지만 저는 그것이 사랑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자신의 꿈을 내려놓을 수 있을 만큼 큰 사랑 말입니다.
아버지께서도 한때는 소위 '투쟁의 일원'이셨습니다.
1960년대와 70년대, 대학가에서 목청껏 구호를 외치며 팔을 휘둘렀던 청년.
그런 분이 고시 시험장에서 이런 문제를 마주하셨다고 합니다.
'現 대통령의 유신체제의 적법성에 대해 서술하시오.'
어제까지 '호헌철폐, 독재타도'를 외치던 사람이 오늘은 그 체제의 정당성을 논해야 하는 상황.
아버지께서 그 답안지 앞에서 얼마나 오랜 시간 펜을 들지 못하고 계셨을지, 저는 감히 헤아리지 못합니다.
그렇게 아버지는 당신의 신념과 자존심 일부를 굽히셨습니다.
가족들을 먹여 살리기 위해서였습니다.
어린 시절의 저는 그런 아버지를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신념을 버렸다'며 속으로 아버지의 선택을 평가절하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제가 나이를 먹고, 직장을 다니고, 월급을 받아 생활비를 내보고 나서야 비로소 알게 되었습니다.
신념을 굽히는 것이 얼마나 아픈 일인지,
그리고 그 아픔을 감수하면서까지 가족을 택한다는 것이 얼마나 무거운 사랑인지를 말입니다.
아버지는 그렇게 엘리트 공무원이 되셨습니다.
능력을 인정받으셔서 곧바로 국무총리실의 일원이 되셨고,
대통령 연설문을 작성하는 업무를 맡으셨습니다.
당신의 회고에 따르면, 당시 대통령 연설문에는
국가개발 5개년 계획의 구체적인 청사진이 모두 담겨 있었기 때문에 기밀 중의 기밀이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연설문 담당이었던 아버지와 실무자들은 한 달 동안 호텔에 갇혀 지내셨다고 합니다.
외부와의 연락이 완전히 두절된 채, 누군가 넣어주는 밥만 먹으며
오로지 연설문 작업에만 매달리셨던 것입니다.
요즘 식으로 말하면 '강제 워케이션'인 셈인데,
와이파이도 없고 배달 앱도 없는 호텔 감금이라니 상상만 해도 갑갑합니다.
비록 그 시절의 정권이 어떠했든 간에,
아버지께서는 그 일을 통해 국민을 위해 봉사한다는 사명감과 보람을 느끼셨습니다.
나라의 미래를 설계하는 문장을 다듬는 일. 그것은 분명 의미 있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밤, 시대가 바뀌었습니다.
박정희 대통령이 흉탄에 서거했고, 새로운 권력이 등장했습니다.
새 권력은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 줄여서 '국보위'라는 임시 기구를 설치하고 국정을 장악해 나갔습니다.
새 권력의 수장은 자신의 정통성을 확보하기 위해 '국보위백서'라는 것을 발간하기로 했습니다.
정통성을 확보하기 위해 왜곡된 기록을 남기길 원했습니다.
그리고 그 적임자를 찾고 있었습니다.
마침 '행정백서'라는,
조선왕조실록처럼 나라의 1년을 기록하고 편찬하는 업무를 맡고 있던 분이 계셨습니다.
바로 제 아버지였습니다.
아버지께서는 불려가셨습니다.
좌우로 총을 찬 군인들이 서 있는 방에서,
그는 아버지께 새 정권의 정통성을 담은 백서를 만들라고 지시했습니다.
아버지께서는 거절하셨습니다.
"할 수 없습니다."
왜냐는 물음에, 아버지는 떨리는 목소리로 이렇게 말씀하셨다고 합니다.
"저는 역사를 공부한 사람입니다. 역사를 왜곡하거나 거짓되게 꾸밀 수는 없습니다.
이 일은 저와 어울리지 않으니 다른 사람을 시키십시오."
총을 찬 군인들 앞에서, 권력의 한가운데에서, 아버지는 '아니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용기가 어디서 나왔는지 저는 알지 못합니다.
다만 알고 있는 것은, 그 한마디가 아버지의 인생을 완전히 바꿔놓았다는 사실입니다.
그 후 국보위에는 한X수, 김X인 등 여러 저명인사들이 앞장서서 동참했고,
백서는 신속하게 완성되었습니다. 그리고 아버지께서는 사표를 쓰셨습니다.
그러나 웬일인지 사표는 수리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얼마 후, 광주에서 무장간첩에 의한 소요사태가 일어났다는 소식이 들려왔습니다.
"그럴 리가. 광주에 간첩이?"
아버지께서는 의아해 하셨습니다.
그러나 대기발령 상태에서 진실을 알아볼 도리는 없었습니다.
휴직 처리가 된 상태에서 아버지께서는 외국 유학을 떠나기로 하셨습니다.
원래는 가족 모두를 데리고 미국으로 가려고 하셨습니다.
그만둘 각오로, 새 출발을 하실 생각이셨던 것입니다.
그런데 웬일인지 아버지를 제외한 가족 모두에게 여권이 발급되지 않았습니다.
아버지께서는 홀로 미국행 비행기에 오르셔야 했습니다.
낯선 타국에서, 아버지께서는 몇몇 한국 유학생들과 함께 어둠 속에 모여 한 편의 영상을 보셨습니다.
그 영상의 제목은 '광주'였습니다.
당시 국내에서는 절대 볼 수 없었던, 그해 5월의 진실이 담긴 영상이었습니다.
아버지께서는 그 영상을 보며 우셨습니다. 함께 본 유학생들 모두가 울었습니다.
신음하고, 절규하고, 서로를 부둥켜안고 울었습니다.
초등학생도 되지 않은 아이가 빈 가마니 마냥 군인들에게 끌려가는 장면은
잔인하다는 말로도 부족한 장면이었다고 합니다.
그 밤, 아버지 마음속에는 씻을 수 없는 무언가가 새겨졌습니다.
그것은 미안함이었습니다. 직접 잘못한 것은 없었을지언정,
같은 시대를 살면서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는 미안함.
그 무게는 수십 년이 지나도 가벼워지지 않았습니다.
아버지께서는 새 정권 말기에 다시 귀국하셔서 복직하셨습니다.
하지만 예전처럼 중요한 업무를 맡으실 수는 없었습니다.
국가의 미래를 설계하는 연설문을 쓰시던 분이, 아무 일도 없는 한직을 떠도셨습니다.
텅 빈 사무실. 서류 한 장 올라오지 않는 책상. 창문 밖으로 보이는 쓸쓸한 겨울나무.
아버지께서는 그 풍경을 하루 종일 바라보셨습니다.
그것은 누가 보아도 명백한 보복이었고, 냉대였고, 멸시였습니다.
만약 가족이 없었다면 견딜 수 없는 수모였을 것입니다.
하지만 아버지께서는 견디셨습니다. 이를 악물고, 참고, 인내하셨습니다.
아내와 아이들을 생각하며 하루하루를 버티셨습니다.
그 대가는 혹독했습니다.
아버지께서는 극심한 스트레스로 인해 왼쪽 눈을 거의 실명하셨습니다.
국보위 시절의 압박, 미국 유학 당시의 충격, 귀국 후의 멸시.
그 모든 것을 참고 삼키느라, 아버지의 눈은 빛을 잃어갔습니다.
저는 그 사실을 한참 후에야 알게 되었습니다.
아버지께서는 제가 성인이 될 때까지 단 한 번도 그 아픔을 내색하지 않으셨기 때문입니다.
아버지의 대학 시절 스승이 계셨습니다.
강단에서 민주주의의 가치를 열정적으로 가르치셨던 분이셨습니다.
젊은 아버지는 그분의 강의를 들으며 가슴 뛰는 이상을 품으셨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스승은 훗날 국보위에 몸담으셨습니다.
그리고 국무총리의 자리에까지 올랐습니다.
저의 아버지는 총리도, 장관도 되지 못하셨습니다.
평생을 지방의 공무원으로 사시다가 조용히 퇴직하셨습니다.
아버지께서는 그릇에 맞는 자리를 맡지 못하셨습니다.
하지만 아버지께는 그의 스승에게 없는 것이 있습니다.
기개가 있습니다. 총 앞에서도 '아니오'라고 말할 수 있었던 기개.
반성이 있습니다. 직접 잘못하지 않았음에도 같은 시대를 살았다는 이유만으로 미안해할 줄 아는 반성.
청렴결백이 있습니다. 권력에 줄 서지 않고, 신념을 팔지 않고, 묵묵히 자신의 길을 걸어온 청렴.
그리고 무엇보다,
자신의 나약함을 인정하면서도 결코 양보할 수 없는 원칙만은 지켜낸 진정한 용기가 있습니다.
아버지는 완벽한 분은 아니셨습니다.
꿈을 포기해야 했고, 신념의 일부를 굽혀야 했고, 권력 앞에서 모든 것을 거부하지는 못하셨습니다.
하지만 마지막 선만은 지키셨습니다. 역사를 왜곡하라는 명령 앞에서, 그 선만은 절대 넘지 않으셨습니다.
저는 그것이 진짜 용기라고 생각합니다.
영웅적인 저항이 아니라, 평범한 사람이 지켜낸 마지막 한 줄의 원칙.
그것이야말로 우리 같은 보통 사람들이 배워야 할 용기가 아닐까 합니다.
올해 가을, 저는 부모님을 모시고 광주를 다녀왔습니다.
5.18 민주항쟁 묘역을 참배했습니다.
묘역에 들어서는 아버지의 발걸음은 차분했습니다.
45년 동안 마음속에 품고 계셨던 미안함이 한걸음마다 천천히 씻겨 나가는 것 같았습니다.
참배를 마치고 나오시는 아버지의 얼굴에는 환한 미소가 번져 있었습니다.
무언가 내려놓으신 것 같은, 평화로운 미소였습니다.
그 미소를 보는 순간, 저는 한쪽 가슴이 뜨거워졌습니다.
45년. 아버지께서 그 무게를 얼마나 오래 지고 계셨는지.
그리고 이제야 비로소 조금이나마 놓으실 수 있게 되셨구나.
다행히도 부모님께서는 알아차리지 못하셨습니다.
그날 저녁, 가족 모두 함께 광주의 어느 작은 식당에서 밥을 먹었습니다.
특별한 대화는 없었습니다. 그저 함께 밥을 먹고, 함께 웃고, 함께 있었습니다.
그것으로 충분했습니다.
얼마 전, 아버지께서는 바로 그 왼쪽 눈에 조금이나마 광명을 찾고자 수술을 받으셨습니다.
45년 전 잃어버린 빛. 권력에 저항한 대가로 치러야 했던 빛.
그 빛의 일부라도 되찾으실 수 있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저 또한 회사에서 쌓인 마음속 응어리가 있습니다.
부당함 앞에서 삼켜야 했던 말들, 원칙과 현실 사이에서 고민했던 순간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감히 당시 아버지께서 겪으셨던 것에 비할 바는 못 됩니다.
저는 아버지께 배웁니다.
완벽하지 않아도 괜찮다는 것을.
모든 것을 거부하지 못해도 괜찮다는 것을.
다만 마지막 한 줄의 원칙만은 지켜야 한다는 것을.
그리고 무엇보다, 가족을 위해 자신의 꿈을 내려놓을 수 있는 것.
그것이야말로 가장 큰 사랑이라는 것을.
그렇기에 계엄의 1년이 지난 오늘은 제게 더욱 특별한 의미가 있는 날입니다.
많은 분들께서 오늘 각자의 방식으로 그날을 기억하고 계실 것입니다.
누군가는 분노할 것이고, 누군가는 슬퍼할 것이고, 누군가는 아무렇지 않게 하루를 보낼 것입니다.
모두의 감정이 다를 것이고, 그 모든 감정을 존중합니다.
저는 오늘, 아버지를 생각합니다.
45년 전 그날 밤, 총 앞에서 '아니오'라고 말씀하셨던 젊은 공무원을.
그리고 그 대가를 묵묵히 치르며 가족을 지켜오신 한 사람의 가장을.
이번 주말에는 아버지께서 좋아하시는 막걸리를 사들고 찾아뵈어야겠습니다.
함께 잔을 기울이며 옛날이야기를 들어봐야겠습니다.
아버지의 이야기는 역사책에 실리지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저는 기억할 것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작은 기록으로 남깁니다.
평범한 한 사람이 지켜낸 원칙에 대하여.
그 원칙을 지키기 위해 치러야 했던 대가에 대하여.
그리고 그 모든 것을 견디게 해준 가족의 사랑에 대하여.
아버지. 존경합니다. 그리고 사랑합니다.
다음 시간에 뵙겠습니다.
엄
언제나 한 걸음 더
V I R T U E K I N 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