착한 사람들이 왜 정치 앞에서는 악마가 되는가?
안녕하세요. 덕왕입니다.
지난 시간, 우리는 한나 아렌트의 "악의 평범성"과 에른스트 블로흐의 "비동시성의 동시성"이라는 두 개의 렌즈를 바탕으로 평범한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을 멈추고 악에 동참하게 되는지, 그리고 같은 시대를 사는 사람들이 서로를 적으로 느끼는 정치적 극성화 현상까지 들여다보았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우리를 옭아매는 여섯 겹의 덫을 확인했습니다. 정치를 생존의 위협으로 착각하는 뇌, 부족주의를 강화하는 호르몬, 자기기만을 정당화하는 확증편향, 우리 대 그들의 프레임을 만드는 집단 정체성, 경제적 결핍이 빼앗아가는 인지 능력, 그리고 분노를 상품으로 파는 알고리즘 미디어까지.
이 모든 것이 거미줄처럼 우리를 에워싸고 있습니다. 하지만 절망하기는 이릅니다. 지금부터 우리는 탈출구를 찾아볼 것입니다. 어떻게 생각을 되찾을 것인가? 개인적 차원에서, 사회적 차원에서, 그리고 냉철해야 할 투자자로서 어떻게 이 광기에서 벗어날 것인가?
본격적으로 해법을 탐구하기 전 당부의 말을 전합니다. 두 번째 시간의 글은 첫 번째 시간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민감한 분야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제 안의 작은 아이가 '님아, 그 강을 건너지 마오'라고 간절히 속삭였지만 피하지 않기로 했습니다. 판도라의 상자를 여는 마음은 두려움을 필연적으로 수반하지만 상자 속엔 희망도 들어있었다는 것을 기억합니다.
객관적인 데이터와 자료에 근거하여 글을 쓰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하지만 완전한 객관화란 존재할 수 없으며 여러분의 생각과 맞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기대에 미치지 못하는 모든 이유는 덕왕의 '무지'와 '부덕'에서 나온 것이기에 모든 비판은 제게 해주십시오. 상호 간의 건전한 토론은 환영하지만 서로에 대한 인신공격과 세대 및 성별에 대한 근거 없는 공격은 자제해 주시길 간곡히 부탁드립니다.
아울러 글을 다 읽고 난 이후에는 눈을 감고 천천히 호흡하며 생각을 정리하는 자신을 발견할 수 있기를 바라며 두 번째 시간을 시작합니다.
앞서 살펴본 여섯 겹의 덫만으로도 충분히 복잡하지만, 한국 사회에는 치명적인 두 개의 덫이 더 있습니다. 바로 20대를 중심으로 한 세대와 성별 간 갈등입니다.
숫자가 말하는 세대 전쟁
20대 남녀의 정치 성향이 극명하게 달라지고 있습니다. 지난 2022년 대선에서 20대 남성의 58.7%가 윤석열 후보에 투표했고, 20대 여성의 58.0%는 이재명 후보를 선택했습니다.
2025년 대선에서는 이 균열이 더욱 깊어졌습니다. 20대 전체에서 41.3%가 이재명 후보에게 투표했지만, 이를 성별로 나누어 보면 이야기가 완전히 달라집니다. 출구조사 결과 20대 남성의 약 74%가 보수 후보들 중 한 명에게 투표하고 이재명 후보에게는 24.0%만이 투표한 반면, 20대 여성에서는 약 58%가 이재명 후보에게 투표하고 35.6%만이 보수 후보에게 표를 주었습니다.
이는 단순한 의견 차이가 아닌 같은 세대 내에서 완전히 다른 현실을 인식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2022년 대선에서 처음 드러난 20대 남성의 보수화와 20대 여성의 진보화라는 균열의 조짐은 시간이 갈수록 더욱 분명해지고 있습니다.
정당의 지지율도 마찬가지입니다. 2025년 2월 기준, 20대 남성의 국민의힘 지지율은 36%인 반면 민주당 지지율은 14%에 불과합니다. 반대로 20대 여성은 민주당 지지율이 압도적으로 높습니다.
한국갤럽의 2024년 조사에 따르면, 전 세대를 통틀어 20대 남성의 보수화 경향이 가장 두드러집니다. 이것은 역사적으로 매우 이례적인 현상입니다. 전통적으로 젊은 세대는 진보 성향을 보여왔고, 나이가 들면서 보수화되는 패턴을 보였습니다. 그런데 지금의 20대 남성은 50-60대보다 더 보수적으로 변하고 있습니다.
글로벌 비교를 해보겠습니다. 2023년 Financial Times의 분석에 따르면, 미국과 유럽에서도 젊은 남성과 여성 사이의 정치 성향 격차가 벌어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한국의 격차는 40점 이상으로 미국의 31점, 독일의 30점, 영국의 25점을 훨씬 상회합니다. 유럽의 대부분 국가는 7-10점 차이에 불과합니다. 우리나라가 이 분야에서도 세계 1등을 하다니, 자랑스러워야 할지 슬퍼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무엇이 한국의 20대를, 특히 20대 남성을 이렇게 만들었을까요? 기성세대들은 20대 남자들을 '이대남'으로 부르며, 뭐가 부족해서 보수가 되는지 이해할 수 없다는 반응을 보이지만 이것은 세대 간의 보수화의 원인을 파악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60대 이상의 세대가 '반공'과 '정부 주도의 성장 우선주의'를 핵심으로 한 '이념적 보수'라면 20대 남성은 '반(反) 페미니즘'과 '공정성'을 핵심으로 한 '기능적 보수'입니다.
그들의 마음이 다른 세대와 다르게 돌아선 이유를 좀 더 자세히 살펴보겠습니다.
경제적 박탈감: 사다리가 사라진 세대
첫 번째 이유는 경제적 박탈감입니다. 젊은 세대가 기성세대보다 단순히 가난하다는 것이 핵심이 아닙니다. 핵심은 "격차의 확대"입니다.
한국은행과 통계청 자료를 보면, 2010년부터 2020년까지 20-30대의 순자산은 연평균 4.3% 증가했습니다. 나쁘지 않은 수치처럼 보이지만 같은 기간 40-50대의 순자산은 6.8% 증가했습니다. 격차가 확대되고 있다는 뜻입니다.
피케티의 경고: r > g의 저주
토마스 피케티는 그의 저서 <21세기 자본>에서 r > g (자본수익률이 경제성장률보다 크다)라는 유명한 부등식을 통해, 자산 불평등이 구조적으로 심화될 수밖에 없음을 증명했습니다. 자본이 돈을 버는 속도가 사람이 땀 흘려 일해서 돈을 버는 속도보다 훨씬 빠르기 때문에, 이미 자산을 가진 기성세대와 이제 막 사회에 진입한 청년 세대의 격차는 좁혀질 수 없습니다. 마치 아무리 달려도 따라잡을 수 없는 제논의 역설 같은 일이 실제로 벌어지고 있습니다.
만약 자본수익률(r)이 연 5%이고 경제성장률(g)이 연 2%라고 가정해 봅시다. 10년 후의 격차를 보면, 1억 원의 자산을 가진 사람은 1.6289억 원(6,289만 원 증가)이 되고, 연봉 3,000만 원인 사람은 3,657만 원(657만 원 증가)이 됩니다. 격차는 9.57배입니다.
20년 후의 격차를 보면, 자산 보유자는 2.6533억 원(1억 6,533만 원 증가)이 되고, 노동자는 4,458만 원(1,458만 원 증가)이 됩니다. 격차는 11.34배로 벌어집니다.
2024년 통계청 가계금융복지조사 결과에 따르면 30대 이하(20~39세)의 순자산은 평균 약 2억 2천만 원인 반면, 40-50대는 4억 5,000만 원에서 5억 초반을 보유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세대 간 자산 격차가 두 배 가까이 벌어진 것입니다. 2억 원 이상의 절대적 격차도 이들에겐 아득한 차이인데 따라잡을 수 없는 현실은 절망감을 안겨줄 뿐입니다.
현재 시스템에서는 이 격차가 좁혀지기 어렵습니다. 2024년 기준 서울의 PIR(주택가격/연소득 배수)은 13.9배입니다. 숨만 쉬고 일해도 내 집 마련에 14년이 걸립니다. 청년가구(19-34세)의 자가점유율은 12.2%로 전체 평균의 5분의 1 수준입니다. 40년 전만 해도 20대의 자가 보유율이 30%였던 것과 비교하면 절반 이하로 추락한 것입니다.
이를 부채질한 것이 바로 '금리'와 '통화정책'입니다. 돈을 많이 풀면 필연적으로 자산가격이 높아지는데 비해 이 과정에서 부의 재분배는 불평등하게 이루어집니다. 소득이 높고 자산가치가 높은 사람들은 저금리로 많은 금액을 대출받을 수 있지만 소득이 낮고 자산을 축적하지 못한 젊은 세대는 적은 금액을 고금리로 대출받거나 아예 그마저도 불가능합니다.
결국 기성세대의 부는 더욱 증가하고 소득이 상대적으로 낮은 젊은 세대의 부는 상대적으로 감소하여 세대 간 차이가 더욱 확대됩니다. 지난 십 년 이상의 전 세계적인 저금리 기조와 한국의 부동산 정책은 이를 더욱 부채질했습니다.
젊은 세대는 열심히 일해도 집을 살 수 없고, 저축해도 노후를 준비할 수 없으며, 결혼하고 아이를 낳는 것은 사치를 넘어 두려움이 되었습니다. 그들에게 "노력하면 된다"는 말은 더 이상 통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이미 충분히 노력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공정성 프레임: 과연 평등한가?
두 번째 이유는 "공정성"에 대한 의문입니다. 20대 남성이 느끼는 박탈감은 단순히 경제적인 것만이 아닙니다. 그들은 "역차별"을 당하고 있다고 느낍니다.
채용 시 여성 할당제에 대한 불만, 성범죄에 대한 엄격한 처벌이 "무고죄"로 악용될 수 있다는 두려움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합니다.
특히 2018년 홍익대 누드모델 불법촬영 편파 수사 논란과 이에 대한 메갈리아의 반응, 미투 운동의 확산 등은 20대 남성에게 "우리는 희생양이 되고 있다"는 인식을 심어주었습니다.
TMI: 홍익대 누드모델 불법촬영 사건
2018년 홍익대 누드모델 불법촬영 사건은 여성 모델이 남성 모델의 나체를 몰래 촬영해 남성혐오 사이트인 워마드에 유포한 사건으로, 가해 여성은 징역 10개월 실형을 받았습니다. 이 사건은 '편파 수사' 논란을 일으켜 대규모 페미니즘 시위를 촉발했습니다. 여성들은 '피해자가 남자라서' 여성 피의자에 대한 가혹 수사를 비판했으나, 젊은 남성들은 오랫동안 남성들에 대한 편파수사가 있었음을 주장하며 남성 피해자의 고통을 외면하고 가해자를 피해자처럼 포장한다고 느꼈습니다.
보수 진영은 이 불만을 "공정성"의 프레임으로 포장하고 이를 정치적으로 자산화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노력하지 않는 사람들이 혜택을 받는다", "역차별이 만연하다", "능력주의가 무너졌다"는 메시지는 경제적으로 불안한 젊은 남성들에게 강력하게 어필했습니다.
또 하나의 이유로는 그들이 지난 진보 정권에 의해 소수의 목소리와 감정에 좌우되어 공정이 파괴된 사례를 보았기 때문입니다. 소수 및 약자를 보호하는 것에는 기본적으로 저 또한 찬성하나 개인의 노력을 무력화시키거나 공론화의 과정 없이 피해자를 양산할 수 있는 법의 제정은 지난 진보 정권이 저지른 분명한 실수입니다.
당시 사회적 분위기로 제정된 '민식이법'은 희생자의 아픔에는 동의하지만 법률 제정에 있어서 충분한 토의와 공론화 과정 없이 당시 사회적 분위기 몰이로 인해 제정되었습니다. 운전자가 아무리 조심해도 불가항력적 사고가 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과도한 형량을 부과하여 감성이 법리를 넘어섰다는 평가를 받기도 했습니다.
또한 인천국제공항공사 보안검색요원들의 정규직 채용사례에서도 볼 수 있듯이, 과정의 공정함과 결과의 정의로움을 외쳤던 진보 정부의 목소리와는 정면으로 배치되는 조치들은, 노력 없이도 운만 좋으면 정규직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며 노력하는 청년들을 절망에 빠뜨렸습니다. 양성 평등을 위한 정책을 수립하고 집행하는 것으로 충분한데 스스로를 페미니즘 정권이라 자처했던 것도 정치적으로는 아마추어적 패착에 가깝습니다.
의무와 사랑을 혼동하는 사회: 군대 문제
그리고 20대 남성들의 분노에 기름을 붓는 가장 결정적인 원인, 바로 군 복무 문제입니다. 대한민국은 세계 유일의 분단국가이자 휴전 국가입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군인에 대한 사회적 대우는 매우 낮은 수준입니다.
세계의 군인 대우
미국의 제35대 대통령 존 F. 케네디는 "국가는 그 나라가 배출한 인물뿐만 아니라, 그 나라가 기억하고 존경하는 인물에 의해 그 정체성이 드러난다"라고 말했습니다. 미국 시민들은 군인을 마주칠 때마다 "Thank you for your service"라고 말하고, 노르웨이에서는 여성 징병제를 '특권'으로 여깁니다.
반면 우리나라는 어떻습니까? 의무만 있고 존중은 없습니다. 군인을 '군바리', '집 지키는 개'라고 비하하며, 성스러운 군복무의 의무를 '군캉스'라고 비웃는 목소리는 젊은 남성들에게 씻을 수 없는 모멸감을 주었습니다. 한국에서 20대 남성의 보수화는 단순히 보수 정당이 좋아서가 아닙니다. "국가가 나를 부려먹고 버렸다", "젊음을 희생했는데 아무도 알아주지 않고 고마워하지도 않고 오히려 비웃는다"는 배신감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한국은 2013년부터 공무원·공기업 채용 시 군가산점제를 전면 폐지했습니다. 이는 헌법재판소의 위헌 결정 때문이었습니다. 그렇다면 다른 나라들은 어떨까요?
미국은 연방 공무원 채용에서 Veterans' Preference 제도를 통해 제대군인에게 가산점을 부여합니다. 영국은 공공부문에서 제대 군인 채용의 우선권을 주며 채용 기업에 세제혜택 및 홍보를 지원합니다. 징병제를 실시하는 이스라엘은 제대 후 대학 진학 시 학비의 75%를 장학금으로 지원합니다. 국가를 위한 헌신을 교육의 기회로 보답하는 것입니다. 역시 징병제 국가인 싱가포르는 현역 복무부터 예비군 완료 시까지 NS HOME Award를 통해 총 17,000~18,500 싱가포르 달러(약 17,000~19,000 미국 달러)를 지급합니다. 이는 단순한 월급 외에 국가가 제공하는 확실한 금전적 보상입니다. 또 다른 징병제 국가인 스위스는 징병제 유지에 대한 국민투표 찬성률이 73%에 달할 정도로 사회적 합의가 견고합니다. 그 비결은 '소득 보전'입니다. 고용주는 복무 중인 직원에게 급여를 100% 지급하고, 정부로부터 보상금을 환급받습니다. 징집병이라도 실질 소득 손실이 거의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나라에서는 군가산점제는 폐지되었고, 복무 기간 동안의 학비 지원도, 전역 후의 세제 혜택도, 사회 진출 시의 소득 보전도 전무합니다. 전쟁이 끝나지 않은 분단된 나라에서 말입니다.
최근 병장 월급이 2025년 기준 150만 원, 지원금을 합치면 205만 원까지 오른다고 대대적으로 홍보합니다. 하지만 이것이 충분한 보상일까요? 2025년 최저임금은 시간당 10,030원입니다. 주 40시간 기준 월 환산액은 약 209만 6,270원입니다. 병사들은 사회와 격리된 채 24시간 부대 내에서 생활하며 통제를 받습니다. 노동 시간과 자유의 박탈을 고려하면, 205만 원은 최저임금 수준에도 미치지 못하거나 겨우 턱걸이하는 수준입니다. 이건 마치 마라톤을 뛰어야 하는데 고무신을 주며 "발 안 아프지?"라고 묻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출산과 군 복무: 비교할 수 없는 가치
이 논쟁이 나올 때마다 등장하는 "남자는 군대 가지만, 여자는 애 낳잖아"라는 말은 논리적으로 성립할 수 없는 틀린 비교입니다.
의무 vs 권리: 군 복무는 헌법과 법률이 강제하는 '법적 의무'입니다. 반면 출산은 개인의 행복 추구권과 사랑에 기반한 '선택'적 권리입니다.
본질의 호도: 만약 출산이 군 복무의 등가교환이라면, 아이를 낳지 않은 비혼 여성은 병역 기피자와 같은 것일까요? 결코 아닙니다. 이런 비교가 더욱 나쁜 이유는 본질에 대한 사유와 토론을 그 시작부터 불가능하게 만들며 사회적 합의를 위해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20대 남성들, 그들이 원하는 것은 거창한 것이 아닙니다. "국가의 부름에 응해 가장 빛나는 젊음을 바치고 위험을 무릅쓴 것에 대한 합당한 보상과 사회적 존중"입니다.
이제 고개를 돌려 반대편에 앉아 있는 20대 여성의 이야기를 들어보겠습니다. 20대 남성이 '공정성'과 '역차별'에 분노한다면, 20대 여성은 '생존'과 '구조적 차별'에 절망하고 있습니다. 그들의 분노 역시 막연한 감정이 아닌, 차가운 데이터에 근거하고 있습니다.
생존의 문제: 안전에 대한 공포
많은 20대 남성에게 밤길은 그저 어두운 길이지만, 많은 20대 여성에게 밤길은 '죽을 수도 있는 길'입니다. 이것은 과장이 아닙니다.
대검찰청의 <2023 범죄분석> 통계에 따르면, 흉악 강력범죄(살인, 강도, 방화, 성폭력) 피해자의 약 85%가 여성입니다. 특히 성폭력 범죄 피해자의 90% 이상이 여성이라는 점은 시사하는 바가 큽니다.
여기에 더해 '딥페이크 성범죄', 'N번방 사건으로 대표되는 불법 촬영(몰카)', '스토킹 범죄' 등 디지털 성범죄와 신종 범죄의 타깃 역시 압도적으로 젊은 여성을 향하고 있습니다. 20대 여성들은 뉴스를 볼 때마다 자신의 얼굴을 대입합니다. "운이 좋아 살아남았다"는 자조 섞인 말이 나오는 이유입니다.
이들에게 정치는 단순한 정책 대결이 아니라, "누가 나를 죽지 않게 지켜줄 것인가"라는 생존의 문제입니다. 여성가족부 폐지 논란이나 구조적 성차별은 없다는 정치권의 발언이 나올 때마다 이들에게는 생존 위협으로 다가오는 것입니다.
유리천장: 보이지 않는 벽
20대 남성이 군 복무로 인한 경력 단절과 사회 진입 지연을 억울해하듯, 20대 여성은 취업 이후 마주할 거대한 벽, 즉 '유리천장'에 절망합니다.
"여대생이 학점도 더 높고, 공무원 시험 합격률도 더 높지 않으냐"는 반문이 있습니다. 맞습니다. 사회 진입 초기, 즉 20대 초중반의 스펙 경쟁에서는 여성이 두각을 나타내기도 합니다. 하지만 시야를 조금만 더 넓혀보면 현실은 다릅니다.
영국 시사주간지 <이코노미스트>가 발표하는 '유리천장 지수(The Glass-Ceiling Index)'에서 한국은 2013년부터 2024년까지 12년 연속 OECD 최하위를 기록했습니다. 실제로 국내 100대 기업의 여성 임원 비율은 2023년 기준 약 6%에 불과합니다. 입사는 비슷하게 했더라도, 위로 올라갈수록 여성은 사라집니다.
M-커브의 절망: 경력 단절의 덫
20대 여성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바로 'M-커브'입니다. 여성의 연령별 고용률 그래프가 30대 중후반에 푹 꺼졌다가 40대 이후 다시 올라가는 M자 모양을 그린다는 데서 유래한 용어입니다.
이 푹 꺼진 구간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바로 임신, 출산, 육아로 인한 경력 단절(Career Break)입니다. 20대 여성들은 선배들이 출산과 함께 회사에서 밀려나거나, 복직하더라도 승진에서 누락되고 한직으로 밀려나는 모습을 생생하게 목격합니다.
"애 낳으면 회사 그만둬야 하나?"라는 고민은 20대 남성에게는 드물지만, 20대 여성에게는 실존적인 공포입니다. 통계청 자료에 따르면 경력 단절 여성의 재취업 일자리는 대부분 기존보다 임금과 처우가 낮은 비정규직이나 서비스직에 집중되어 있습니다.
채용 성차별의 잔재
2023년에도 여전히 채용 면접장에서 "결혼 계획이 있느냐", "남자친구는 있느냐", "야근이 많은데 여자가 버틸 수 있겠느냐"는 질문을 받는 여성들이 존재합니다. KB은행, 신한은행 등 여러 금융권과 서울메트로, 한국가스안전공사 등의 공기업의 채용 비리 사건에서 남성 지원자의 점수를 올려주기 위해 여성 지원자를 고의로 탈락시킨 사례들은 20대 여성들에게 "아무리 노력해도 성별 때문에 안 될 수 있다"는 깊은 불신을 심어주었습니다.
서로 다른 행성, 같은 고통
정리해 봅시다.
20대 남성은 이렇게 말합니다. "군대 가서 2년 썩고 왔는데, 사회는 나를 잠재적 가해자 취급하고, 역차별받는 느낌이다. 내 노력에 대한 정당한 보상을 원한다."
20대 여성은 이렇게 말합니다. "안전하게 살고 싶고, 결혼과 출산이 내 커리어의 무덤이 되지 않기를 바란다. 구조적 차별이 없다는 말은 거짓말이다."
이 두 목소리는 모순적으로 들리지만 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서로 다른 영역에서의 고통을 호소하고 있을 뿐입니다. 에른스트 블로흐의 "비동시성의 동시성"을 다시 떠올려봅시다. 20대 남성과 20대 여성은 같은 2025년을 살고 있지만, 완전히 다른 현실을 경험하고 있습니다. 마치 같은 영화관에서 다른 영화를 보고 있는 것처럼 말입니다.
정치는 해결책을 제시하지 않은 채 이들을 '제로섬 게임'의 링 위에 올려놓았습니다. 보수는 "공정"을, 진보는 "페미니즘"을 외치지만 실상은 "쟤를 죽여야 네가 산다"는 악마의 속삭임을 하며 갈등을 키우고 싸움을 부추기며 표를 구걸하고 있습니다.
두 진영은 통계의 함정을 이용하여 그들의 목소리에 권위를 부여합니다. 실제 데이터를 보면 여성이 노동시장에서 받는 차별은 여전히 존재합니다. 2024년 OECD 통계에 따르면 한국의 성별 임금 격차는 29%로 회원국 중 최하위입니다. 지표에서 여성 고용률은 남성보다 20% 포인트 낮고, 관리직 여성 비율은 15%에 불과한 것으로 나옵니다.
하지만 20대 남성에게 이런 통계는 설득력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의 "체감 현실"과 다르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보는 것은 대학 입시에서 여학생의 높은 성적, 공무원 시험에서의 여성 합격자 증가, 미디어에서의 페미니즘 담론의 확산입니다. 반대로 20대 여성들은 이 통계를 보며 그들이 여전히 차별 속에서 살고 있으며 나아지지 않는다며 더 많은 정책적 보호를 호소합니다.
서로 정반대의 입장에 있는 이들에게 공통점이 딱 하나 있었습니다. 바로 '제대로'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사색의 부족과 미디어와 커뮤니티에서 공급되는 의견에 대한 무조건적인 동조로 인해 서로를 적으로 돌리며 진정한 해결은 점점 멀어지고 있습니다.
이 불평등의 갈라치기를 위해 가장 대표적으로 인용되는 수치가 바로 OECD 성별 임금격차(OECD Gender Pay Gap)입니다.
앞서 말씀드렸듯이 2024년 OECD 통계에 따르면 한국의 성별 임금 격차는 29%로 부동의 1위입니다. 이 숫자를 두고 한쪽에서는 "여성 차별의 명백한 증거"라고 하고, 다른 쪽에서는 "조작된 선동"이라고 합니다. 과연 진실은 무엇일까요? 각자의 결론을 잠시 내려놓고 이야기를 들어주십시오.
OECD 통계의 맹점: 중위소득의 함정
OECD 통계에서 말하는 성별 임금격차는 정확히는 "남녀 전체의 중위 임금(median earnings)을 비교한 값"을 의미합니다. 이 지표는 전체 현황의 평균일 뿐 동일노동, 동일조건을 보정하지 않습니다. 즉 직종, 직급, 근속연수, 근로시간, 고용형태(정규·비정규), 기업 규모 등 다양한 요소를 따로 통제하지 않은, 이른바 '조정 전(unadjusted)' 격차입니다.
이 수치는 "전체 남성 임금근로자의 임금 분포 가운데 중간에 위치한 사람"과 "전체 여성 임금근로자의 임금 분포 가운데 중간에 위치한 사람" 사이의 차이를 말할 뿐, 같은 회사·같은 직무·같은 조건에서 여성에게 29% 낮은 급여를 지급한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이건 마치 사과와 배를 비교하면서 "사과가 더 비싸니까 배 농사꾼은 차별받는 것이다"라고 주장하는 것과 비슷합니다.
'29% 차별'도 '전부 조작'도 아닌 이유
일부에서는 이 통계를 근거로 "여성이라서 임금을 29% 덜 받는다"라고 주장하지만, 또 다른 일부에서는 "현실을 왜곡한 선동"이라고 완전히 부정합니다. 그러나 실제 연구 결과를 보면, 두 극단 모두 사실을 과장하거나 왜곡한 측면이 있습니다.
한국과 해외의 여러 연구에서 학력, 경력, 직종 등을 통제해 남녀 임금격차를 분해해 보면, 격차의 상당 부분은 직종에 의한 '구조적 요인'으로 설명되고, 설명되지 않고 남는 격차는 대략 한 자릿수 퍼센트(연구에 따라 대략 3~10% 내외) 수준으로 추정된다는 연구결과가 있습니다.
우리나라의 경우 여성의 출산과 육아에 의한 경력 단절 구조가 상대적으로 커서, 근속의 비율이 남성에 비해 상대적으로 낮으며, 이 자체가 임금격차를 크게 벌리는 중요한 구조적 요인입니다.
2018년 KLIPS 데이터를 바탕으로 한 연구에서 구조 조정 후에도 임금 격차가 남아 있긴 하지만 전체 격차의 상당 부분은 직무/근속/형태 차이로 설명된다는 결과가 이를 반증하며 여러 자료를 통해 확인하면 동일노동 조건 하에서 실제로 성별의 차이에 의해 발생하는 임금의 격차는 대략 10~15% 정도 나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따라서 여전히 성별 임금격차는 존재하지만 OECD의 29%의 격차를 곧바로 "여성에 대한 29% 임금차별의 직접 증거"라고 주장하는 것은 맞지 않으며, 반대로 "완전히 조작된 숫자라며 애초에 차별 따윈 없었다"라고 치부해서도 안 됩니다.
같은 회사 안과 노동시장 전체를 구분해서 보기
많은 대기업과 공기업은 임금표를 운영하기 때문에, 동일한 회사에서 같은 직급·같은 연차로 입사한 남녀 신입사원의 기본급은 제도상 동일하게 책정되는 경우가 일반적입니다. 청년 남성들이 군 복무로 인한 사회 진입 지연을 '역차별'로 느끼는 현실 역시 존재합니다.
그러나 노동시장 전체를 보면 이야기가 달라집니다. 성별 임금격차의 상당 부분은 앞서 OECD 바로 이 "어디에서, 어떤 방식으로 일하고 있는가"의 차이에서 비롯됩니다.
'위험·고강도 직종'과 '경력단절'의 구조
먼저, 고위험·고강도·장시간 노동이 요구되는 일부 직종에는 남성 비중이 매우 높습니다. 건설 현장, 조선소 생산라인, 물류·운송 같은 일자리에는 남성이 압도적으로 많고, 이들 직종은 잔특근 및 위험수당 등으로 인해 평균 임금이 상대적으로 높습니다. 이런 현실에서 20대 남성 일부는 "나는 더 위험하고 힘든 일을 해서 더 벌뿐인데, 왜 그걸 차별이라고 하느냐"는 억울함을 느끼게 됩니다.
동시에, 한국 여성의 고용률과 임금은 생애주기 상 출산·육아 시기인 30대 중반 전후에 크게 떨어졌다가 다시 일부 회복하는, 이른바 'M자형(M-커브)' 패턴을 보입니다. 이 시기에 많은 여성이 경력단절을 경험하고, 교육과정의 부재로 이후 재취업 시 상대적으로 낮은 임금과 고용이 불안정한 단순반복업무 위주의 일자리로 이어가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런 구조에서 20~30대 여성들은 "출산과 양육 때문에 커리어가 끊기고, 돌아오면 질 낮은 일자리밖에 남지 않는 구조 자체가 불공정하다"는 분노를 느끼게 됩니다.
반론: 같은 문화권인 일본보다 우리가 차별이 심하다
많은 분들이 그래프를 보며 우리가 일본보다 훨씬 차이가 심하므로 차별은 여전히 심각하다고 하실 수 있습니다. 차별이 없지 않습니다. 그러나 여기에도 구조적 이유가 존재합니다. 차분히 뜯어보겠습니다.
일본은 여성 전체의 고용률은 낮지만 사무, 행정, 중간관리직에 여성이 많이 분포합니다. 또한 일자리 증가로 정규직 여성의 비율이 꾸준히 증가하고 있습니다. 반면 한국의 여성 고용률은 OECD 평균 수준인데 반해 저임금 서비스업이나 비정규직의 비중이 압도적입니다. 특히 제조 및 IT, R&D 직군의 진입률이 매우 낮습니다. 즉 일본은 적게 일하지만 중간값이 덜 깎이는 반면, 한국은 많이 일하지만 하위 분포에 몰립니다.
또 다른 이유들이 있습니다. 그것은 경력 단절의 형태가 완전히 다르다는 것입니다.
일본은 출산 후 아예 노동시장을 떠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로 인해 통계상 임금 산출 대상에서 완전히 제외됩니다. 반면 한국은 출산 후 저임금/시간제/비정규직으로 재진입하는 경우가 많아 통계에 인식되며 이는 중윗값을 강하게 끌어내립니다.
비유하자면 일본은 시험을 포기한 사람이 많아 평균 점수 계산에서 빠지는데 한국은 모두 시험을 보긴 하는데 저조한 점수가 많은 것입니다.
마지막 이유로는 서로 다른 임금구조가 있습니다.
한국이 기본급 비중이 낮고 초과근무나 성과급의 비중이 큰 반면, 일본은 연공급과 기본급 비중이 한국보다 커서 성과급과 초과근무가 임금 격차를 벌리는 정도가 크지 않습니다. 이로 인해 한국에서는 같은 직급에서도 실수령 임금 격차가 더 크게 벌어질 수 있는 반면 일본은 그 차이가 한국만큼 크지 않습니다.
서로 다른 현실을 동시에 인식하기
결론적으로 한국의 성별 임금격차는 실제로는 OECD 수치만큼 크게 차이 나지는 않으며 이를 '성별차별'이라는 단일 원인으로 설명하기에는 무리가 있습니다. 그러나 분명히 존재하는, 비동시성의 동시성이 존재하는 현실이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20대 남성이 느끼는 역차별은 정말 허구인가?
여기서 한 가지 질문을 더 던져야 합니다. 구조적 성차별이 존재한다는 사실이, 20대 남성들이 느끼는 역차별의 감정을 허구로 만들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두 현실은 공존할 수 있습니다.
군가산점 폐지 이후 20년이 넘도록, 청년 남성의 군 복무에 대한 실질적 보상 체계는 마련되지 않았습니다. 2년에 가까운 시간을 국가에 바치고 사회에 복귀했을 때, 동기들은 이미 한 발 앞서 있습니다. 이 간극을 메워줄 제도적 장치가 부재한 상황에서 "역차별"이라는 감정이 생기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또한 성범죄 관련 법 집행에서 성별에 따른 형량 차이가 존재한다는 연구 결과도 있습니다. 2021년 한국형사정책연구원의 분석에 따르면, 유사한 범죄 유형에서 남성 피고인의 평균 형량이 여성 피고인보다 높게 나타나는 경향이 확인되었습니다. 물론 이것이 곧바로 "남성 차별"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범죄의 맥락, 피해 정도, 전과 유무 등 다양한 변수가 작용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통계가 20대 남성들에게 "법 앞의 평등이 지켜지지 않는다"는 인식을 심어주는 것 또한 사실입니다.
핵심은 이것입니다. 20대 여성이 경험하는 구조적 차별과 20대 남성이 느끼는 역차별은 서로를 부정하지 않습니다. 둘 다 이 사회가 해결해야 할 과제입니다. 한쪽의 고통을 인정하기 위해 다른 쪽의 고통을 부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문제는 정치가 이 두 고통을 "너 아니면 나"의 제로섬 게임으로 프레이밍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문제는 이 서로 다른 현실이 통계의 해석 없이 프레임으로만 소비되면서, 청년 남녀가 상대의 서사를 '과장된 피해의식'으로 폄훼하고 서로를 비난하는 데 에너지를 쓰게 된다는 점입니다. 필요한 것은 상대의 말과 경험을 지우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하면 위험·고강도 노동에 대한 보상은 보전하면서, 동시에 경력단절과 저임금 구조를 완화할 제도를 설계할 것인가"를 함께 논의해야 하는데, 정작 우리는 '젊음'이라는 미래 자원의 낭비를 방치하고 있습니다.
젊은이들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지 않고서 나라의 미래는 없습니다. 누가 이들을 벼랑 끝으로 내몰고 있을까요? 자기 것만 지키기 바빴던 우리 기성세대들에게 책임이 있습니다. 특히 N86세대는 뼈아픈 반성을 해야 합니다.
투자의 귀재 워런 버핏은 자신의 막대한 부가 온전히 자신의 능력 때문이 아니라, 나라와 시대를 잘 타고난 '난소 복권(Ovarian Lottery)' 덕분이라고 겸허히 말합니다. 한국의 기성세대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이 누린 부동산 폭등과 고도성장의 과실은 개인의 노력을 넘어선 시대적 행운의 덕도 컸습니다. 하지만 기성세대는 그 행운을 오로지 자신의 실력으로 착각하고, 더 많은 것을 얻기 위해 미래 세대를 위한 사다리를 걷어찼습니다.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 조셉 스티글리츠는 그의 저서 <불평등의 대가>에서 "지대 추구(Rent-seeking)가 만연한 사회, 즉 일하는 사람보다 땅을 가진 사람이 더 버는 사회는 혁신이 멈추고 결국 몰락한다"라고 경고했습니다.
숫자로 보는 끊어진 사다리: 세대 간 내 집 마련의 격차
기성세대가 정말 '운이 좋았는지' 숫자로 확인해 봅시다. 아래 표는 각 시대별 서울 아파트 평균 매매가격과 평균 연봉, 그리고 내 집 마련에 필요한 연수(PIR)를 비교한 것입니다.
1990년, 지금의 50대 후반~60대가 사회에 진입할 때 서울 아파트는 연봉의 6.7배였습니다. 7년만 모으면 집을 살 수 있었습니다. 물론 그때도 쉽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가능한 꿈'이었습니다.
2024년, 지금의 20대가 마주한 현실은 연봉의 25배입니다. 한 푼도 쓰지 않고 25년을 모아야 합니다. 실제로는 생활비, 세금, 그 사이 오르는 집값을 고려하면 평생을 모아도 불가능에 가깝습니다. 같은 서울인데, 같은 노력인데, 결과는 완전히 다릅니다.
더 충격적인 것은 이 격차가 '자연스러운 시장 현상'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기성세대는 부동산 규제 완화의 수혜를 받았고, 저금리 시대의 자산 가격 상승을 만끽했으며, 정작 자신들의 자산 가치를 지키기 위해 공급 확대에 반대하고 각종 규제를 지지했습니다.
멈춰버린 생각과 끊어진 사다리: 라떼는 말이야
기성세대는 말합니다. "라떼는 말이야, 단칸방에서 시작했어!" 맞습니다. 물리적으로는 더 가난했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그때는 열심히 일하면 내 집을 마련하고, 자식을 대학 보내고, 내일은 오늘보다 나을 것이라는 '꿈'이 있었습니다. 지금의 청년들에게는 그 '꿈'이 없습니다. 사다리가 끊어졌기 때문입니다. 이건 마치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간 사람이 건물 최상층에 도착하자마자 엘리베이터의 전기를 끊어버리고는 1층에 있는 사람에게 "나는 걸어 올라왔어!"라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더구나 그 건물의 최상층은 계속 높아지고 있는데도 말입니다.
기성세대가 해야 할 일은 훈계가 아닙니다. 기득권을 내려놓는 용기입니다. 더 내고 덜 받는 연금 개혁에 앞장서야 합니다. 부동산 가격의 하향 안정화를 받아들여야 합니다. 내 자산 가치가 떨어지더라도, 내 자식이 집을 살 수 있는 세상을 만들어야 합니다. 또한 노동 유연성을 받아들이고 청년들에게 정규직의 문을 열어줘야 합니다. 과감히 도전하는 것이 두렵지 않도록 나라에서 연착륙이 가능하도록 정책을 설계해야 합니다.
물론 이는 재산권을 일부 포기해야 하는 엄중한 결단이며, 민주주의 사회에서 사유재산의 권리를 침해할 수 있기에 사회적 합의를 도달하기란 대단히 어렵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화를 시작해야 합니다. 기성세대가 붙잡고 있는 끈을 놓지 않는 만큼 그 끈이 나중에 우리 아이들의 목을 더 강하게 조를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모든 갈등과 분노가 누군가에게는 '거대한 비즈니스'입니다. 분노와 혐오가 돈이 되는 시대, 누군가는 우리의 갈등을 보며 샴페인을 터뜨립니다.
분노가 돈이 되는 알고리즘의 비밀
왜 분노 콘텐츠가 돈이 될까요? 이것을 이해하려면 유튜브의 수익 구조를 알아야 합니다.
유튜브 크리에이터의 광고 수익은 '워치타임(Watch Time)', 즉 시청 시간에 비례합니다. 10분짜리 영상을 끝까지 보게 만드는 것이 5분짜리 영상 두 개를 보게 하는 것보다 수익성이 높습니다. 알고리즘은 '시청 지속률'이 높은 영상을 더 많이 추천합니다.
그런데 어떤 콘텐츠가 시청 지속률이 높을까요? 바로 '감정을 자극하는 콘텐츠'입니다. 특히 분노, 공포, 경멸 같은 부정적 감정은 긍정적 감정보다 훨씬 강력한 '몰입'을 유발합니다. 화가 나면 끝까지 봅니다. "저 인간이 뭐라고 했어?" 확인하고 싶어서 영상을 끝까지 봅니다. 그리고 댓글을 달고, 공유합니다. 알고리즘은 이 행동을 '좋은 신호'로 인식하고 더 많은 사람에게 추천합니다.
결과적으로 이런 인센티브 구조가 형성됩니다. 자극적일수록 시청 시간이 늘어나고, 시청 시간이 늘수록 광고 수익이 증가하며, 수익이 증가할수록 더 자극적인 콘텐츠를 만들게 됩니다. 이것이 분노의 무한 루프, 혐오의 비즈니스 모델입니다.
여기에 '슈퍼챗'이라는 직접 후원 시스템이 더해집니다. 시청자가 실시간 방송 중 돈을 내면 자신의 메시지가 화면에 뜹니다. 크리에이터가 "저 정당은 매국노입니다!"라고 외치면, 동조하는 시청자들이 "맞습니다! 힘내세요!"라며 돈을 던집니다. 더 과격하게 말할수록, 더 많은 돈이 들어옵니다. 마치 로마 콜로세움에서 검투사가 피를 흘릴수록 관중이 열광하던 것처럼, 정치 유튜브에서는 상대 진영을 더 잔인하게 공격할수록 지갑이 열립니다.
슈퍼챗이 지배하는 세상: 확증편향의 증폭 장치
2025년 <로이터 저널리즘 연구소 디지털 뉴스 리포트 2025>를 보면 20대의 44%가 유튜브를 주요 뉴스 소스로 사용합니다. 이는 50대(61%), 60대 이상(53%)에 비해 낮은 수치로써, 20대 절반 이상은 유튜브에서 뉴스를 보지 않고 예능, 드라마 등 비정치 콘텐츠를 소비하는 것에서 그들이 '이념적 보수'가 아닌 '기능적 보수'일 가능성이 높음을 시사합니다.
보수 성향 이용자의 63%와, 진보 성향 이용자의 43%가 유튜브를 통해 뉴스를 소비한다는 데이터도 있는데, 20대 전체의 뉴스 이용률(44%)과 통상적인 보수 성향 비율 및 유튜브 내 보수 우위 경향(약 60%)을 대입하여 계산해 보면 대략적으로 20대의 보수 채널 시청 비율은 대략적으로 약 20% 중반 정도로 예상되며, 이들은 개혁 보수 성향의 채널이나 '뻑가' 같은 반페미니즘 성향의 시사 렉카 채널을 소비하는 경향이 높을 것이라고 예상됩니다.
채널들 중에는 건전한 비판과 정책을 제안하는 건강한 채널도 있으나 증오와 조롱을 주된 내용으로 다루는 채널이 대단히 많습니다. 혐오가 돈이 되기 때문입니다. 정치적 양극화가 심해질수록, 분노를 파는 미디어의 수익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납니다. 마치 화재가 날수록 소방기구 장사가 잘되는 것처럼 말입니다. 이는 보수, 진보를 가리지 않습니다.
가로세로연구소는 2020년부터 단 1년 동안 21억 원 이상의 슈퍼챗 수익을 기록하였으며 월간으로도 2021년 8월부터 10월까지 약 15억 8천만 원의 기록적인 수익을 올린 바 있습니다. 2022년 강용석의 경기도지사 선거 후원금 모금 때는 12시간 만에 20억 원을 모으기도 했습니다. 진보채널의 대표인 김어준의 겸손은 힘들다 뉴스공장은 2023년 개국 효과로 하루 만에 1억 원에 육박하는 슈퍼챗 수익을 기록했습니다.
이는 팬덤과 적개심이 어떻게 돈으로 환산되는지 잘 보여주는 사례입니다.
저변에서는 진보 채널이 다소 앞서고 있으나, 위기 시 폭발적인 화력과 1인당 후원 금액은 보수 채널이 조금 더 많은 것으로 파악됩니다. 그런데 보수 성향 유튜브 채널은 진보 성향 채널보다 평균 조회수가 3배 이상 높고, 댓글 참여도는 5배 이상 높습니다. "가로세로연구소", "신의한수", "고성국 TV", "배승희 변호사" 등 보수 성향 채널들은 구독자와 조회수에서 압도적인 우위를 보입니다.
알고리즘과 결탁한 분노
현재 20대 남성의 보수 성향 채널 시청률은 현재의 50,60대에 비해서는 높지 않을 것으로 예상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그들보다 열렬한 지지자가 될 가능성이 있습니다. 알고리즘이 체계적으로 사용자를 더 극단적인 콘텐츠로 유도하며 뇌를 변화시키기 때문입니다.
특정 성향의 정치 뉴스를 한 번 보면, 반대파를 더 강경하게 공격하고 자극적인 말로 비하하는 콘텐츠를 수없이 추천합니다. 역시 보수, 진보를 가리지 않습니다. 그리고 빠져나오기 힘듭니다. 20대 남성들에 대입하여 생각해 보면 그들은 점점 더 폐쇄적인 환경 속에서 더 자극적인 것을 찾게 될 것입니다. 마치 매운 음식을 먹다 보면 점점 더 매운 걸 찾게 되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하지만 결국 입은 타들어가고 위는 망가집니다.
분노를 파는 이들은 잘 알고 있습니다. "합리적인 대화"는 조회수가 나오지 않지만, "상대방에 대한 혐오와 조롱"은 돈이 된다는 것을. 양쪽 진영의 스피커들은 확증편향에 빠진 시청자들에게 그들이 듣고 싶어 하는 자극적인 말만 골라해 주고, 그 대가로 막대한 부와 영향력을 얻습니다.
우리가 서로를 미워하며 싸우는 동안, 정작 웃고 있는 것은 우리의 분노를 연료 삼아 계좌를 불리는 '혐오 비즈니스 사업가'들입니다. 싸우는 사람들은 자신들이 나라를 구한다고 생각하겠지만 사실은 '호구'일뿐입니다.
하지만 절망하지 않도록 합시다. 우리에게는 길이 있습니다. 지금부터 소개할 여러 해법은 저도 가보지 않은 길입니다. 모두 함께 읽으며 뷔페에서 음식을 고르듯, 자신에게 맞는 방식에 대해서 생각해 보면 좋겠습니다.
Part 4는 세 단계로 구성됩니다.
첫째, 개인이 당장 실천할 수 있는 것들.
둘째, 대화에서 활용할 수 있는 기술들.
셋째, 사회와 제도 차원에서 증명된 희망의 사례들입니다.
우리는 어떻게 이 지옥도에서 벗어나 생각을 되찾을 수 있을까요? 한나 아렌트는 <정신의 삶(The Life of the Mind)>에서 인간의 정신 활동을 다음과 같이 세 가지로 구분했습니다.
사고(Thinking), 의지(Willing), 판단(Judging).
사고: 자기 자신과의 대화
아렌트에게 "생각한다"는 것은 자기 자신과 대화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소크라테스의 전통을 따라, 그녀는 사고를 내적 대화로 이해했습니다. 왜 이것이 중요할까요? 내가 나 자신과 대화할 때, 나는 일관성을 유지해야 합니다. 만약 내가 타인에게 가혹한 일을 하면서도 나 자신에게는 "나는 좋은 사람이다"라고 말한다면(내로남불), 결국 이 모순을 견딜 수 없게 됩니다.
아이히만은 바로 이 내적 대화를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자신이 하는 일의 의미를 숙고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단지 명령을 따랐고, 진부한 말만 반복했습니다. 정치적 극성화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상대 진영에 대해 혐오 발언을 할 때, 우리는 스스로에게 묻지 않습니다. "이것이 정말 옳은가? 나는 이런 말을 하는 사람이 되고 싶은가?"
의지: 새로운 시작의 능력
두 번째는 의지입니다. 아렌트는 인간이 "새로운 시작을 만들 수 있는 능력"을 가진다고 믿었습니다. 과거에 얽매이지 않고, 새로운 가능성을 창조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지금까지 증오와 분노의 패턴에 갇혀 있었다 하더라도, 우리는 지금 이 순간 다르게 선택할 수 있습니다.
판단: 확대된 사고방식
세 번째는 판단입니다. 아렌트는 칸트의 <판단력 비판>에 영감을 받아, "확대된 사고방식(Enlarged Mentality)"이라는 개념을 발전시켰습니다. 확대된 사고방식이란 무엇일까요? 그것은 타인의 관점에서 생각할 수 있는 능력입니다. 아이히만에게 결여된 것이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그는 유대인의 관점에서 생각할 수 없었습니다.
정치적 극성화에서도 우리는 확대된 사고방식을 잃어버렸습니다. 보수는 진보의 관점에서, 진보는 보수의 관점에서 생각하지 못합니다. 20대 남성은 20대 여성의 관점에서, 20대 여성은 20대 남성의 관점에서 생각하지 못하며, 기성세대는 젊은 세대의 입장에서 생각할 줄 모릅니다.
아렌트가 제시한 해법은 '확대'입니다. 우리의 사고와 관점과 공감을 확대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것은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질문을 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됩니다.
첫째, 사고의 질문: "나는 정말로 이것을 믿는가, 아니면 남들이 그렇게 말하기 때문에 따라 하는 것인가?"
둘째, 의지의 질문: "나는 지금 이 순간, 다르게 행동할 수 있는가?"
셋째, 판단의 질문: "상대방의 입장에서 보면 이 상황은 어떻게 보일까?"
이런 생각이 들 수 있습니다. "이미 편향된 뇌를 어떻게 바꿀 수 있을까?", "사람은 쉽게 바뀌지 않는다고 하던데?" 다행히도, 신경과학은 바뀔 수 있다는 희망적인 답을 줍니다. 정치적 극성화는 개인 심리, 사회 제도, 디지털 환경이 복합적으로 작용하는 문제로, 과학적으로 검증된 다층적 개입이 필요하다고 합니다.
신경가소성과 정서 조절 (HRV & 명상)
하버드 의대의 Sara Lazar 연구팀은 8주간의 마음챙김 명상(MBSR)만으로도 뇌의 구조가 변함을 증명했습니다. 명상 그룹의 해마(학습과 기억) 밀도가 증가되었으며 공포와 스트레스를 유발하는 편도체의 밀도가 감소했고 공감능력을 관장하는 측두두정 접합부의 회백질은 증가했습니다. 또한, 심박변이도(HRV) 바이오피드백 연구는 '느린 호흡(분당 5~6회)'이 전두엽 피질과 정서 조절 영역의 연결성을 강화한다고 밝혀냈습니다. 이는 명상과 이어지며 매일 20분의 연습만으로도 정치적 대화에서 평정심을 유지할 수 있습니다.
소셜미디어 디톡스
2025년 11월 JAMA Network Open 연구는 주목할만한 결과를 내놓았습니다. 단 1주일간의 소셜미디어 디톡스만으로도 불안이 16%, 우울이 24% 감소했습니다. 이는 8~12주의 집중 심리치료와 맞먹는 효과입니다. 분노를 파는 미디어로부터 잠시 로그아웃하는 것, 그것이 정신 건강을 지키는 첫걸음입니다. 간헐적 단식이 우리 몸에 도움이 되듯이, SNS도 잠시 끊어야 할 때가 있습니다.
인지행동치료(CBT)를 정치적 사고에 적용하기
2025년 Communications Psychology 저널에 따르면, 정치적 극성화에서 나타나는 사고 패턴은 인지 왜곡(라벨링, 흑백논리 등)과 "놀라운 유사성"을 보입니다. CBT 기반 훈련은 확증편향을 29%나 감소시킵니다. 정치적 분노가 치밀 때 잠깐 멈추고 다음을 생각하십시오.
"내가 지금 저 사람을 악마화(라벨링)하고 있는가?"
"이 사건을 지나치게 부풀리고(파국화) 있는가?"
이는 스스로 질문하고 대안적인 해석을 찾아보는 훈련입니다.
SIFT: 미디어 리터러시의 4단계
정보의 홍수 속에서 팩트를 검증하는 간단한 4단계(SIFT)도 있습니다.
Stop(멈춤): 공유하기 전 감정을 가라앉힙니다.
Investigate(조사): 출처가 어디인지 확인합니다.
Find(찾기): 더 신뢰할 수 있는 다른 매체의 보도를 찾아봅니다.
Trace(추적): 원본 자료를 찾아 맥락을 확인합니다.
한 가지 소박하지만 강력한 방법은 제가 예전에 썼던 글인 '확신의 함정, 우리 안의 괴물'에서 소개한 우리의 '말'에서부터 시작하는 것입니다. '결코', '절대'라는 말을 되도록 쓰지 않고, '반드시 그렇다'는 확정적인 단언 대신 "저의 생각은 이러한데, 당신의 생각은 어떠신가요?"라고 부드럽게 묻는 것입니다.
노스웨스턴 대학의 연구에 따르면,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는 사고 자체를 형성합니다(사피어-워프 가설). 확정적인 언어를 사용할 때 뇌는 사고를 굳히지만, 열린 언어를 사용할 때 뇌는 유연하게 작동합니다. 옛말에 '말이 사람을 만든다'라고 했습니다. 사려 깊은 말은 사용자의 인격마저 더욱 성숙하고 고급스럽게 만들어 줄 것입니다.
Marshall Rosenberg가 개발한 비폭력 대화(NVC)는 전 세계 분쟁 지역에서 검증되었습니다. 르완다 내전,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분쟁 등에서 NVC는 극단적 적대를 치유하는 데 사용되었습니다.
NVC의 4단계:
첫째, 관찰(Observation): 평가 없이 보기
나쁜 예: "너는 항상 내 말을 무시해"
좋은 예: "내가 말할 때 네가 핸드폰을 봤어"
둘째, 느낌(Feeling): 감정 표현하기
나쁜 예: "너 때문에 기분 나빠"
좋은 예: "나는 무시당한다고 느꼈어"
셋째, 욕구(Need): 충족되지 않은 욕구 인식하기
나쁜 예: "네가 나를 존중해야 해"
좋은 예: "나는 존중받고 싶어"
넷째, 요청(Request): 구체적이고 실행 가능한 요청하기
나쁜 예: "좀 더 신경 써"
좋은 예: "내가 말할 때 눈을 봐줄 수 있어?"
이를 정치적 대화에 적용하면 다음과 같을 것입니다.
전통적 방식: "네 정당은 경제를 망치고 있어!" (공격)
NVC 방식: "그렇구나. 최근 경제 정책 뉴스를 봤을 때(관찰), 나도 의문이 들었어(느낌). 우리의 미래는 정말 중요하잖아(욕구). 이 정책이 어떻게 작동할지 당신의 관점을 들어볼 수 있을까(요청)?"
차이가 보이시나요? 전자는 방어를 유발합니다. 후자는 대화를 엽니다.
딥 캔버싱 (Deep Canvassing)
2016년 스탠퍼드와 UC 버클리 연구팀은 트랜스젠더 권리에 반대하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이 기법을 적용했습니다. 결과는 고무적이었습니다. 단 한 번의 10분짜리 대화가 사람들의 태도를 장기적으로 변화시켰습니다.
핵심은 논쟁이 아니라 '경험의 공유'입니다. "당신의 생각은 틀렸습니다"라고 공격하는 대신, "저도 비슷한 두려움을 느낀 적이 있습니다"라며 취약성을 드러내고 공통점을 찾을 때 마음이 열립니다. 마치 단단한 호두껍질도 부드럽게 두드리면 결국 열리는 것처럼 말입니다.
동기강화면담 (Motivational Interviewing)
상대를 설득하려 하지 말고 다음 원칙에 따라 대화를 이어가야 합니다.
OARS 원칙:
개방형 질문(Open-ended)
긍정(Affirmations)
반영적 경청(Reflective listening)
요약(Summaries)
"왜 그렇게 생각하나요?"보다 "이 정책에서 가장 걱정되는 점은 무엇인가요?"라고 묻는 것이 훨씬 효과적입니다.
Street Epistemology(거리 인식론)는 신념의 내용이 아니라 인식론적 방법에 초점을 맞춥니다.
핵심 질문들의 예시는 다음과 같습니다.
"당신이 X를 믿는 주된 이유는 무엇인가요?"
"그것이 사실이라는 것을 어떻게 알게 되었나요?"
"이 방법이 신뢰할 만하다고 생각하는 이유는 무엇인가요?"
"무엇이 당신의 생각을 바꿀 수 있을까요?"
이 대화는 상대를 공격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상대는 자신의 신념 형성 과정을 처음으로 의식적으로 검토하게 됩니다. 만약 어떤 증거로도 마음을 바꿀 수 없다면, 그것은 신념이 아니라 '교리(Dogma)'입니다.
그렇다면 생각과 대화를 재개하기 위해 현실 세계에서 우리는 어떤 원칙을 세워야 할까요? 무조건 참아야 할까요? 그럴 수는 없겠지요. 여기서 게임이론이 힌트를 줍니다. '죄수의 딜레마 토너먼트'에서 우승한 전략은 가장 단순한 '팃포탯(Tit-for-Tat, 눈에는 눈)'이었습니다.
이 전략은 다음과 같은 4가지 핵심 원칙을 따릅니다.
첫째, Nice (신사적): 절대 먼저 배신하지 않습니다. (협력으로 시작)
둘째, Retaliating (보복): 상대가 배신하면 즉시 응징합니다. (호구가 되지 않음)
셋째, Forgiving (용서): 상대가 다시 협력하면 즉시 용서하고 협력합니다. (원한을 품지 않음)
넷째, Clear (명확성): 전략이 단순하여 상대가 내 의도를 쉽게 파악하게 합니다.
정치적 극성화 시대에서는 오히려 먼저 공격하지 않고(Nice), 부당한 공격에는 단호히 맞서되(Retaliating), 상대가 손을 내밀면 즉시 잡는(Forgiving) 태도야말로, 장기적으로 생존하고 승리하는 가장 과학적인 전략입니다. 이건 마치 권투에서 상대가 시합 전에 신사적으로 글러브를 터치하려 하면 응하지만, 먼저 때리면 반격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찍'들이나 '개딸'들은 그냥 다 사라져 버렸으면 좋겠다는 저주가 인터넷 커뮤니티에 넘쳐납니다. 과연 이 간극은 결코 메꿔질 수 없는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분명 희망은 있습니다. 세계 각국은 이미 제도적 실험을 통해 극복의 가능성을 증명하고 있습니다.
남아프리카공화국, 우분투(Ubuntu)의 기적
남아공의 진실화해위원회(TRC)는 '눈에는 눈' 식의 처벌이 아닌 회복적 정의를 택했습니다. 데즈먼드 투투 대주교가 주창한 '우분투(Ubuntu, "우리가 있기에 내가 있다")' 철학을 바탕으로, 가해자가 정치적 동기의 범죄를 완전히 고백하면 사면해 주는 방식을 택했습니다. 피해자들은 진실을 알 권리를 보장받았고, 사회는 피비린내 나는 복수의 악순환을 끊어냈습니다.
르완다, 잿더미에서 피어난 아프리카의 별
1994년, 르완다에서는 단 100일 만에 80만 명에서 100만 명이 학살당하는 인류 최악의 비극인 제노사이드가 발생했습니다. 이웃이 이웃을 죽인 이 참혹한 땅에서, 그들은 '가차차(Gacaca)'라는 전통적 공동체 재판을 통해 190만 건의 사건을 처리했습니다. 시민들이 직접 참여해 진실을 규명하고 화해를 도모했습니다. 그 결과, 비극의 땅이었던 르완다는 현재 아프리카에서 가장 안전하고 깨끗하며, 가장 빠르게 경제가 성장하는 나라 중 하나가 되었습니다. 르완다도 화해하고 서로의 손을 맞잡았는데 우리가 못 할 리 없습니다.
콜롬비아 평화협정
50년 넘게 이어진 내전 끝에 체결된 콜롬비아 평화협정 역시 처벌보다 진실 규명과 배상에 초점을 맞춘 '평화를 위한 특별관할권(JEP)'을 도입했습니다.
아일랜드와 대만의 숙의 민주주의
아일랜드 시민의회는 무작위로 선발된 시민들의 숙의를 통해 낙태와 동성혼이라는 극단적 갈등 이슈를 국민투표 통과로 이끌어냈습니다. 대만은 'vTaiwan'과 'Pol.is' 플랫폼을 통해 디지털 공간에서도 '트롤링'을 막고 합의를 도출할 수 있음을 보여주었습니다. 이는 "합의의 게임화"라 불리며 80% 이상의 사안이 실제 정부 조치로 이어졌습니다.
다행히도 교육과 디지털 세상에서도 이런 극단의 위험성을 인지하고 개선하기 위한 노력이 느리지만 조금씩 시작되고 있습니다.
브리징 알고리즘(Bridging Algorithms): 알고리즘의 재설계
디지털 환경도 변하고 있습니다. 브리징 알고리즘(Bridging Algorithms)이 그 예입니다. 트위터(X)의 '커뮤니티 노트(Community Notes)'는 좌우 양측 사용자 모두가 "도움 됨"이라고 평가할 때만 팩트체크 노트를 노출합니다. 최신 연구(Science, 2025)에 따르면, 뉴스피드에서 적대적 콘텐츠의 순위를 낮추는 것만으로도 상대 정당에 대한 혐오가 줄어들었습니다.
미디어 리터러시 교육: 근본적인 해법
교육은 가장 근본적인 해법입니다. 미국의 iCivics는 게임을 통해 학생들에게 민주주의 원리를 가르치고 비판적 사고를 기릅니다. 핀란드는 유아기부터 미디어 리터러시를 가르쳐 세계 1위의 미디어 문해력을 자랑합니다. 어릴 때부터 가짜 뉴스를 구별하고, 통계 왜곡을 파악하는 법을 배우는 것이 민주 시민의 기본 소양이 되어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 엘리너 오스트롬의 통찰을 살펴보겠습니다. 그녀는 "공유지의 비극"을 연구했습니다. 모두의 것이기에 누구도 책임지지 않아 결국 망가지는 공동 자원의 문제 말입니다.
기존 경제학은 정부 통제나 사유화만 제시했지만, 오스트롬은 '집단적 자치 관리'라는 제3의 길을 발견했습니다. 스위스 알프스 목초지, 일본 어촌의 어장 등에서 성공적으로 자원을 관리해 온 비결은 공동체 구성원들이 스스로 규칙을 만들고, 서로를 감시하고, 위반자에게 단계적 제재를 가하는 시스템이었습니다.
이것을 정치적 담론이라는 "공동자원"의 관리에 적용할 수 있을까요? 인터넷 커뮤니티들을 보면 오스트롬의 원칙이 지켜지지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특히 '일베' 같은 사이트는 상호감시가 없는 구조 속에서 왜곡과 공격적 콘텐츠만을 공급하다가 스스로 고립되어 붕괴했습니다.
하지만 오스트롬은 인간은 이기적이기만 한 존재가 아니라, '적절한 조건만 갖춰지면' 협력할 수 있는 존재임을 증명했습니다. 우리 사회의 무너진 신뢰 자본도 이처럼 '우리 스스로 만든 규칙'과 '서로를 지키려는 노력'을 통해 복원될 수 있습니다.
Part 4에서 다룬 수많은 해법 중, 오늘 당장 실천할 수 있는 세 가지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작은 실천이 모여 뇌의 회로를 바꾸고, 바뀐 뇌가 말을 바꾸고, 바뀐 말이 관계를 바꿉니다. 거창한 결심보다 오늘 하나의 실천이 내일의 나를 만듭니다.
이제 투자자의 관점에서 정치적 극성화를 살펴보겠습니다. 투자자에게 정치적 편향은 단순히 도덕적 문제가 아닙니다. 그것은 재무적 문제입니다. 투표를 잘못하면 5년을 고생하지만, 투자를 잘못하면 평생을 고생합니다.
시카고 대학의 연구에 따르면, 정치적으로 강한 편향을 가진 투자자는 중립적인 투자자보다 연평균 2-5% 낮은 수익률을 기록했습니다. 왜일까요? "우리 편이 집권했으니 경제가 좋아질 거야"라는 근거 없는 낙관이나, "저들이 집권했으니 나라가 망할 거야"라는 과도한 비관 때문에 이성적인 판단을 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또한 확증편향에 빠져 자신의 정치 성향에 맞는 뉴스만 소비하다 보면 시장의 중요한 시그널을 놓치게 됩니다.
투자의 현인 워런 버핏은 개인적으로 민주당을 지지하고 증세를 주장합니다. 하지만 버크셔 해서웨이의 투자 결정에서는 철저히 정치적 중립을 지킵니다. 공화당 정부든 민주당 정부든 가치 있는 기업을 삽니다. 오마하의 현인에게는 김치찌개든 된장찌개든 맛있으면 그만입니다.
그의 파트너 찰리 멍거는 1996년 스탠퍼드 로스쿨 강연에서 더욱 직설적으로 다음과 같이 경고했습니다.
"강력한 정치적 사상을 받아들여 표현하고 다니면 두뇌가 매우 나쁜 형태로 굳어버리고, 그러면 인식이 전반적으로 왜곡됩니다."
워런 버핏의 아버지 하워드 버핏은 공화당 소속으로, 연방하원의원으로 4선을 역임한 우파 정치인이었습니다. 버핏은 아버지를 무척 좋아했지만, 아버지가 우파 정치인들끼리만 교류하고 넓은 인간관계를 갖지 못하는 모습을 보며 어려서부터 사상이 위험하다고 판단했고, 평생 정치적 사상을 멀리함으로써 정확한 인식을 유지했습니다. 지금도 버핏은 정치적 발언을 최대한 자제합니다. 2025년 버크셔 해서웨이 주주총회에서도 트럼프 대통령의 관세 정책에 대한 질문을 받았지만, 트럼프의 이름조차 직접 거론하지 않았습니다.
멍거는 이렇게도 덧붙였습니다.
"정확성, 근면, 객관성을 지지하는 사상이라면 수용해도 좋지만, 최저 임금 인상이나 인하가 '절대적으로 옳다'라고 확신하게 만드는 사상을 수용하면 바보가 됩니다. 세상은 매우 복잡한 시스템인데, 강력한 사상의 영향으로 그런 주제에 대해 철저하게 확신하면 그 사람의 사고능력은 엉망이 됩니다."
그리고 다음과 같이 마무리했습니다.
"만약 당신이 정치적 신념 때문에 좋은 투자를 거부한다면, 당신은 바보입니다."
월 스트리트를 제패했던 수많은 거물들, 그들은 '미래를 꿰뚫어 보는 눈'을 가졌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사실은 정반대입니다. 전설적인 트레이더들의 승률이 40%에도 미치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조지 소로스는 "내가 부자인 이유는 내가 틀렸을 때를 알고 있기 때문"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들이 거대한 부를 일군 비결은 '반드시'라는 확신을 자신들의 사전에서 삭제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언제나 자신의 생각이 틀릴 수 있음을 인정했습니다. 예측이 틀렸을 때 자존심을 세우며 시장과 싸우는 대신, 즉시 패배를 인정하고 손실을 확정 지었습니다. 이것이 투자자에게 반드시 필요한 '생각의 유연성(Mental Flexibility)'입니다.
정치에서의 확신과 낮은 승률은 그저 투표 때마다 기분 나쁜 패배감이나 나라 걱정 정도로 끝나겠지만, 투자에서의 확신은 돌이킬 수 없는 손실로 이어집니다. "우리 정부가 미는 산업이니 무조건 갈 거야"라며 몰빵했던 투자자들, 전문가의 말을 믿고 따라 샀던 투자자들은 모두 시장에 비싼 수업료를 내야 했습니다. 확신은 계좌 잔고를 녹이는 산성비와 같습니다.
정작 장담했던 전문가들은 당시의 유명세를 얻는 것으로 목적을 달성하며 사후의 어떠한 책임도 지지 않습니다. 이것은 대단히 심각한 '모럴 해저드'지만 지금까지 그 어떤 전문가도 자신이 틀린 것에 대해 사과한 것을 본 적이 없습니다. 그리고 피해는 오롯이 투자자의 몫입니다.
제가 투자를 사랑하고 숭상하며 평생을 바쳐 배우는 이유 중 하나는 투자의 정도(正道)를 걸어가는 길이 사람을 겸손하고 스스로 생각할 수 있게 만들어 주기 때문입니다. 시장은 누구나 평등하게 틀릴 수 있음을 매일 깨닫게 해 줍니다. 그리고 틀림을 인정하고 생각하여 수정할 줄 아는 자에게 다시 기회를 줍니다. 투자는 단순히 돈을 버는 기술이 아니라, 아집을 버리고 생각의 유연성을 키우는 수양의 길입니다.
정치적 극성화의 시대, 투자자는 어떻게 행동해야 할까요? 과학적으로 검증된 프로토콜을 제안합니다. 이는 장기적으로 성공한 투자자가 되기 위한 필수조건입니다.
첫째, 투자정책서(IPS) 작성: 목표, 위험 감내력, 자산 배분 원칙을 미리 글로 써두십시오. 감정이 흔들릴 때 등대가 되어줍니다.
둘째, 악마의 변호인 (Devil's Advocate): 투자 결정을 내리기 전, 의도적으로 반대 의견을 찾거나 누군가에게 비판해 달라고 요청하십시오. 메타분석에 따르면 이 방식이 합의보다 더 높은 품질의 결정을 낳습니다. 투자 단톡방에 들어가 '가즈아'를 외치는 군중사이에서 잠시 동안의 위안을 얻을 수는 있지만 결국 절망의 계산서를 받을 가능성만 높아집니다.
셋째, 의사결정 일지 작성: 투자 당시의 논거와 감정 상태를 기록하십시오. 모든 투자 구루들이 전략은 달라도 하나같이 강조하는 것이 바로 매매일지를 쓰는 것입니다. 이는 나중에 복기할 때 자신이 정치적 편향에 빠졌었는지 객관적으로 확인할 수 있습니다.
넷째, 48시간 냉각기: 선거, 탄핵 등 정치적 대사건 직후에는 48시간 동안 매매를 멈추십시오. 감정이 가라앉고 이성이 돌아올 시간을 주어야 합니다. 저 또한 이 원칙을 반드시 지킵니다. 마치 협력 부서의 누군가에게 화가 머리끝까지 났을 때에도 바로 메일을 쓰지 않고 하루 동안 생각한 뒤 정제해서 보내는 것처럼 말입니다. 물이나 생각이나 필터링이 필요한 건 매한가지입니다.
투자자는 또한 다음과 같은 여섯 가지 원칙을 금과옥조로 삼아야 합니다.
첫째, 정치와 투자를 분리해야 합니다. 투자의 유일한 기준은 '기업이 돈을 버는가'입니다. 기업에 가혹할 정도의 도덕적 기준을 요구하지 마십시오.
둘째, 반대 진영의 정보도 소비해야 합니다. 균형 잡힌 정보가 정확한 예측을 만듭니다. Duke University의 연구에 따르면 다양한 성향의 뉴스를 소비하는 투자자가 더 우수한 성과를 거두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셋째, 사건에 즉각 반응하지 않아야 합니다. 지금이라고 생각될 때면 감정이 가라앉을 때까지 48시간의 냉각기를 가지십시오. 지금 이 순간의 대부분은 단기 변동성일 뿐이며 정말 좋은 종목은 언제든 다시 기회를 줍니다.
넷째, 확신의 함정을 경계해야 합니다. 확신은 양날의 검입니다. 확신이 없는 투자는 잔바람에도 흔들리지만 과도한 확신은 집이 무너지는데도 피하지 않는 우둔함을 낳습니다. 내 확신을 끊임없이 의심하고 남의 합리적 근거와 비교해야 합니다.
다섯째, 정권은 바뀌어도 위대한 기업은 계속 성장함을 기억해야 합니다. 아마존과 애플, 엔비디아와 같은 위대한 기업들은 수많은 행정부를 거치면서 성장했습니다. 당장의 테마보다 시대의 흐름을 읽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여섯째, 겸손해야 합니다. 어쩌면 가장 중요한 원칙입니다. 시장은 개인보다 똑똑합니다. 찰리 멍거의 말처럼 "내가 모른다는 것을 아는 원 안에서" 행동해야 합니다. 자신의 한계를 겸손하게 인정하며 수련을 통해 자신의 범위를 늘려가야 합니다. 이를 위해 가장 좋은 방법은 독서를 통한 사색과 글쓰기입니다.
이 원칙들을 가슴에 새기고 계속 체크해야 합니다. 반대 진영의 말을 들었는가? 정치적 이유로 배제한 적이 있는가? 내 확신을 의심한 적이 있는가? 하나라도 "아니요"라면, 투자자의 계좌는 편향의 위험에 노출되어 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시장은 우리의 정치적 신념에 관심이 없습니다. 투자자는 정치가 아니라 가치에 우선적으로 집중해야 합니다. 투자 심리는 시장의 변동성보다 중요합니다.
세계적인 투자 대가들은 '마인드셋(Mindset)'과 '감정 제어'를 투자의 핵심으로 꼽으며, 이를 유지하기 위해 각자 고유한 명상법을 실천하고 있습니다.
세계 최대의 헤지펀드 '브리지워터'의 설립자인 레이 달리오는 하루 두 번, 20분씩의 초월명상을 통해 개방적인 태도와 평정심을 얻습니다. 이는 시장의 소음 속에서 균형을 잡게 해 준다고 합니다.
우버(Uber), 트위터(Twitter), 포스퀘어(Foursquare) 등 여러 성공적인 기술 기업에 초기 투자자로 참여하여 큰 수익을 올린 인도계 투자자이자 철학자인 나발 라비칸트는 아침에 1시간 동안 스스로의 생각을 차분히 정리하며 뇌 속의 '미해결 과제'들을 해소합니다.
최고의 트레이더 중 한 명인 폴 튜더 존스 또한 시장이 급변하거나 큰 손실을 입었을 때 즉시 명상을 통해 감정을 '리셋'하여 공포와 탐욕을 배제하며, 릭 루빈과 채권왕 빌 그로스 또한 명상을 통해 세상의 소리를 끄고 내면의 소리를 들으며 대중의 의견에 휩쓸리지 않는 힘을 기릅니다.
명상의 핵심은 '메타 인지'입니다. 공포 반응을 잠재우고(공포면역), 거시적인 흐름을 보게 하며(줌 아웃), 아집을 버리게 합니다(에고의 제거).
정말 긴 여정을 함께 걸어왔습니다. 이 주제를 피하지 않고 끝까지 쓴 제게도, 함께 읽어주신 여러분께도 고마움을 전합니다.
우리는 지난 시간, 한나 아렌트의 "악의 평범성"에서 출발하여 에른스트 블로흐의 "비동시성의 동시성"을 거치며 여섯 겹의 덫을 해부했고, 이번 시간을 통해 20대의 보수화 현상과 세대 갈등, 그리고 20대 여성들의 절박한 현실이라는 한국 사회의 두 가지 덫을 추가로 살펴보았습니다. 또한 우리는 아렌트의 사고·의지·판단, 신경가소성과 명상의 과학, 딥 캔버싱과 Street Epistemology, 갈등 해결 사례, 게임이론과 엘리너 오스트롬의 협력 원칙, 그리고 투자자의 자세 등 생각의 원칙과 방법까지 공부했습니다.
긴 여정을 거치면서 제가 지속적으로 마주한 메시지는 바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모든 것의 시작이며 끝입니다.
아돌프 아이히만의 가장 큰 죄악은 잔인함이 아니라 '무사고(thoughtlessness)'였습니다. 생각하기를 거부한 것, 그저 명령을 따른 것, 질문을 멈춘 것이었습니다. 우리 시대의 큰 갈등의 원인 역시 누군가 악마여서가 아닙니다. 우리가 서로 생각을 멈추었기 때문입니다.
투자에서도 똑같습니다. 파산하는 투자자는 악의가 있어서가 아닙니다. 생각을 멈추고 확신에 빠져 편향에 휩싸이기 때문입니다. 저 역시 여러 번 그 덫에 걸렸습니다. 정치적 성향 때문에 좋은 투자 기회를 놓친 적도 있고, 확신 때문에 손실을 키운 경험도 있습니다. 빠른 유행에 몸을 맡기고 확신의 소파에 앉는 순간 시장은 냉정하게 청구서를 내밉니다.
다행히도 우리에게는 선택권이 있습니다.
시민으로서 증오의 소용돌이에 갇혀 살 것인가, 아니면 오래 걸릴지라도 생각을 되찾고 대화를 복원할 것인가? 투자자로서 정치적 편향에 휩싸여 투자 기회를 놓칠 것인가, 아니면 냉정한 이성과 함께 시장에 집중할 것인가?
매일 10분 명상을 시도해 보는 건 어떨까요? 마음속의 어지러움을 정리하며 자신에게 오롯이 집중하는 시간은 정말 중요합니다. "결코", "절대"라는 단어를 줄여보고, "제 생각은 이러한데, 당신의 생각은 어떠십니까?"라고 물어보는 것을 시작합시다. 반대 진영의 주장을 살펴보고 이해하려 노력하면, 자신의 생각의 맹점도 보이기 시작합니다. 투자 결정을 내리기 전에 48시간 동안 생각하는 것은 정말 좋은 방법입니다. 빨리 가는 것보다 옳게 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우리는 서로를 포기해서는 안됩니다. 인간의 뇌는 변할 수 있음이 과학적으로 증명되었으며, 세계의 여러 나라들은 불가능할 것 같았던 갈등의 매듭을 풀어내고 있습니다.
워런 버핏이 평생 강조한 것은 "감정적 규율"입니다. 남들이 공포에 빠질 때 탐욕스러워하고, 탐욕이 넘칠 때 두려워해야 한다는 말은 단순한 투자 전략이 아닌, 자신의 감정을 관찰하는 메타인지이자, 군중에의 동조가 아닌 스스로 생각하는 능력의 중요성을 뜻하기도 합니다.
생각하는 투자자만이 살아남습니다. 생각을 멈춘 투자자는 아이히만처럼 평범한 악의 희생자가 됩니다. 다만 아이히만은 인류를 해쳤고, 우리는 자신의 포트폴리오를 해칠 뿐입니다.
공리주의를 주창한 제러미 벤담(Jeremy Bentham)은 어떤 행위의 효용이 사회 전체의 이로움(총행복의 증가)을 가져다줄 때 그 행위는 윤리적으로 정당하며 가치가 있다고 평가했습니다.
우리가 지금 겪고 있는 세대 간, 그리고 성별 간 겪는 갈등의 모습은 사회 전체의 이로움을 가져다주지 않은 채 비생산적이고 비정상적인 형태로 표출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기성세대의 기득권 수성 또한 사회 전체를 놓고 볼 때 결코 이롭다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소크라테스가 말했듯이, "너 자신을 알라"는 모든 지혜가 생각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됨을 뜻합니다. 하지만 때로는 올바른 생각을 한다 해도 자신의 이익을 지키기 위해, 혹은 두려움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올바른 생각을 외면하거나 움직이지 않는다면 그것은 생각을 멈추는 것보다 좋지 않은 결과를 불러올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래서 생각에는 반드시 행동이 동행해야 합니다. 그리고 다행히도 우리에게는 생각을 행동으로 연결해 줄 여러 과학적이며 경험적 방법이 존재합니다.
완벽한 사람은 없으며 여전히 매일 실수하겠지만 매일 조금씩, 한 걸음씩, 생각하며 노력하면, 결국 발전하며 더 좋은 사람이 될 수는 있음은 분명합니다. 그리고 그런 사람들이 많아질수록 우리 사회는 더 높은 밸류에이션을 받게 될 것입니다. 시장도, 인생도, 정치도 결국 같은 원리입니다.
함께 생각하고, 배우고, 성장하는 것. 그것이 우리가 가져야 하는 궁극의 목표이며 최선의 길임을 믿습니다.
두 시간에 걸쳐 어렵고 민감한 주제에 대한 긴 글을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글을 쓰며 제가 많이 부족하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저는 20대의 목소리와 그들의 생각을 완벽히 이해하기에는 여전히 부족합니다. 아마 어쩌면 평생 이해하지 못할지도 모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글을 쓰는 이유는, 이 글을 통해 그들과 함께 생각할 것이며, 듣는 귀와 열린 마음을 평생 가지며 누구 하나라도 포기하지 않겠다는 다짐을 새기기 위해서입니다.
이 글을 마치면서 스스로에게 물어봅니다.
"나는 정말로 생각하고 있는가, 아니면 그저 내 진영의 메아리를 반복하고 있는가?"
오늘도 같이 공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다음 시간에 2025년의 마지막 글로 찾아뵙겠습니다.
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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