캡슐커피로 에스프레소 투샷에 앵무새 설탕 한알 반 정도를 넣어 휘휘 저어서 한 모금 호로록 마셔보면 첫맛은 꽤나 씁쓸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달달함이 입천장에 돌아. 새벽 일찍 일어나 샤워를 하고 오롯이 혼자서 즐기는 에스프레소는 누군가의 매니저로, 코치로, 관리자로 혹은 때로 멘토로 살아가는 내게 꽤나 오랫동안 하루를 시작하는 의식이었어. 그렇게도 좋아하는 술을 끊은 이후에 찾아온 변화 중 하나가, 커피의 맛을 더 섬세하고 구석구석 '느낄'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인데 금주는 나로서 만족스러운 탈피였구나 싶어.
인생 처음으로 공식적인 쉼을 인정받아 잠시 그대들과 떨어져 있으며 좋았던 점은 나를 돌아볼 수 있었다는 것, 가족들과 나의 몸을 한없이 챙길 수 있었다는 것, 그리고 언젠가 다시 만날 준비를 해야 한다는 생각에 조각되어 남아있는 나의 기억들을 불러 모아 스스로에게 고해성사를 할 수 있을 정도의 여유도 있다는 것.
기회가 되어 그대들이 이 글을 읽게 되었을 때 우리는 어떤 자리에서, 어떤 모습일까. 그때 역시 때로 웃고 울고 서로 원망하기도 응원하기도 하는 불가근불가원 의 관계를 이어가고 있을까. 더러는 퇴사라는 선택을 하고 시간이 지나, 형! 하면서 찾아올 인물들이 있기도 할까. 나의 두 아이들에게 삼촌과 이모로 불리며 함께 어울렸던 그 시간들을 가슴에 담아 아빠와 엄마의 고된 삶을 자랑스럽게 선택하는 이들도 더러 있겠지?
팀장의 역할을 꽤나 오래 하면서 정말 많은 일들을 겪으며 한없이 유연해졌다고 생각하지만 지금도 늘 어렵고 조심스러운 일이 있어. 지나온 한때를 떠올려 볼 때, '팀장의 기억과 팀원의 기억은 다르다.'는 것.
팀장의 선의가 팀원의 입장에서는 부담이고 부정당 일 수 있기에, 한때의 좋았던 기억을 오랫동안 묵혀두고 심해에서 끌어올릴 때는 너무 조심스러워. 위험하기도 하지. 누군가에게는 두 번의 상처로 남을 수 있으니. 그래서 좀, 비겁하긴 하지만 오늘 나의 이야기는 드로잉 정도로 생각하며 써 내려가 보려고.
완벽하지 않은 인간으로 그리고 한때 누군가의 팀원이었던 내가 사십 중반을 향해 달려가는 '꼰대'가 되었음을 부인하고 싶었던 적이 참 많았어. 그래도 난 젊게 살아가고 있는데. 설마 내가, 하는 생각을 하면서 말이야. 이 '꼰대'라는 표현을 심지어 그 영역에 있는 이들도 좋아하진 않아.
꼰대들끼리 모여 술을 마시다가, 꼰대 1이 꼰대 2에게 얘길 해. '그거 너무 꼰대스러운 거 아니냐.' 그들도 부인하고 싶은 거야. 나는 아닐 거라고 생각하면서.
정체성 확립이 냉정하게 이루어진 사람이 아닐수록 더 꼰대스러운 언행을 할 확률이 높은 것 같아. 솔직하게 인정하고 받아들이며 그 안에서 줄 수 있는 최상의 것을 선별해서 내어주면 좋을 텐데, 스스로를 부인하다 보니 어색하고 솔직하지 못한 것들이 부자연스럽게 돌출되는 거지. 대부분 90년대생인 그대들이 이것을 모를 리가 없을 텐데 말이야. '다 너희를 위해서' 하는 이야기들은 '나도 하기 어려웠고 싫었던' 일들인데 자리가 자리이니 포장된 언어가 미덕이라 생각할 수밖에 없는 거지. 이 과정에 서사가 투여되는 시점에 라테 스토리로 변질되니 꼰대 입장에선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짠내 폴폴 나는 아저씨로 전락하게 돼. 우리도 한때, 그런 부류의 아저씨 들과 철벽을 치고 피해 다녔던 때가 있었는데 이제와 등을 돌리고 하늘 저 멀리 담배 연기를 날려 보내던 십 년 전의 팀장님들이 생각나네. 이해를 구하지 않은 간추린 서사를 들먹이니 나도 꼰대임을 인정했다고 보면 좋겠다.
회복탄력성이 떨어지는 이유는 사내의 정치적 역학관계를 고려하는 업무 패턴을 피하기 어렵기 때문인 것 같다. 나 역시도 일을 하기 위해 이곳에 왔는데, 어느 순간 일보다 더 신경 써야 할 것들이 많아졌고 이는 실로 내가 겪어 본 그 어떤 것보다 피로도가 높고 이 테두리 밖으로 벗어나기도 어려웠어. 확인되지 않은 소문들은 자존감을 떨어뜨리기도 하고, 더더욱 어려운 것은 이를 무시하고 업무에만 집중하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었고. '해야 할 일만 신경 써'라는 소리는 나 자신에게 하는 말이기도 했으니 자잘한 일들로 숱하게 엎어졌구나 싶다. 나는 나대로 할 말은 해야겠다 생각하면서도 그리하지 못한 경우도 많았고 대게 그 후폭풍이 내가 아닌 타인에게 휘몰아칠 때가 있다는 판단이 들 때 내가 할 수 있는 건 그저 조용히 입을 다물고 있는 것이었고 가끔 그게 참 비겁해 보였어. 그 시점이 재현된다고 해도 다른 선택을 하기는 쉽지 않겠다 싶을 때 나의 무력함을 느끼게 되고, 가끔 계산되지 않은 '소주 한 잔 할까'라는 나의 제안은 이런 자괴감 뒤에 내뱉은 씁쓸함이었다. 그때 말없이 곁에 있어 준 너희들이 참 고마웠어.
옳은 방향이 무엇인지 여전히 헷갈릴 때가 많아. 팀장은 그저 그대들보다 자연스럽게 터득한 경험의 양이 많은 이들이야.(요즘 보면 꼭 그런 것 같지만은 않지만) 대게는 그래. 다만 경험의 양이 많다고 해서 늘 질적으로 높은 수준의 조언만을 하기는 어렵지. 때때로 나보다 업무적으로 성숙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 팀원들도 있었어. 그런 경우엔 역으로 내가 많이 배우기도 해. 중요한 건 이런 순간에, 본인의 서열과 상관없이 배울 수 있는 부분은 꼭 익히고 넘어가는 것이 필요했어. 다행스럽게도 난 이 작업이 생각보다 어렵지 않았는데 그 이유를 생각해보면, 내 부족함을 공식적으로 인정했던 커밍아웃의 순간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하지 않았을까 싶어. 나는 ‘완벽한’ 팀장일 수 없고 앞으로도 완벽해질 수도 없기에 겉치레에 가까운 고군분투는 일찌감치 포기하고 동반성장의 배경을 공유했던 것이 팀장의 역할을 효율적으로 할 수 있는 환경이 되었던 것 같아.
모두에게 인정받고 싶은 욕심이 왜 없었을까. 나 역시도 그랬어. 다른 무엇보다 팀원들이었던 그대들에게 ‘좋은 팀장, 좋은 사람’으로 남았으면 하는 생각을 멈춘 적이 없었어. 그러다 보니 적당히 인간적인 면이 가려지지 않는 선까지만 포장을 한 적도 많았고 그 과정에서 흘러나오는 이야기들을 영웅담의 장르로 각색한 경우도 있었지. 당시에는 메시지가 분명하니 나머지는 가려서 듣겠지라고 생각했었는데, 이제 와서 보면 난 그저 솔직하지 못했던 거였어. ‘너희들을 위해서’라는 구시대적 꼰대의 변명도 적잖이 깔려 있기도 했고. 매슬로의 인간 욕구 5단계 이론 네 번째에 인정의 욕구가 있음을 근거 삼아 나의 행동이 정당했다며 스스로를 위로하기도 했어. 이건 지금 생각해도 부끄럽다. 생각해보면 보통의 삶을 살아온 내가 팀을 꾸리고 그 안에서 만난 인연들의 업무적 삶의 성장을 견인하는 역할을 하는 것이 이치에 맞는 것인가 싶기도 해. 이십 대 후반 은행원으로 첫 직장생활을 시작했을 때 나의 사수 혹은 팀장님들은 너무 커 보였거든. 범접하기 어려운, 적어도 나와는 조화롭지 않은 비범함을 갖고 있는 존재로 비쳤으니 지금의 나와는 사뭇 다른 특별함을 갖고 있는 이들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있었기에.
리더라는 존재 개개인은 각자가 가지고 있는 철학이 있지만 누구에게나 동일한 정답지처럼 적용하기는 어려워. 내가 이끄는 팀의 성격에 부합하는 코드를 팀원들에게 연결해야 하는데 그게 나의 철학과 어긋나는 경우도 있거든. 조직의 성격으로 인해서 말이야. 그래서 리더의 역할을 하는 이들은 본인이 있어야 할 자리를 잘 찾아가는 것이 중요해. 이건 정말이지 중요한 것 같아. 한 분야에서 차고 넘치는 역량을 발휘한 리더가 모든 영역에서도 그러할 것이라고 판단하는 것은 넌센스야. 새로운 적응을 거부하고 기존의 방식으로 성공했던 기억의 DNA를 팀에 뿌리게 되면 구성원들은 방향을 잡기가 어려워질 때가 많아. 번지수를 잘못 찾은 길잡이로 인한 피로감을 견뎌야 하는 사람은 그대들일 확률이 높거든. 심지어 잘못된 방향으로 흘러감을 모른 채로 말이지. 늘 전체를 조망하고 단계별로 좁혀 들어가는 프로세스와 균형감각을 유지하는 건 스스로를 위해서 필수적인 역량인 것 같아. 같은 팀에 있을 때나 팀장이지 떠나면 남보다도 못한 사이가 되기도 하잖아. 냉정하긴 하지만 나를 살릴 수 있는 유일한 존재는 나뿐이야. 내가 다 책임질게, 나만 믿고 따라와,라고 말하는 사람 치고 실한 리더는 없었어.
성장을 위한 삶이 중요하다고 생각했고 나의 매일은 그래야 한다고 여겼더랬지. 최근까지도 그랬어. 확실히 사람에겐 휴식이 필요한가 봐. 한 발짝 떨어져서 지금 리그 안에 있는 이들의 소식을 간간히 듣고 생각해보면, 아웅다웅하고 있는 모습이 치열한 삶의 현장으로 비유될 만큼 여물어 있는 시간인가 의문이 들 때가 있었어. 보기에도 피곤한 거지 그냥. 먹고살아야 하니까.
대다수의 우리들에겐 생계를 위해 절대 시간을 채울만한 나의 노동력을 성실히 제공하면 그뿐인데 쓸데없이 신경 써야 할 일들이 막 날아오잖아. 정말 짜증 나는 일이지. 더 중요한 건 그 ‘신경 써야 할 일들’이 진짜 신경 쓸만한 가치가 있는 일인지는 의문이라는 거야. 환장할 노릇이지. 이런 생각들이 하나 둘 늘어가다 어느 날 연차를 쓰고 방에 누워 천장을 바라보는 데, 형광등에서 발하는 빛 쪼가리에 비해 난 한없이 어둡고 뭉개져 있구나 싶거든. 대범 해지는 순간이면서 감상적이 되는 순간이기도 해. 누구나 꼭 한 번은 거쳐가는 생각 ‘나는 어떻게 살 것인가’의 포문을 여는 시점이지.
첫 직장 10년, 두 번째 직장 4년, 그리고 세 번째 이곳에서 2년 차.
완벽한 이직도, 완벽한 직장도, 완벽한 팀장도 없어. 더욱이 마음이 여리고, 따뜻한 인간적인 배려가 넘치는 관계를 직장에서 추구할수록 잿빛 가득한 세상을 목도하는 것이 어렵지 않을 거야. 정말 간혹 가다, 마음 따뜻한 팀장을 만나고 그대들을 위해 희생을 마다하지 않으며 인간적인 매력이 넘치고 업무적으로 존경할 만한 위인(?)을 만난다면 신은 그대들에게 팀장 복을 제외한 모든 것을 앗아간 것일 수도 있어. 웃프지만 진심이야.
몇몇 팀원들과의 술자리에서 부끄럽게 고백을 했던 적이 있었어.
“나, 그대들 때문에 먹고 산다.”
함께 했던 친구들이 당황스럽고 상기된 얼굴로 나를 바라보다 어색하니 소주를 입에 털어 넣던 기억이 나. 이 얘길 들었던 입장에선 어떤 생각이 들었을까 궁금할 때가 있었어. 사실 팀장이라는 존재는 팀이 있기 때문이고, 팀이 있다는 것은 구성원인 팀원이 존재하기 때문이니 팀장이 가족을 건사할 수 있는 생활을 유지할 수 있음은 팀원들이 각자의 역할을 잘해주기 때문이라고 생각하는 게 무리는 아니라고 봐. 그 굴레 안에서 서로 잘 되기를 바라고 솔직한 관계를 도모할 수 있다면 그래도 팍팍한 일상에 앵무새 설탕 두 조각만큼의 행복은 늘 함께하지 않을까?
곧 다시 보게 되겠지만, 빈자리를 그리워해 주는 그대들의 소식에 고맙고 뿌듯하다. 그날의 돼지껍데기와 소주 한잔을 그리워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