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행을 퇴직한 이후 달라진 것들

어떻게 하면 지금과 다른 삶을 살 수 있는가

by Davca

꽃 피는 봄이 오면 은행을 퇴직했던 2016년 5월 그때의 봄이 떠오른다.



내게는 잊고 싶지 않은 행복했던 기억과 생살을 찢는 듯한 고통 모두를 안겨주었던 그곳을 떠나, 은행 밖은 지옥이라던 선배들의 얘기를 실감하며 오늘에 이르렀다. 완벽하게 만족하는 삶이라 할 수는 없겠지만, 이만큼 이루었음에 감사하고 있다. 지난 8년간 두 번의 이직을 경험했고 과장에서 출발하여 경영진이 되었다. 내 명의의 34평 아파트를 장만했고 20억 가량의 자산을 보유하게 되었다. 은행원의 삶이었어도 충분히 가능했을 상황이었겠으나 그때를 돌이켜보면 사십 초반에 이리될 확률은 그리 높아 보이지 않았다.



변하지 않은 것도 있다. 난 여전히 걷는 것을 좋아하고 단출하고 소박한 술자리가 편하다. 독서와 기록이 일상이며 새벽의 사색을 즐긴다.


퇴직 후 교류가 빈번하지 않았던 입행 동기들은 40대 중반의 차장 직급이 되었고, 최근 들어 '이직의 기술'에 대해 묻는다. 모든 이들의 상황과 커리어의 선호가 다를 것이기에 일반화할 수 없는 나의 경험은 꺼내기 어려운 지난 이야기일 뿐이다. 아이들은 커가고 지출의 규모가 달라지는 데, 작금의 은행 상황에서 인생의 다음 단계를 준비하는 것이 불가능해 보인다고 말한다. 부지점장으로의 승진은 제한적이니 더 늦기 전에 다른 공간에서 '두 번째' 인생을 꿈꿔보고 싶다고 한다. 8년 전 나를 걱정하던 눈빛들은 티 내려하지 않는 부러움으로 다가오기도 했다. 난 그들의 인생과 가족을 응원할 뿐이다. 결국 모든 두려움과 위험을 떠안을 용기를 내는 것은 어느 누구도 대신할 수 없고 누군가의 한 마디에 의해서 결정되어서도 안되기 때문에.




지금이라면 어떨지 모르겠지만 서른 중반, 은행원의 명함을 반납하고 받게 된 퇴직금은 나에게 꽤 요긴하게 쓰였다.


당시 기준으로 혹은 개인적인 입장에서 어느 정도의 휴식기를 가질만한 수준의 금액이었고 덕분에 가족과 많은 시간 함께하지 못했던 아쉬움을 조금이나마 달래 볼 수 있었다. 휴가도 제대로 즐겨본 적이 없었던 상황에서 우리 가족에게는 은행원으로서의 지난 시간을 보상받은 기분이었다.


하지만 은행을 퇴사한 이후 지금까지 난, 여전히 예전처럼 일하고 있다. 너희 엄마는 이 점에 대해 불만이 크다. 워라밸 찾겠다고 은행원임을 포기한 사람이 전보다 일을 더하고 있다고 말이다. 지난 시간 깨달은 것이 하나 있다면, 내가 원하는 것을 취하기 위해 내가 내어놓는 것도 있어야 한다는 사실이다. 사실상 워라밸을 꿈꾸며 여유 있는 생활을 희망하는 것이 자연의 법칙으로도 성립될 수 없다는 것을 온몸으로 느꼈다. 적게 벌고 개인의 시간을 더 확보할 수 있는 삶과, 많이 버는 대신 개인의 시간을 포기하는 것 사이에서 난 선택을 해야 했고 어떻게 흘러갈지 정확히 예측하기는 어려우나, 당장은 후자를 선택했다. 단, 내가 누릴 수 있는 선호하는 근무형태와 문화를 가진 기업을 선택했고 커리어를 이어갔다. 내가 가진 장점이 부각될 수 있는 영역을 조금씩 넓혀갔던 것이고 이것은 유효했다.


하지만 몇 년 전부터 나의 ‘시간을 대가로 급여소득을 시현하는 삶’에서 벗어나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은행원 이었을때에도 마찬가지였지만, 난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 많은 잠재능력을 보유하고 있음을 믿고 이를 통해 사회에 더 많은 기여를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여 업무에 몰입하는 시간 외에 나의 새로운 영역을 조금씩 구축해가고 있다. 아직은 희미해 보이긴 하지만, 앞으로 3년 안에 개인적으로 뜻하는 바를 이룰 수 있을 것이라는 확신이 있다. 그렇게 마음먹었기 때문에, 다시 한번 Bravo my life 를 위해 준비하는 것이다.



은행을 퇴사한 뒤로 나에게 생긴 것은, 현실의 안락함에 대한 기대치를 이성적이고 냉정하게 조망해 볼 수 있는 시각이었다.

온실에 있을 땐 잘 몰랐다. 그냥 이렇게 주욱 가다 보면 나쁘지 않게 살 거라고 낙관했었다. 사실 틀린 말도 아니었다. 주위 대부분이 그랬고, 나 역시도 위기의식이나 다음 단계로 진입하기 위한 삶의 준비를 중요하게 생각지 못했다. 지금과는 온도차가 있을지 모르겠지만, 당시의 은행원은 안정적인 직업으로 인정받았고 실로 그러했다. 그러다 2015년 11월 첫째 딸이 태어난 이후로 생각이 뒤틀리게 된것이다. 난 아빠로도 온전히 존재하고 싶었다. 힘들었던 고민의 과정을 통해 내린 결정으로 인해, 난 은행원 이었을때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부분들을 얻기 위해 전투적으로 일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해야만 그때의 특권이라 여기던 것들에 조금이나마 근접할 수 있었다. 순간순간 밀려오는 공포와 두려움이 매일 나를 지구의 핵까지 끌어당기는 것 같았고 하루하루 ‘살아내자’는 다짐이 절실했다. 이렇게 원점에서부터 다시 시작이었고 지금의 안정을 찾기까지 5년여의 시간이 걸렸다.


나의 선택과 결정으로 모든 것이 흘러감을 처절하게 깨달았고 난 책임을 졌다. 그런 과정 끝에 오늘이라는 선물이 찾아온 것이다.

지금도 열심히 일하지만, 예전에 비해 그 내용들은 좀 달라졌다. 실무대신 전체적인 구조와 사람에 대해 고민하고 흐름을 읽는다. 대외적인 부분에도 관심을 갖고 내가 할 수 있는 일들을 주도적으로 찾는다. 한 그룹의 회장단과 거래처의 관계로 미팅을 진행하고 해외출장을 다니며 미래를 준비한다. 8년 전 은행을 나와야겠다는 결심을 내리지 못했다면 경험하지 못했을 귀중한 것들을 매일 얻고 있는 것이다. 당시 퇴사를 앞두고 극한의 두려움 속에서 고민하고 이리저리 재보며 어렵사리 내렸던 의사결정의 경험은, 옳은 판단을 내릴 수 있는 데에 많은 도움이 되기도 된다. 경험이 자산이라는 말은 적어도 내게 틀리지 않았다.




삶의 주도권을 상대적으로 더 갖게 되었고, 나의 결정이 회사의 방향에 영향을 미치며 그런 결정을 내릴 수 있을만한 경험들이 나만의 무기가 되어주고 있었다. 달라진 것이라곤 모든 업무에 대해 나 스스로 방법을 찾고 방향을 잡아가야 한다는 책임감과 의무감의 강도라고 할 수 있겠다. 앞으로 너희들의 삶에서도 따뜻한 온실에서의 생활이, 성장의 과정에서 있을 수 있겠지만 이를 벗어난 이후에 혼자의 힘으로 바로설 수 있는 능력을 키우는 것이 너무나도 중요하다는 얘기를 꼭 들려주고 싶었다.


중요한 것은 나의 마인드, 추진력, 절박함 그리고 책임감이었고 이 바탕에는 매일 새벽 스스로를 다잡으며 기록해 두었던 미래에 대한 긍정적인 다짐과 수백 권의 양서가 있었다. 덕분에 난 지금, 너희들과 평온한 삶을 살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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